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맞는 순서는 노부가 정한다 (2)
음괴의 무력 앞에 종남파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지고야 말았다.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장문인이 인질로 잡히다니. 문파의 역사상 초유의 사태였으며, 전례를 찾아볼 수가 없는 치욕이었다.
검을 움켜쥔 오백여 명의 도사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그때 백발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원로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아마도 종남파의 도사들 중 가장 배분이 높은 인물이리라.
“이 천하의 개망나니 놈들! 어서 놔주지 못하겠느냐!?”
유진산은 오히려 현종의 목에 댄 용살창에 더욱 힘을 주었다.
“개망나니라……. 다시 한번 말해보거라. 이 녀석의 목이 날아가는 걸 보고 싶다면.”
“네 이놈! 강호에도 도의라는 게 있거늘, 어찌 그런 흉악한 짓을 벌인단 말이냐?”
“어이가 없군. 너희가 하는 짓은 도의고, 내가 하는 짓은 불의인가?”
앞으로 나선 종남파의 원로는 참담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대체…… 도대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만약 금전을 요구한다면 바로 수락할 기세였다.
하지만 유진산이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종남파의 장문인인 현종이 거품을 물고 기절해 있었다. 음괴의 주먹 한 방에 인사불성이 된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도 무기를 놓치지 않은 것이 대단했다.
유진산이 보고 있는 것은 검의 손잡이에 장식으로 달린 옥패였다.
투박해 보였지만, 일반적인 장식물이 아니었다. 종남파의 신물로 문주의 권력을 의미하는 무령패였다.
서컥-!
용살창이 검의 장식물에 연결된 고리를 끊어내는 소리였다.
어느새 무령패는 유진산의 손에 움켜쥐어져 있었다.
그 모습에 종남파의 도사들이 노발대발하며 소리쳤다.
“이, 이놈! 감히 어디다 손을 대느냐!”
“네놈 따위가 만질 물건이 아니다!”
뭐라 떠들든 유진산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그는 곧이어 무령패를 자신의 품속으로 갈무리하며 태연히 말했다.
“지금부터 이 물건은 우리가 보관하겠다. 차후 너희들의 태도를 봐서 돌려줄지 생각해보지.”
종남파를 세운 초대 조사부터 이어져 내려온 신물이었다.
값을 매길 수가 없는 귀중한 물품이었다.
결코, 음양쌍괴가 살았던 조그마한 장원의 가치에 비교될 물건이 아니었다.
“미, 미친놈아!”
“지금 뭐라고 지껄인 거냐?”
“당장 내놓거라, 이놈!”
노도사들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림을 은퇴한 후 종남산의 어딘가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던 원로들이었다. 그들 중에선 오래전 장문인의 자리를 역임한 인물들도 존재한다.
문파에 닥쳐온 위기 때문에 은거를 깨고 집결했지만, 이런 충격적인 상황을 맞이할 줄 어찌 알았겠는가.
그들에게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마치 꿈만 같았다.
“돌려받고 싶은가? 그럼 기회를 한 번 주마.”
말을 마친 유진산이 손녀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유설이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모두의 시선이 유진산의 입을 향해 고정되었다.
이어지는 그의 다음 말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만약 음괴와 싸워서 오 합(五合)을 버티는 자가 있다면, 지난 은원은 없던 것으로 해주겠다.”
무령패는 물론 장문인까지 풀어준다는 얘기이리라. 거기다가 앞으로는 종남파에 해코지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도 있었다.
오래전부터 음양쌍괴에게 시달렸던 종남파로서는 거절할 수가 없는 제안이었다.
혹여 말이 바뀔세라 문파의 최고 원로가 재빨리 수락했다.
“그렇게 하겠다.”
음괴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고작 오 합이라면 버텨볼 만하다는 판단이었다.
게다가 무기조차 소지하지 않은 맨손이지 않은가.
“바로 시작하지. 누구든 자유롭게 도전할 수 있으며, 규칙은 없는 것으로 한다.”
