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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225화 (225/238)

225화 지금 내 기분이 그래 (2)

손목의 염주를 벗겨내자 손등의 핏줄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렸으며, 솟아나는 힘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왼손이 쉼 없이 떨리고 있었다. 예전에는 없던 반응이었다.

게다가 손끝으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검은 기운이 심상치가 않았다.

‘가만히 있거라, 이놈아!’

왼손에 봉인된 그 사악한 놈이 마치 목줄 풀린 개처럼 날뛰고 있었다.

곧이어 몸속 어딘가에서 기분 나쁜 감정이 꿈틀거렸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은 어두운 욕망. 그리고 원인을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뭔 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

유진산은 호흡을 크게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진정하자. 제압할 수 있다, 진산아!’

마음을 다잡은 그가 드디어 역근경의 구결을 외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신으로 은은한 황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오며 주변을 밝혔다.

역근경은 달마가 남긴 소림 최고의 절학으로 불가의 기운에 근본을 두고 있다.

신묘하고 따듯한 부처의 기운이 발현되자, 그 즉시 정신이 맑아졌다.

게다가 기의 흐름이 원활해지고, 신체의 감각이 작은 반응조차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예민해졌다.

유진산은 곧이어 역근경의 기운을 왼손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손아귀에서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다.

마치 피부가 녹아내리고, 손가락의 뼈마디가 분쇄되는 것만 같았다. 역근경의 기운과 왼손의 사악한 기운이 서로 뒤엉켜 힘을 겨루고 있기 때문이리라.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고통스러웠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입에서는 신음이 흘러나오고, 이마의 핏줄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갑자기 입에서 검붉은 피가 토해져 나왔다.

“쿨럭!”

죽은 피라고 일컬어지는 어혈(瘀血)이었다.

오히려 어혈을 뱉고 나니, 정신이 더욱 또렷해졌다. 게다가 점차 원활해지는 기의 흐름까지.

아직 완벽하진 않았지만, 역근경이 왼손의 사악한 힘을 제어하는 효과는 확실했다.

유진산은 지금 상태로 침착함을 유지하며 최대한 버텨 보려고 노력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염주를 풀고서도 이렇게 맑은 정신으로 오래 유지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기쁜 마음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바스락-!

뒤를 돌아보자 멧돼지 한 마리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겁에 질렸는지 부들부들 떨면서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마침 잘되었구나. 내일 아침에 우리 아가한테 뭘 먹일지 고민했는데.’

평소 불필요한 살생은 피하는 유진산이었지만, 먹기 위한 목적이라면 망설이지 않는다. 그것은 곧 자연의 섭리였으니까.

그리고 왼손의 위력도 한번 시험해 보고 싶었던 터였다.

눈 깜짝할 사이 유진산은 이미 멧돼지의 코앞에서 왼손을 휘두르고 있었다.

고통 없이 일격에 죽이려는 듯, 정확히 정수리를 가격했다.

뼈가 분쇄되는 소리가 산속 깊은 곳까지 메아리쳤다.

예상보다 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일까? 유진산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한참 곤히 자고 있을 손녀의 잠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애초부터 의미가 없는 우려나 마찬가지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지척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구워주려고 잡은 거야?”

진원지는 불과 우측으로 오 장 부근의 나뭇가지 위였다.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거늘.

유진산은 다급히 왼손에 염주를 채우며 물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방금 왔어. 배고파서 잠이 안 와.”

“그래도 빨리 자야지. 내일 아침에 노릇하게 구워주마.”

손녀가 배를 쓰다듬으며 다가왔다.

할아버지가 잡은 멧돼지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몇 걸음을 움직일 찰나.

돌연 유설이 흠칫하며 눈을 부릅떴다.

“으잉? 저거 왜 저래?”

이제야 멧돼지의 사체를 확인한 유진산도 적잖게 놀랐다.

빛 한점 들지 않는 어두운 밤인데도 똑똑히 보였다.

