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맞는 순서는 노부가 정한다 (1)
“어른이 왔으면 냉큼 내려와서 인사를 해야지? 건방진 말코도사들 같으니라고.”
매복한 도사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당황했다.
종남파의 이대 제자들로 유진산의 기준에선 햇병아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음양쌍괴는 자신들이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을.
“알아서 내려올래, 아니면 노부가 떨어트려 줄까.”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섯 명의 도사가 지상으로 내려왔다. 숨는다는 것이 의미가 없는 상대들이기 때문이리라.
그들 중 가장 배분이 높은 도사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어왔다.
“음, 음양쌍괴가 여긴 무슨 일로 왔소?”
“볼일이 있어서 왔지, 소풍이라도 왔겠느냐. 앞에서 질척대지 말고 비키거라.”
젊은 도사들은 한눈에 봐도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순순히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 이곳부터는 외부인의 출입이 허락되지 않소. 무단으로 침입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오?”
그때 묵묵히 지켜보던 유설이 씩씩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돈 받으러 왔는데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해요?”
음괴의 눈빛을 마주친 이대 제자들은 흠칫하며 뒷걸음질 쳤다.
“도, 돈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우리 집값!”
도사들은 황당해하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직 이대 제자까진 내용이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조만간 쳐들어갈 것이라고 경고는 해줬으나, 그 시점이 즉시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
유진산은 손녀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턱짓으로 뒤로 물렸다.
그러고는 도사들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올라가서 우리가 왔다고 전하거라. 아니면 남아서 얘랑 싸우든가.”
주어진 방법은 두 가지였다.
침입자를 막아야 하는 본분을 포기하고 정상으로 도망치든가. 아니면, 음괴에게 맞서 싸우든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후자는 개죽음이라는 것이었다.
그냥 물러난다면 사문에서 징계를 받을 테지만, 의미 없이 죽는 것보단 백배는 나을 터.
“정, 정말 보내주는 것이오?”
“빨리 눈앞에서 사라지거라. 생각이 바뀌기 전에.”
자신들을 죽이지 않고, 순순히 보내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알, 알겠습니다.”
등을 돌린 도사들이 동시에 달아나기 시작했다.
죄가 없는 젊은 녀석들이었기에 그냥 보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진산은 그러한 결정을 곧 후회하고야 말았다.
잠시 후 먼 곳 어딘가에서 메아리가 들려왔다.
“야 이 잔악무도한 애늙은이 새끼들아! 우리가 무서워서 물러난 줄 아느냐!? 너넨 오늘이 제삿날이야!!!”
백팔십도 돌변한 도사들의 반응에 황당함을 금할 수 없었다.
설마 사문의 고수들을 믿고 까부는 것일까?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유진산은 순간 아차 싶었다.
‘그래, 이제야 기억났다. 그때 그놈이었구나.’
방금 도망친 도사들 중에서 한 놈은 과거에 자신을 도발했던 녀석이었다.
그때도 같은 수법으로 욕하고 도망친 전적이 있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쟤가 방금 우리한테 욕했어. 가서 잡아 올까?”
손녀도 그가 얄미운 모양이었다.
비록 도사들이 먼 곳까지 도망친 상황이지만, 유설이라면 도착하기 전에 따라잡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굳이 번거롭게 그럴 필요까지도 없었다.
“내버려 두거라. 곧 다시 만날 테니.”
유설이 큰 눈을 부릅뜨고 그들이 있는 방향을 향해 소리쳤다.
“너넨 올라가면 죽었어! 전부 두들겨 맞을 준비나 해!!!”
사자후가 아닌 육성으로만 뿜어낸 고함이었다.
그런데도 목청이 얼마나 큰지, 먼 곳까지 쩌렁쩌렁 메아리가 퍼져 나갔다.
기세에 눌렸기 때문일까? 이어지는 도발은 없었다.
유진산이 손녀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조무래기들한테 흥분할 필요 없다. 아직 우리에 대해서 잘 모르는 놈들이니까.”
유설은 아직 분이 풀리지 않는지 숨소리가 거칠었다.
“빨리 올라가자. 왜 이렇게 천천히 걸어?”
