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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224화 (224/238)

224화 지금 내 기분이 그래 (1)

목적지는 사천성.

섬서의 남부에서 장강의 지류인 한수를 건너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수상비를 펼쳐서 건너도 되었지만, 배를 타고 이동하는 것을 택했다. 며칠이라도 여유를 만끽하기 위함이었다.

유진산은 홀로 선미에서 강물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고된 여정이 되겠지. 하지만 끝나고 나면 많은 것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의미하는 바가 많았다. 손녀를 무림지존으로 만드는 이 위대한 여정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만 있다면, 유가장이 천하제일 가문이 되는 셈이었다.

가주인 유진산으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영광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상상 이상으로 멀고도 험난한 길일 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둬야만 했다.

그렇게 한참 생각에 잠겨있을 때쯤이었다.

뒤를 돌아보자 유설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잠시 바람 좀 쐬고 있었다. 애들은?”

“아저씨들은 선실에 있어. 나랑 안 놀아 준대.”

극살오의는 유설과 친하게 지내면서도, 어느 정도는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은연중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아기였을 때부터 알고 지냈던 패도문이나 흑야방의 지인들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음괴를 쉽게 볼 수가 없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게다. 늑대들이 호랑이와 친하게 지낼 수는 있어도, 친구는 되긴 어려운 법이니까.”

“으응? 어째서?”

“언젠가는 잡아먹힐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감정이 있기 때문이지. 그것이 바로 본능인 게다.”

“아니야. 나는 안 잡아먹을 거야. 아저씨들이랑 친구가 될 수 있다구.”

유진산이 옅은 미소로 나직이 손녀를 불렀다.

“응? 왜?”

“이제 우리 설이도 무림에서의 위치를 생각해야지. 배분에 걸맞게 남들 앞에서는 위엄을 갖춰야 한다.”

유설은 무림의 서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내 배분이 뭐야?”

“강자의 세계인 사파에서는 무공이 곧 배분이고, 서열이다. 그러니까 어지간한 문파의 장문인한테도 꿀릴 것이 없는 게지.”

“그럼 내가 사파에서 최고야?”

“암. 얘기하지 않았느냐. 할애비 다음으로 최고라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설이 갑자기 뒷짐을 졌다. 그러더니 두 눈에 힘을 주는 것이 아닌가.

“어때? 나, 위엄 있어 보여? 무서워?”

미간에 그려진 내 천(川), 그리고 오므린 입술은 잔뜩 화가 난 표정이었다.

손녀의 얼굴을 살펴보던 유진산은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트렸다.

“하핫! 꽤 그럴싸하구나. 다른 무림인들이 보면 벌벌 떨겠어.”

모처럼 할아버지가 크게 웃었기 때문일까? 유설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올랐다.

“히히. 할배도 한번 따라 해봐.”

체면상 그럴 수가 없었던 유진산은 한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됐다, 할애비는 가만히 있어도 위엄이 넘쳐서 괜찮아.”

“에이~ 누가 그렇게 거짓말을 했어? 소소 언니가 그러는데, 할배 귀엽대.”

그러고 보니 집에서 검후와 손녀가 속닥거리면서 희희낙락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었다.

무슨 대화를 나눴나 궁금했지만, 이런 얘기였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어허!? 이 녀석이 할애비를 놀려?”

유진산이 미간을 좁히며 화난 척을 해봤지만, 오히려 유설은 깔깔대고 웃었다.

“푸흐흐. 그것 봐, 하면 되잖아.”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강의 물살을 바라보았다.

“됐다. 그만하자꾸나.”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일까?

가만히 지켜보던 유설이 갑자기 할아버지의 어깨에 턱을 걸쳤다. 여전히 얼굴엔 숨길 수 없는 장난기가 드러나 있었다.

“할배, 내가 놀려서 화나쪄? 이제 안 그럴게.”

“아니다.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말이다.”

