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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214화 (214/238)

214화 호랑이와 봉황, 그리고 늑대 (2)

검후 소소와 음괴 유설.

둘은 어찌나 잘 맞는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어울렸다.

괴이한 놀이는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지금은 서로가 두 눈을 가린 채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탓-! 타앗-!

소소와 유설의 신형이 동시에 날아올랐다.

천으로 눈을 가렸음에도 움직임에 거침이 없었다.

지붕을 타고 날아다니던 둘은 장원의 담장을 넘어 계곡으로 향했다.

소소가 지나가는 자리로 물줄기가 세차게 갈라지며 뿜어졌다.

그야말로 명불허전의 경공술이었다.

하지만 그 뒤를 쫓는 유설 또한 만만치 않았다.

잡힐 듯 말 듯 하면서 둘의 술래잡기는 계속되었다.

모처럼 유설의 입이 귓가에 걸렸다.

이렇게 마음 편히 놀 수 있는 강자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마주한 그 누구보다도 압도적으로 강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줄 수 있을 정도로.

“설아, 어서 언니 잡아봐!”

계곡을 달리던 둘은 급기야 폭포를 역류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물줄기를 밟고 날아오르는 모습은 흡사 신선들처럼 보일 정도였다.

타타타탓-!

지형이 바뀌는 순간 돌연 유설의 움직임이 급격히 빨라졌다.

선풍보법을 펼치자, 그 모습이 흡사 돌풍에 휩싸인 화살과도 같았다.

가히 빛의 속도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빨랐다.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힌 유설이 고사리 같은 손을 재빨리 내뻗었다.

“잡았……?”

환호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돌연 소소의 전신으로 눈부신 섬광이 빛났다.

다시 빛이 사그라졌을 땐 이미 거리가 삼 장이나 벌어져 버렸다.

검후의 경신술인 섬전비영보(閃電飛影步)로 무림에서 제일로 쳐주는 회피기술이었다.

물론 유설은 이러한 무공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난생처음으로 접해본 기술이었으니 놓칠 수밖에.

“언니, 너무해!”

약이 바짝 오른 유설이 속도를 더욱 높이려는 찰나.

소소가 황급히 경공을 멈추며 안대를 풀었다.

“여기까지만 하자. 이러다 언니 두들겨 맞겠어.”

웃음기 섞인 그녀의 농담에 유설이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방금 그거 어떻게 했어?”

“언니도 아버지한테 전수받은 섬전비영보라는 경신술이야.”

“좋겠다……. 우리 할배는 나한테 그런 거 안 알려줬는데.”

소소는 유설이 귀여운지 손등으로 볼을 쓰다듬었다.

“그럼 언니가 알려줄게.”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유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나한테도 알려준다구?”

“응, 어렵지 않아. 설이라면 하루 안에 배울 수 있을걸?”

유설은 두 주먹을 움켜쥐고 방방 뛰며 좋아했다. 몹시 부러웠던 모양이었다.

“푸흐흐. 고마워, 언니!”

“지금 바로 알려줄까?”

“아니, 내일!”

소소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유를 물었다.

“응? 오늘은?”

“나 이제 할배 수련 도와주러 가야 해.”

최근 유설은 하루에 한 시진씩 할아버지의 수련을 돕고 있었다.

이제야 소소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설이는 참 효녀로구나. 매일 이렇게 수련을 도와주는 거야?”

“응. 빨리 강해져야 한대.”

유설도 빨리 할아버지가 역근경의 수련을 마치길 바라고 있었다.

그래야 다시 강호행을 시작하고, 무림맹주를 향해 한 발자국을 더 다가갈 터였으니.

소소도 그들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럼 언니도 같이 도와줄까?”

“정말? 너무 고마워, 언니!”

유설이 소소의 손을 잡고 전각으로 이끌었다.

지금 유진산은 육체의 단련이 아니라 기공수련을 하고 있었다.

그걸 한 명도 아닌, 두 명이 돕겠다니.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검후와 음괴가 어떤 자들인가. 무(武)의 정점에 이른 두 명의 절세고수에겐 해당하지 않는 말이었다.

끼익-!