“일부러 시간을 주는 게다. 충분히 대비할 수 있도록.”
“으잉? 어째서?”
“그래야 한 번에 처리할 수 있잖느냐. 귀찮게 일일이 찾아다닐래?”
이제야 유설도 수긍한다는 듯 감탄하며 말했다.
“그럼 우리가 올라가면 전부 모여 있겠지? 역시 할배는 천재야.”
“지혜로운 사람은 두 수 앞을 내다봐야 한다. 무식하게 힘으로만 해결하면 몸이 고생하는 게지.”
사실 유진산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단순히 종남파를 손봐주려는 것만이 아니었다.
압도적인 힘으로 그들을 눌러줘야 한다.
구파일방에서도 말석인 종남파를 손쉽게 굴복시킬 수가 없다면, 지존행은 물 건너간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으니까.
한참을 걷다 보니 관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비하고 있는 도사들은 없었다.
망을 보던 한 녀석만 힐끔 쳐다보다가 도망쳤을 뿐이었다.
“창을 가져오너라.”
뒤에서 짐꾼 노릇을 하던 극살오의 중 한 명이 두 자루의 창을 가지고 달려왔다.
“여기 있습니다, 어르신.”
유진산이 손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음괴에게 건네주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유설은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나는 괜찮아.”
“맨손으로 하려고? 뭐,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맨손으로 때리는 것이 손맛이 좋기 때문일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유설은 어지간하면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선호했다.
아무래도 관계는 없었다. 아마도 종남파에는 손녀가 창을 써야 할 정도의 강자는 없을 테니까.
결국, 유진산만 용살창을 건네받았다.
“근데 정말 두 분만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극살오의도 함께 하고 싶다는 눈치였지만, 허락할 수는 없었다. 오직 음양쌍괴의 이름으로 진행해야 하는 거사였다.
“너희들까지 나설 필요는 없으니까, 숨어서 구경하든 맘대로 하거라.”
관문을 통과하자 정상의 절경이 펼쳐져 있었다.
중심부에는 거대한 분지가 자리했으며, 십수 개의 봉우리가 둘러싸고 있었다.
예전에 잠입해 본 적이 있던 곳이기에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분지에 존재하는 대 연무장. 열기가 느껴지는 그곳이 집결한 장소인 듯했다.
“저곳이다. 거의 다 왔구나.”
“응, 오백 명쯤 모인 것 같아.”
유설은 이미 그들의 규모까지도 감지하고 있었다.
헌데 오백 명이라니. 아마도 싸울 수 있는 전력이 모두 모인 모양이었다.
그만큼 그들이 지금 사안을 위중하게 보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많기도 하구만. 그럼 이번에도 지혜를 한 번 써보자꾸나. 할애비가 시키는 대로만 움직여야 한다.”
이제는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조손은 한달음에 대 연무장이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눈앞으로 펼쳐진 광경은 예상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검을 움켜쥔 도사들이 미리 진법을 펼쳐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고작 두 명을 상대로 말이다.
역시나 시선을 끄는 전력은 앞 열이었다.
장로들은 물론, 이미 은퇴한 원로들까지 데려온 듯했다. 아주 작정한 모양이었다.
“음양쌍괴 네 이놈들!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것이냐?”
다른 도사들과는 달리 복장이 좀 더 유려한 노도사였다.
단정하게 기른 흰 수염과 노기가 가득한 얼굴. 거기에 중후한 내공까지 느껴졌다.
유진산은 그가 바로 종남파의 장문인인 현종임을 알아챘다.
결정적으로는 그의 검 손잡이에 매달려 있는 옥패 때문이었다. 종남파의 장문인을 상징하는 무령패였다.
“감히 우리 집에 불을 지펴놨으니, 대가를 치러야겠지?”
“그건 무림맹의 임무였을 뿐, 종남에서 내린 결정이 아니다.”
정확히는 혈기왕성한 무림맹의 맹원들이 모여 저지른 짓이었다.
어쨌거나 무림맹에 가서 따지라는 말이리라.
물론 지금은 그곳으로 쳐들어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유진산은 왼손의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와 두들겨 맞을 순서는 노부가 정한다.”
“오만한 놈들이구나. 너희 둘만으로 종남을 무너트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곧 알게 되겠지.”