유진산이 이러한 방법을 택한 것은 도사들의 머릿수가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단지 불필요한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오백여 명이 펼치는 대검진과 정면에서 맞선다면, 최소한 삼 할 이상은 죽여야 끝이 날 터.
하지만 그건 유진산의 방식이 아니었다.
아무리 무림이라도 그가 적을 죽일 때는 정해진 기준이 있었다.
비록 괘씸한 놈들이긴 해도, 지은 죄가 그 정도로 무겁지는 않았다. 게다가 검후에게 받았던 부탁도 무시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후, 문파에서 배분이 가장 높은 노도사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누가 나서보겠는가.”
일대 제자들을 포함하여 항렬이 낮은 문도들은 뒤로 물러났다. 자신들은 일 초도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현역의 장로들 또한 섣불리 나서질 못했다. 문주가 일격에 당한 마당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과거 당해본 전력이 있던 장로들은 음괴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그렇다면 답은 정해져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백발의 원로들이 나설 수밖에.
“제가 나서보겠습니다, 종해 사형.”
“괜찮겠는가. 종운 사제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맡기는구만.”
“저는 이미 살 만큼 살았습니다. 문파의 명운이 달렸는데, 어찌 몸을 사릴 수 있겠습니까.”
도사들은 은퇴한 이후에도 산속에서 꾸준히 수련을 이어간다.
그러한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어 화경에 도달하는 자들이 간혹 존재한다.
종운도 그러한 자들 중 한 명이었다.
검을 움켜쥔 자세부터가 다른 도사들과는 달랐다.
오랜 세월 강호의 풍파를 이겨내고 살아남은 만큼, 그의 경험과 노련함의 깊이는 바다처럼 깊었다.
음괴와 마주 선 그는 천천히 검을 어깨 위로 잡아당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산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웬일인지 손녀의 표정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 아가, 왜 그러고 있어?
전음을 보냈음에도, 유설은 아무런 자세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유진산은 손녀의 답변을 들을 수가 있었다.
- 쭈그렁 할아버지는 때리기 싫단 말이야.
- 왜? 뭐가 문제야?
- 할배가 그랬잖아. 노인은 공경해야 한다며.
유진산은 기가 막힌다는 듯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 공경은 무슨 공경? 아직 팔팔한 녀석이니, 맘 놓고 공격하거라.
- 그럼 할배보다 어려?
- 당연하지. 너랑 저 녀석의 나이를 합쳐도 할애비가 더 많을 게다.
- 그럼 알았어.
갑자기 유설의 기세가 달라졌다. 이제야 어느 정도 싸울 마음이 생긴 모양이었다.
곧이어 앞으로 손가락 두 개를 펴서 그에게 내밀었다.
대결을 준비하던 종운은 어리둥절했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특별히 두 번을 양보해줄게요.”
유설의 노인 우대에는 나름대로 기준이 있었다.
최소한 백발의 외모에 뼈가 굳어 보일 정도는 되어야 한다.
과거 자신을 업어 키우던 할아버지의 옛 모습이 연상될 정도로.
“방금 그 말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음괴의 제안은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었지만, 종운도 거절할 처지가 아니었다. 문파의 자존심이 달렸는데 어찌 물불을 가릴 수 있겠는가.
오합의 기회 중 이합의 양보를 얻었으니, 고작 삼합만 버티면 되는 것이다.
“어서 날 후회하게 해줘요, 쭈그렁 할아버지.”
유설은 어깨너비로 양발을 벌린 채 양손을 천천히 휘저었다.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부드러운 움직임은 작은 동작에도 무수한 변화를 내포하고 있었다.
가문의 절기인 유가건곤장의 기수식이었지만, 어딘가 낯선 부분이 있었다.
손녀의 동작을 지켜보던 유진산은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건곤장의 근본에 변화를 주었단 말인가? 하늘과 땅의 이치가 하나로 묶여 끝없는 흐름을 이루고 있다니……. 절대로 부러지지 않을 유연함이로다. 훌륭하구나!’