방문이 열리자, 등을 돌려 앉은 유진산의 모습이 나타났다. 주위로 황금빛 광채가 은은히 빛나는 것을 보니 역근경을 수련하는 듯했다.

그 순간 유설의 얼굴에 장난기가 서렸다.

“할배~ 지금부터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유설이 검지를 입술에 붙이고는 소소에게 눈짓을 보냈다.

- 언니, 쉿. 깜짝 놀라게 해주자.

- 할아버지한테? 그래도 돼?

- 응. 조용히 와.

검후는 내키지 않았으나, 어쩌겠는가. 장단에 맞춰줄 수밖에.

잠시 후 유설의 손바닥이 먼저 할아버지의 허리 부근에 밀착되었다.

매일 해오던 일이었기에 그는 놀라지 않았다.

손녀의 내공이 더해지자, 유진산의 주변을 감싼 황금빛 기류가 더욱 거세졌다.

화아아악-!

수련의 효과를 최대치로 올리기 위해선 모든 정신을 집중해야 할 터.

잠시 후 그가 무아지경에 빠져들 찰나였다.

돌연 유진산의 입에서 기겁하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화들짝 놀랐다. 갑자기 또 다른 진기가 파도처럼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손녀가 보내는 기운만 다스리기에도 모든 신경을 집중해야 했었다.

허나 그 힘이 곱절이 되었으니 놀랄 수밖에.

시간이 지날수록 전신의 혈도가 터질 듯 팽창했다.

이 정도라면 검후의 기운이 틀림없을 터.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검후가 왜 이런 짓을…….’

허나 깊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모든 신경을 기의 흐름에만 집중해야 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서로 다른 진기들이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소소와 유설이 잘 조종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 설아, 수위를 좀 낮추는 게 어떨까? 무리가 오시는 것 같은데?

- 괜찮아 언니. 우리 할배는 그렇게 약하지 않아.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충격도 필요한 법.

유설은 할아버지가 버티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소소도 보조를 맞추었다.

유설의 진기가 상반신의 혈도로 향했으며, 소소의 진기는 그의 하반신을 집중적으로 지원했다.

유진산은 긴장하여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화아아악-!!!

찰나의 순간 방 안에 밝은 섬광이 번쩍였다가 이내 사그라졌다.

그간 정체되어 있었던 역근경의 화후가 칠성(七成)을 돌파하고, 팔성(八成)에 도달한 것이다.

유진산은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성공이구나!’

찰나의 작은 방심이 실수를 부르고야 말았다.

갑자기 기혈이 뒤틀리며 숨이 턱 하고 막혀왔다.

“커억!”

주화입마에 빠져들 것처럼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다급한 상황에 유설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할배!!!”

화들짝 놀란 유설이 진기의 흐름을 바꾸었다. 소소도 보조를 맞추며 일주천에 힘을 보태었다.

두 명의 현경이 아니라면 시도조차 불가능할 수법이었다.

뒤틀리던 유진산의 기혈이 점차 안정을 되찾아갔다.

잠시 후 한숨을 돌린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만…….”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그의 얼굴은 몹시 초췌해져 있었다.

유설이 시무룩한 얼굴로 물었다.

“할배, 괜찮아?”

“도와주는 건 좋지만, 미리 얘기라도 해줘야지. 깜짝 놀라지 않았느냐.”

“이제 장난 안 칠게.”

어디 한두 번 속았던가.

그리고 손녀는 그렇다 쳐도 그녀는 왜…….

유진산이 검후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녀가 뜨끔하다는 표정으로 버벅대더니 전음을 보내왔다.

- 저, 저는 설이가 시켜서…….

천하의 검후가 손녀의 장난에 동참했다는 것부터가 웃길 노릇이었다.

유진산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휴. 당분간 할애비 수련은 안 도와줘도 된다.”

그가 문밖으로 나가자 유설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큰일 났어, 언니. 우리가 놀라게 해서 삐졌나 봐.”

“그럼 어떡하지? 좋은 방법이 없을까?”

잠시 턱을 괴고 고민하던 유설이 은근슬쩍 물었다.

“언니 요리할 줄 알아?”

“그, 그거야 조금…….”