유진산은 묵묵히 그들의 진법을 살펴보았다.
수백 명의 도사가 사슬처럼 단단하게 엮인 대검진(大劍陣)이었다.
어지간한 충격으로는 무너지지 않을 듯했다.
가장 큰 문제는 나이가 지긋한 원로고수들이었다.
현역의 장로들은 초절정을 넘긴 자가 많지 않았지만, 그들보다 윗대의 원로 중에선 화경으로 짐작되는 인물도 보일 정도였다.
손녀와 정면으로 충돌하여 싸운다면 엄청난 유혈사태가 벌어질 터.
- 아가. 깊숙이 파고들지 말고, 가장 앞 열에 있는 노인 중 한 명만 할애비 앞으로 잡아 오너라.
할아버지의 전음을 받은 유설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유진산은 느긋하게 기다렸다. 누가 손녀에게 간택을 받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잠시 후, 상대를 물색하던 유설이 누군가를 검지로 지목했다.
“종남이?”
장로 한 명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유진산의 기억에도 있는 인물이었다. 과거 자신을 때렸던 죄로 인해, 손녀에게 죽기 직전까지 맞았던 현호 장로였으니까.
“음괴…….”
과거의 안 좋았던 기억 때문일까. 그는 유설과 눈도 마주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후미로 도망칠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걷어찬 셈이었다.
찰나의 순간. 유설의 신형이 한 줄기 빛이 되어 전면으로 쏘아져 나갔다.
도사들의 검진을 향해 단신으로 뛰어든 것이다.
가히 벼락에 비교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일대제자들은 물론, 장로들조차 그 움직임을 놓쳤을 정도였다.
원로고수 몇이 움찔하며 무기를 움켜쥐었지만, 어림도 없었다.
유설의 신형은 이미 현호의 코앞에서 앉은 자세로 회전하고 있었다.
다리에 일격을 맞은 현호는 ‘꽈당’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그러나 유설의 목표는 그자가 아니었다. 그저 경유하던 길이었을 뿐.
모두의 시선이 현호에게 쏠린 사이.
유설이 방향을 틀어 전광석화처럼 내달렸다.
그 순간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토해져 나왔다.
“막아!”
놀랍게도 유설이 향하는 곳에는 장문인인 현종이 있었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원로 두 명이 앞을 가로막으며 검을 내질렀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인가. 사파의 제일 고수이자, 무림의 지존 자리를 넘보는 음괴였다.
지면을 박차고 떠오른 유설의 신형이 허공에서 사선으로 회전했다.
쐐에엑-! 파앙-!
두 자루의 검이 애꿎은 바람만을 가르고 지나갔다. 헛손질을 한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유설은 그들을 뒤로한 채 장문인의 지척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모두가 허를 찔렸다는 듯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애써 준비한 검진은 발동할 틈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이미 음괴와 현종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순순히 당해줄 종남파의 장문인이 아니었다.
“와라!”
그의 검날이 수십 개로 갈라지며 전면을 난자하기 시작했다.
종남파의 절기인 천하삼십육검(天下三十六劍)이었다.
원로들은 무기조차 없는 음괴가 그것을 쉽게 막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다. 밝은 섬광을 보기 전까지는.
번쩍-!
눈부신 빛무리가 순간적으로 시야를 가렸다. 검후의 기술로 유명한 섬전비영보였다.
그리고 섬광이 사라졌을 땐, 유설이 현종의 옆구리에 주먹을 쑤셔 박고 있었다.
활처럼 허리가 꺾인 현종은 비명을 토해냈다.
단 일격에 그의 두 다리가 풀려버렸다.
믿을 수 없게도 장문인이 한 방에 무력화가 된 것이다.
모두가 충격에 입을 떡 하니 벌린 그때.
유설이 현종의 옷깃을 낚아채고는 후미를 향해 바람처럼 내달렸다. 그곳은 바로 유진산이 대기하고 있던 위치였다.
“잡아 왔어, 할배!”
현종을 건네받은 유진산은 재빨리 그의 목에 용살창을 가져다 대었다.
“잘했다, 아가. 그럼 이제부터 제대로 한번 놀아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