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곧 간다고 전해라 (2)
조손은 팔짱을 낀 채로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유설은 기운이 없는지 걷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마치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표정이었다.
“할배, 우리 이제 거지 됐어. 내가 어떻게 돈을 모아서 산 집인데…….”
집이 홀라당 타버렸으니, 전 재산을 잃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우울하기는 유진산도 마찬가지였다.
집을 사서 좋아하던 손녀의 모습이 바로 어제 같거늘.
이제 막 자리를 잡은 찰나에 봉변을 당할 줄이야.
게다가 진산삼을 제외한 텃밭의 작물들을 모두 날린 것만 생각하면 울화통이 터졌다.
“빌어먹을 무림맹 녀석들. 감히 우리 집에 불을 질러?”
조손의 뒤에서는 극살오의가 거대한 자루를 하나씩 동여매고 뒤따르고 있었다. 미리 수확해 놓은 진산삼이었다.
그들 중 천우환이 옆으로 다가와 양손을 모았다.
“여섯 명 중 세 놈은 종남파입니다. 두 놈은 당문, 그리고 대머리 년은 아미파입니다.”
집에 불을 질렀던 무림맹원들의 구성이었다.
그들의 사문은 이미 유진산도 한눈에 알아봤던 상태였다.
‘우리 설이의 지존행을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고민했는데, 이 순서로 가야겠구나. 차라리 잘된 일이라 생각하자.’
그래도 명분은 확실히 생긴 셈이었다.
종남파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이후 남쪽의 한수강을 건너 사천에 당도하면 당문이 나온다. 거기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아미산이었다.
“수고했다. 우선 종남파부터 손 좀 봐야겠다.”
“예, 어르신. 아무래도 셋 중에선 거기가 제일 만만할 겁니다. 거리도 가깝고.”
“그렇긴 하지. 근데 너희들은 어디까지 따라올 거야?”
천우환은 흠칫하며 머뭇거렸다.
이윽고 유진산의 눈치를 슬슬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천까지만 동행을 허락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너희들도 사천으로 넘어가려고?”
“예. 그곳에 가면 저희가 의지할 곳이 있습니다.”
이곳 섬서에는 극살오의를 노리는 무림맹의 고수들이 너무나 많았다.
사천이라면 어느 정도는 숨통이 트일 터.
유진산은 고민 끝에 그들의 동행을 며칠 더 허락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지켜본 결과 노력이 가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사천에 도착해서 서로 갈 길을 가는 것으로 하지.”
“예, 어르신. 고맙습니다!”
그곳으로 가기 전에 앞서서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먼저 패도문에 진산삼을 전달해야 하고, 종남파를 경유해야 한다.
홀로 패도문을 활보하던 유진산은 주위를 쓱 둘러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손녀가 울먹이며 친구들에게 사건을 설명하고 있었다. 서럽다는 표정을 보니, 위로받고 싶은 모양이었다.
한쪽에선 극살오의가 패도문의 문도들에게 진산삼을 인계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귀에 익은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이오!? 집에 불이 났다니?”
한달음에 달려온 백규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무림맹이었네. 소심한 복수를 해놨더군.”
“이런 쳐 죽일 놈들이 있나……. 갈 곳이 없으면 여기서 지내소. 내 부족함 없이 챙겨줄 테니.”
“마음만 고맙게 받겠네. 일을 마치면, 본래의 집으로 돌아가야겠지.”
“진양현의 유가장 말이오? 장원 전체가 지방관아에 압류당했다고 하지 않았소?”
“되찾아와야지. 때가 오면.”
방법이야 찾으면 그뿐이지만, 지금은 시기상조였다. 자칫 자리를 비운 사이에 또다시 해코지를 당할 수가 있었으니까.
“헌데 무슨 일을 마친다는 거요?”
“우리 집에 검후가 다녀갔었네. 모두 아우가 주선해준 덕분일세.”
백규가 우쭐한 표정으로 능청을 떨었다.
“내가 우리 련주님한테 힘 좀 썼소이다. 그나저나 얘기는 잘된 거요?”
“음. 정황에 대한 부분은 아우도 다 들었을 테고. 검후가 떠나기 전에 부탁한 일이 있네.”
“물어봐도 되오?”
백규는 유진산에게 있어서 스스럼없는 지인 중 한 명이었다. 굳이 숨길 이유는 없었다.
“강호의 강자들을 모두 굴복시키고, 지존이 되어달라더군. 무림통합을 위해서.”
“형님이 말이오?”
유진산은 피식 웃고야 말았다.
“아우가 농담이 많이 늘었구만.”