“그럼 할배한테 맛있는 거 만들어주면 풀릴 거야.”

“뭘 좋아하셔?”

“음. 동파육이랑 국수랑 그리고…….”

한편 밖으로 나온 유진산은 둘의 대화를 다 듣고 있었다.

‘전부 다 네가 좋아하는 음식들이잖느냐.’

손녀의 잔머리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정자로 가서 앉았다.

모처럼 바람을 맞으며 생각을 정리해볼 작정이었다.

‘그나저나 이거 큰일이로구나.’

손녀가 검후와 함께 쌍으로 장난을 치다니.

그녀가 떠날 때까지 피곤한 일이 끊이지 않을 듯했다.

멍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자들이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의 외침이 우렁차게 들려왔다.

“대협, 계십니까!?”

그 순간 앉아있던 유진산이 벌떡 일어섰다. 그들의 정체를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보았던 손녀의 강호 친구들로, 극살오의라 불리는 자들이었다.

그는 그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며 손짓을 보냈다.

“이 녀석들, 이리 와.”

유진산을 발견한 다섯 명의 사파 고수는 흠칫하며 당황했다.

“양, 양괴 대협도 계셨습니까?”

“안, 안녕하십니까, 대협.”

그렇지 않아도 이놈들에게 볼일이 있었던 유진산이었다.

그는 마침 잘 걸렸다는 듯 허리춤에 양손을 올리고 다가갔다.

“대협은 무슨 놈의 대협!? 이 녀석들이 겁도 없이 음괴를 꼬드겨서 무림맹의 분타를 공격했겠다?”

불과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손녀가 극살오의를 따라가서 무림맹의 분타를 털지 않았던가.

손녀를 꾀어낸 것이 괘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음, 음괴 대협께서 결정하신 일입니다.”

“정, 정말입니다. 저기 계시니 물어보십시오!”

극살오의 중 한 명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담장 위에서 손녀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이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유진산이 눈에 힘을 주자, 유설이 재빨리 머리를 숙였다. 그 모습이 흡사 자라가 머리를 감추는 듯했다.

음괴에게 외면받은 극살오의는 더욱 당황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유진산의 고함이 이어졌다.

“이놈들이 끝까지 거짓말을 해!?”

극살오의도 자신들의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싹싹 빌기 시작했다.

“죽,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대협.”

“목,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어느 정도 반성하는 기미가 보였기 때문일까? 유진산의 노기가 한층 수그러들었다.

“근데 이번엔 뭐 때문에 왔어? 또 뭘 꼬시려고?”

극살오의 중 맏형인 천우환이 양손을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 저희가 지금 무림맹에 쫓기고 있습니다…….”

“쫓기는 놈들이 왜 우리 집으로 와? 미친 게야?”

대충 어떤 상황인지는 유진산도 짐작하고 있었다.

잠자는 무림맹을 들쑤셔놨으니, 그들의 추적과 보복이 뒤따르는 건 당연했다.

의문인 점은 이 녀석들을 쫓는 자가 누구냐는 것이었다.

절정을 넘어선 다섯 명의 고수들이 겁을 먹을 정도면 보통 상대가 아닐 터.

하지만 그게 누구라도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검후와 음괴가 함께 있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살려주십시오. 저희가 의지할 곳은 여기밖에 없습니다.”

손녀가 강호에서 사귄 친구들을 그냥 내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유진산은 팔짱을 낀 채 그들을 한 명씩 살펴보았다.

한동안 먹지도 못하고 도망쳐 다녔는지, 하나같이 꾀죄죄한 몰골들이었다.

“그러게 왜 그런 미친 짓을 하고 다녔느냐. 그냥은 안 돼.”

천우환은 물러설 곳이 없다는 듯 필사적이었다.

“며칠만 머무르게 해주십시오.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할 테니, 제발…….”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집안의 잡일을 도울 인력이 필요했었다. 당분간 손녀와 자신이 최대한 수련에 집중할 수 있도록.

“흠. 헌데 집에 손님이 와있어서 좀 불편할 텐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누가 와계시든 불편함이 없도록 쥐죽은 듯이 있겠습니다.”

“아니, 너희들이 불편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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