가문의 무공을 한층 더 발전시키다니. 지켜보던 유진산은 가주로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차후에 손녀한테 배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드디어 종운의 선공이 시작되었다.
마치 급류처럼 미끄러지며 다가오는 그의 경공술은 과연 일품이었다.
그의 검은 접근하기도 전에 유설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검이 일 장 길이까지 쭉 늘어나는 듯했다.
식견이 깊은 유진산은 그것의 정체를 한 눈에 알아봤다.
‘천장무형검법(天長無形劍法)?’
상대를 현혹시키고, 빠른 쾌검으로 일격에 격살하는 종남파의 상승검법이었다.
손녀의 이마로 한 줄기 빛살이 무섭게 뻗쳐나가고 있었다.
유설은 고작 몸을 비틀며 반보를 움직이는 것만으로 피해냈다.
동시에 입에서는 의미심장한 외침이 뿜어져 나왔다.
“일(一)!”
아마도 일 합이 지났다는 얘기이리라.
종운은 마치 농락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번엔 어림없다!’
그의 검 날에서 서늘한 강기가 빛을 발하며, 무수히 많은 허상을 만들어냈다.
천장무형검법의 연계 초식으로, 수많은 허초 속에 실초를 숨긴 필살의 기술이었다. 무서운 점은 허초와 실초를 구분할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어느 곳에도 피할 방위는 없어 보였다. 막거나 반격을 가해야 한다. 물론 지켜보는 유진산의 기준에서였다.
돌연 유설의 발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보법을 밟았다. 동시에 수십 개의 분신을 만들어내며, 허상을 모조리 피해내기 시작했다.
파파파팟-! 파팡-!!
종운의 검날이 강풍을 만들어내며 유설의 머릿결을 휘날렸다.
그러나 옷깃조차도 스칠 수가 없었다.
“이(二)!”
종운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약속했던 두 합의 양보가 끝났음을 알려왔기 때문이다.
유설이 선호하는 전투방식은 순발력으로 거리를 좁혀 무차별적인 공세를 퍼붓는 것이다.
검을 회수하려던 종운은 화들짝 놀라고야 말았다.
어느새 안으로 파고 들어온 유설이 검을 쥔 그의 오른쪽 손목을 틀어쥐었다. 그것도 손가락으로 말이다.
종운은 힘을 주어 떨쳐내려 했지만,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어, 어떻게 이런 힘이.’
놀라움도 잠시. 그는 사력을 다해 복부에 호신강기를 둘렀다. 음괴의 손바닥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운의 아랫배에서 충격파가 일어나며, 거센 바람이 일었다.
호흡이 막히고, 전신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더군다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허리가 접혀버렸다.
코앞에 있던 음괴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진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빠름이었다.
그는 곧이어 등에서 엄청난 충격을 느꼈다.
그 짧은 순간에 자신의 등 위로 이동해서 일격을 날리다니. 그야말로 상식을 벗어난 움직임이었다.
철퍼덕 넘어진 종운은 더는 저항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제야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음을.
‘……도대체 어디서 이런 고수가 튀어나왔단 말인가.’
압도적인 강함. 그리고 차원이 다른 무력 앞에 종운은 만감이 교차했다.
마치 자신을 놀리듯 음괴가 숫자를 외치고 있음에도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삼(三), 사(四)!”
종남파에서 내세운 원로고수가 단 두 방에 쓰러진 것이다.
지켜보던 모두는 충격을 금할 수가 없었다.
당사자인 종운은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죽여라.”
아직 마지막 한 방이 남아있었다.
이미 유설은 쓰러진 종운의 머리맡에서 주먹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도사들은 음괴가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는 것이라 오해했다.
“태, 태사숙…….”
“안, 안 돼…….”
절규가 이어지는 가운데 유설이 고개를 쓱 돌려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어찌할지 묻는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