“푸하하. 형님의 눈치도 예전 같지 않소. 그나저나 그런다고 정파 놈들이 머리를 숙일 리가 없지 않소?”
“상황이 그렇게 만들어 줄 거라더군. 어차피 꼴도 보기 싫은 무림맹 놈들을 때려잡는 일이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지. 덕분에 설이가 검후의 무공도 몇 가지 얻었고.”
“흠. 무사히 잘 되기만을 바랄 뿐이오. 어쨌거나 도와줄 게 있으면 뭐든 말씀하소.”
유진산은 조용히 웃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현재로선 패도문의 도움을 받을만한 일은 없었다.
잠시 후 둘의 발걸음이 문파의 대연무장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그곳을 바라보던 유진산이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아니, 저건 도대체 무슨 광경인가?”
그곳엔 지금 믿을 수 없는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파계승 정혜가 수십여 명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닌가.
그를 연무장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아. 스님 말이오? 영문은 모르겠지만, 며칠 전부터 귀두대의 수련을 지도해주고 있소.”
고강한 무공을 지닌 정혜가 귀두대의 애들을 도와준다니?
그렇다면 성장에 날개를 단 셈이나 다름없었다.
“혈사객과 싸운 이후로 위기의식을 느낀 모양이로군.”
“내 생각도 그렇소. 그리고 그날 이후로 우리 패도문을 진정한 아군이라 인식한 모양이오.”
함께 싸워줄 강한 동료는 많을수록 좋은 법.
게다가 정혜 또한 귀두대를 통해 몸 상태를 최상으로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땡중이 비록 정신이 온전치 않아도, 누굴 가르치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네.”
유진산도 그에게 무공을 배워봐서 잘 알고 있었다.
한때는 소림사의 기둥이었던 만큼 그의 재능은 상상을 초월했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것만 제외하면, 명실상부 최고의 아군이었다.
“앞으로 우리 패도문의 귀두대가 어떻게 성장할지 기대되지 않소?”
“아마도 단일 조직으로는 무림에서 최강이 될 걸세. 저 모습을 보니 한시름 놓이는구만.”
백규도 동의한다는 듯 씩 웃으며 답했다.
“그러니까 이곳은 걱정하지 말고 편히 다녀오소.”
고개를 끄덕이던 유진산의 시야에 극살오의가 잡혔다.
그들은 진산삼을 인계한 후, 한곳에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저자들이 자네 부하들에게 진산삼을 넘겼네. 다행히 불타기 전에 수확할 수 있었어.”
“고맙소, 형님. 틀림없이 귀두대의 내공 증진에 도움이 될 것이오.”
“얼추 오백 뿌리쯤 되는 것 같으니 알아서 잘 분배하시게. 헌데 맛이 좀 고약해서 먹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군.”
백규가 눈을 크게 뜨고 유진산을 바라보았다.
“몸에 좋은 영약에 맛이 뭐가 중요하오? 주기만 한 것도 감지덕지요.”
그래도 유진산은 걱정이 가시질 않았다. 그 고통은 자신도 겪어봤으니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고민해본 결과, 빻아서 가루로 만든 다음에 물과 함께 단번에 들이켜야 하네. 그럼 능히 한 개 정도는 먹을 수 있을 걸세.”
“그런 말 마소, 형님. 아직도 우리 패도문을 모르오?”
“왜 모르겠는가. 오직 앞만 보고 돌진하는 사내들의 문파지.”
백규가 주먹으로 자신의 앞가슴을 쿵쿵 두들겼다.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 애들은 한 번에 다 씹어먹을 테니까.”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백규가 누구인가. 자신이 아는 그 누구보다 패기가 넘치는 인물이었다.
유진산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속에 손을 넣었다.
이윽고 손수건에 쌓인 무엇인가를 꺼내어 백규에게 내밀었다.
“알아서 하시게. 그리고 이건 설이가 자네 몫으로 따로 챙겨준 걸세. 가장 통통한 녀석으로 직접 고른 세 뿌리일세.”
“하하핫! 역시 우리 조카밖에 없소. 삼촌이라고 이런 걸 다 챙겨주다니.”
백규는 날아갈 듯이 좋아했다.
몸에 좋은 영약을 마다할 무림인이 누가 있겠는가. 그것도 세 뿌리나 선물을 받았는데 말이다.
무엇보다 조카가 직접 골랐다는 말에 마음이 흐뭇해졌다.
“혹시 모르니 먼저 먹어보고 판단하게. 아무도 없을 때 나눠서…….”
하지만 유진산의 경고는 한발 늦고야 말았다.