“뭔데? 나도 알려줘. 궁금해, 궁금해~”

손녀의 애교 서린 말투에 유진산의 노기는 금세 녹아버렸다. 여느 때처럼.

“앞서 싸웠던 종남파 말이다.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더구나.”

“응. 사람만 많고, 패도문보다 훨씬 약했어.”

“그래, 맞다. 하지만, 이번에 우리가 상대할 놈들은 만만치 않을 것 같구나.”

유진산의 우려에도 오히려 유설은 반기는 눈치였다.

강한 상대와 싸우면서 희열을 느끼는 이상한 취미가 있었으니까.

“정말? 재밌겠다~ 당문으로 가는 거지?”

“그래, 잘 알고 있구나. 사천에서는 위세가 아주 대단한 가문이지.”

사천당문은 당가타(唐家陀)라는 집성촌에 모여 사는 혈족이며, 독술과 암기술만큼은 강호에서 따라올 세력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디 그뿐인가. 정파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잔혹한 수법과 집요함까지 갖추었다.

그런 무서운 곳을 향해 단둘이서 쳐들어가는 것이다. 무림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걱정돼?”

“네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그런 건 아니고, 이번엔 할애비가 한번 싸워볼까 한다.”

그 순간 미소를 띠고 있던 유설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마치 날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다 내가 싸우게 해준다며.”

“굳이 개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는 없잖느냐. 앞으로 어떤 강자와 맞닥트릴지 모르니, 가능하면 우리의 저력을 숨기면서 나아가는 게 좋겠구나.”

“그럼 나는 뭐해?”

“그냥 할애비 뒤에만 서 있거라. 호위무사처럼.”

유설은 대답이 없었다.

얼굴을 바라보자 입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더 삐지기 전에 토라진 마음을 풀어줘야 할 터.

“아직 결정한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계획일 뿐, 놈들이 일대일로 싸워준다는 보장도 없고 말이야. 그리고 우리 예상보다 더욱 강할 수도 있잖느냐.”

회유가 먹혀든 것일까? 경직되었던 손녀의 표정이 조금씩 풀어지는 듯했다.

“그럼 내가 싸워야 할 수도 있다는 거네?”

“그렇지. 할애비 말은 상황을 봐가면서 결정하자는 게다. 누가 싸워서 이기든 우리 음양쌍괴가 무림에서 최고가 되기만 하면 되니까.”

“……강했으면 좋겠다.”

적이 강하기를 바라다니. 손녀의 표정을 보니 진심이 묻어나 있었다.

유진산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을 때였다. 누각이 있는 방향에서 천우환이 다가오며 소리쳤다.

“어르신, 선실에서 식사가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선상 위에서의 마지막 식사였다.

유설이 코를 킁킁거리더니 할아버지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빨리 가자, 할배. 생선구이랑 가지볶음인가 봐!”

정말이지 냄새 하나는 귀신같이 맡는 손녀였다.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이 준비되어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유진산도 흐뭇한 미소로 이끌려갔다.

“그래, 어서 가자꾸나.”

일행이 탄 선박은 해가 지기 전에 선착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은 북적이는 사람들을 피해 한적한 공터로 이동했다. 작별을 고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서부턴 서로 갈 길을 가면 되겠군.”

천우환을 필두로 다섯 명의 극살오의가 동시에 양손을 모았다.

“그동안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유진산이 옅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들도 고생 많았네. 어디로 갈 생각인가?”

“덕양산 인근의 천호산장으로 갈 것입니다. 저희 사부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머물던 곳입니다.”

“그렇군. 어디든 무림맹의 추적이 잦아들 때까지 은신하고 있는 게 좋겠지. 살펴들 가게나.”

“예, 어르신. 다시 뵐 때까지 무탈하십시오.”

유설도 방긋 웃으며 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잘 가요, 아저씨들!”

다섯 명의 사파인들은 아쉬움을 달래듯, 유설을 향해 힘차게 마지막 인사를 고했다.

“살펴 가십시오, 음괴 대협!”

“꼭 천하제일 지존이 되십시오!”