백규는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진산삼을 우걱우걱 씹기 시작했다.
한 번에 세 뿌리를 먹는 모습이 경이로울 정도였다.
포동포동 살이 오른 세 뿌리가 눈 깜짝할 사이 사라져갔다.
지켜보던 유진산은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 어떻게 그냥 먹었지? 맛이 변하기라도 한 건가?’
자신은 한 뿌리에 생사를 오갔거늘,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순식간에 세 뿌리를 모두 해치운 백규는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반들반들한 대머리에 힘줄이 솟아난 것을 제외하곤, 크게 이상이 없어 보였다.
“……다 먹었소, 형님. 좋은 영약을 먹었으니, 나는 어서 돌아가서 운기조식을 해야 할 것 같소.”
“암, 그래야지. 역시 아우답구만.”
“내가 별거 아니라 말하지 않았소. 아무튼, 좀 기다렸다가 이따 식사나 하고 가소.”
시장에서 먹은 음식이 아직 소화도 되지 않았을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집이 불타버린 직후라 입맛이 싹 사라진 상태였다.
“아닐세. 아우 얼굴까지 봤으니 되었네. 갈 길이 머니, 이만 가봐야겠군.”
“그럼 아쉽지만 어쩔 수 없겠구려. 돌아올 때 술이나 한 병 사 오소, 형님.”
인사를 마친 백규는 그대로 등을 돌려 멀어져 갔다.
유진산은 잠시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것참 이상한 일이로군…….’
참을성이 대단할 것일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등을 돌려 손녀가 있을 곳을 향해 걷고 있을 때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디선가 호각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삐이이익-!
백규가 사라졌던 전각 뒤의 모퉁이 부근이었다.
누군가의 다급한 고함이 거세게 메아리쳤다.
“문, 문주님이 독살당했다!”
만독불침의 신체를 지닌 화경에게 독살이라니.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주변의 문도들은 난리가 났다.
“뭐!? 문주님이 왜 독살을 당해?”
“빨, 빨리 와봐!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 계셔!”
유진산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세 뿌리나 먹었으니 그 고통이 오죽할까.
그들을 뒤로한 채 얼마 걷지 않았을 때였다.
“할배가 삼촌을 독살했어?”
어디선가 나타난 유설이 웃음을 참으며 놀려대고 있었다.
“네가 한 번에 세 뿌리나 줬기 때문이다. 삼촌이 죽으면 설이 너 때문이야.”
“풉. 아니야. 나는 고르기만 했어. 할배가 준 거라구.”
손녀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결국엔 자신의 손으로 건넨 거였으니까.
어쨌거나 몸에 좋은 영약을 챙겨준 것을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튼, 어서 도망가자꾸나. 삼촌 일어나서 혼나기 전에.”
마치 산책을 하듯 종남산을 오르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선두의 두 명은 음양쌍괴였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극살오의가 멀찍이서 뒤따랐다.
“저희도 같이 돕겠습니다, 어르신.”
유진산은 어깨 뒤로 한 손을 올려 보였다.
“멀리서 구경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끼어드는 건 안 돼.”
무림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지존행의 첫 단추가 종남파였다.
결코, 다른 이들의 손을 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산의 중턱쯤에 이르자 푯말 하나가 꽂혀 있었다.
『이곳부터는 종남파의 영역으로 외부인의 출입을 불허한다.』
유진산에겐 낯설지 않은 광경이었다. 종남파를 방문하는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으니까.
처음은 혼자 잠입해왔다가 장로들에게 발각되어 겨우 도망쳤고, 두 번째는 손녀와 함께 입구에서 몇 명만 유인하여 싸운 것이 전부였다.
조손이 함께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조금 더 걷자 깎아지른 절벽의 틈새로 이어진 산길이 보였다.
소수의 인원으로 길목을 차단하기에는 가장 좋은 위치였다.
잠시 후 어딘가에서 경고를 알리는 외침이 들려왔다.
“누구냐!? 당장 멈추고, 정체를 밝혀라!”
유진산은 소리친 도사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전면으로 오 장 거리의 나무 위. 예전에 방문했을 때와 같은 위치였다.
과거엔 알아볼 수 없었지만, 지금은 매복한 자들의 얼굴까지도 보였다. 그만큼 무공이 상승했기 때문이리라.
“쯧쯧. 지난번에 여기서 봤던 녀석이구나. 그렇게 눈썰미가 없으니, 몇 년째 입구만 지키고 있지.”
매복한 도사는 상대의 목소리를 기억해낸 듯 헛바람까지 집어삼키며 기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