“무운을 빌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두 무리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멀어져 갔다.

헤어진 이후에도 유설은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았다.

그리고 손녀의 마음을 모를 유진산이 아니었다. 유난히 정이 많은 아이였으니까.

“이렇게 헤어져서 아쉬운 모양이로구나.”

“……응. 근데 어쩔 수가 없잖아. 계속 데리고 다니기엔 너무 위험해.”

유진산은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손녀를 한 번 쓱 바라보았다.

이렇게나 생각이 깊어졌다니.

“너무 아쉬워하지 말거라.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니까.”

“그래도 가끔 생각날 것 같아. 이제 다신 못 보겠지?”

“아무리 강호가 넓다고 한들, 인연이 있다면 또 보게 될 게다.”

“응. 근데 할배. 당문은 어디에 있어?”

대략적인 위치는 확인해둔 상태였다. 이곳에서 경공으로 두 시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성도의 외곽에 있다. 당가타라는 집성촌이라더구나.”

“지금 바로 가는 거야?”

“음. 도착할 때면 다들 잘 시간인데, 그래도 손님으로서 예의가 아니지.”

“히히. 우린 나쁜 손님들이잖아.”

유진산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나쁜 손님이라니? 우린 지금 집에 불을 지른 놈들한테 따지러 가는 게다.”

“그럼 당문에서 돈도 받아야 해.”

“그게 무슨 소리야?”

유설이 비어있는 자신의 전낭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우리 이제 거지잖아. 할배도 돈 없는 거 알아.”

반박할 수가 없었다. 평소에도 자신의 주머니 사정을 꿰차고 있던 손녀였으니까.

남은 돈이라고는 고작 엽전 몇 개뿐. 국수 한 그릇 사 먹으면 사라질 돈이었다.

재물욕이라고는 전혀 없는 유진산이었기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극살오의한테 좀 빌려둘 것을.

다시 그들에게 달려가서 체면을 구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유진산이 이내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정한 무인(武人)은 돈을 돌처럼 보듯 해야 하는 법이다. 돈의 노예가 되는 순간부터는 무인이 아니라 왈패가 되는 게지.”

“으음, 그래? 그럼 오늘 우리 어디서 자?”

잠시 뜸을 들이던 유진산이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걱정할 것 없다. 할애비한테 다 생각이 있어.”

목적지인 당가타에서 삼십여 리가 떨어진 인근 야산.

잘려나간 나무들의 틈새로 인공적인 분지가 만들어져 있었다.

“어때? 할애비 솜씨가 맘에 들어?”

유설은 할아버지가 급조해서 만들어준 간이 침상 위에 누워있었다.

나무줄기를 그물처럼 엮어서 만든 구조물에 원숭이처럼 걸려 있는 모습이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돈이 없어서 여기로 온 게 아니다. 거리도 가깝고, 마을을 정찰할 수도 있으니 얼마나 좋아?”

“그래도 이건 좀 불편하다구.”

유진산은 손녀가 누운 간이 침상을 그네처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사실은 이런 기능도 있단다. 재밌지?”

유설이 기가 찬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나 내일 당문 가면 집값 받아올 거야. 나 말리지 마, 할배.”

“흠흠. 그런 건 할애비가 알아서 하는 게다. 너는 시키는 대로만 해.”

유설은 대답하지 않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래도 이 정도로 얘기해놨으니, 잘 알아들었을 터.

“잠시 쉬고 있거라. 주변 좀 살펴보고 올 테니.”

유진산은 손녀를 홀로 놔둔 채 좀 더 깊은 곳으로 이동했다.

적당한 공터를 찾고 나서야 그의 걸음이 멈추었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자 보름달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 때가 무르익었으니, 한번 시험해봐야겠구나.’

그는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켜고는 왼쪽 소매를 걷어 올렸다.

왼손에 봉인된 사악한 기운. 그것을 역근경의 힘으로 다스릴 수 있는지 시험해 보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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