분명히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머리부터 시작하여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유진산은 자신의 왼손을 슬쩍 바라보았다.

‘이 사악한 놈의 기운 때문인가?’

그야말로 마교에서나 쓸법한 지독한 마공이 따로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지 않았던가.

예전에 일장을 교환한 유설의 손바닥이 검게 그을린 적이 있었다.

당시엔 불문사자신공의 기운이 밀어냈는지 금세 괜찮아졌지만, 이번엔 양상이 달랐다.

갈색의 멧돼지가 어느새 말라 비틀어진 흑돼지로 변해 있었다.

“아무래도 이 녀석은 못 먹겠구나.”

“그럼 우리 내일 아침에 뭐 먹어? 나 배고프면 못 싸워.”

다른 것은 몰라도 먹는 것에 가장 예민한 손녀였다.

멀쩡한 양식을 이렇게 만들어놨으니, 심술이 날 수밖에.

“다른 놈으로 잡아줄까?”

“돼지는 먹기 싫어……. 저것 봐.”

흉측하게 변한 멧돼지의 몰골을 보니, 입맛이 뚝 떨어지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다고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음. 그럼 내일 아침은 마을에 가서 사 먹자꾸나.”

“시장에서? 우리 돈 없잖아.”

“걱정하지 말거라. 할애비한테 남은 게 좀 있어.”

“음. 정말?”

손녀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왔다.

유진산은 속이 뜨끔했지만, 당당히 말했다.

“그럼! 걱정하지 말거라. 할애비가 언제 우리 설이 밥 굶긴 적 있어?”

“……아니, 없지.”

“그렇지? 자, 그럼 어서 보금자리로 가서 쉬자꾸나. 내일은 바쁠 테니, 푹 쉬어야 해.”

조손은 경공으로 산길을 타고 목적지를 향해 이동했다.

어젯밤에 근방에서 야영했기에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각도 지나지 않아 마을 하나가 시야에 잡혔다.

거치적거리는 봇짐은 인근에 숨긴 후, 천으로 동여맨 쌍룡창만 들고 이동했다.

잠시 후 마을 입구 부근에서 조손의 경공이 멈추었다.

“바로 이 마을이 당씨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빨리 가자, 돈 받으러.”

조손의 목적은 서로 달랐다.

당문의 제일고수를 잡아야 한다는 유진산과 달리, 유설은 집값에 대한 보상을 받아내고 싶어 했다.

“아가. 그렇게 얘기하니까 우리가 꼭 고리대금업자 같잖으냐.”

“받을 건 받아야지. 종남이한테도 달라고 말했어야 했어.”

유설은 종남파에서 그냥 나온 것을 후회한다는 눈치였다.

유진산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런 손녀를 나무랐다.

“할애비가 재물에 대해서는 욕심을 버리라고 가르치지 않았느냐? 무인의 품격은 어디로 갔어?”

유설이 주먹 하나를 쓱 올려 보이며 중얼거렸다.

“이게 바로 내 품격이야. 나는 품격으로만 얘기해.”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런 말은 또 누구한테 배웠단 말인가. 그야말로 왈패들이나 할 법한 소리였다.

“어휴. 아무튼, 일을 그르칠 수 있으니, 허락 없이는 함부로 나서면 안 된다. 알겠느냐.”

“왜 대답 안 해?”

“……알았어.”

마지못해 대답하는 손녀였다.

이제야 안심한 유진산은 검지로 마을의 한 거리를 가리켰다.

“저곳에 노점상들이 몰려 있구나. 일단 요기부터 하고 가자꾸나.”

다소 분위기가 차분하고 조용한 것을 제외하면 여느 마을과 다르지 않았다.

듬성듬성 보이는 마을 주민들의 모습은 모두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이 한가지 있었다.

“할배, 여기 사람들은 전부 무공을 익히나 봐?”

“그렇다더구나. 사실 여긴 외부인은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이지.”

노점상의 주인들부터 길가에서 쉬고 있는 노인까지.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은 기(氣)의 흐름이 느껴지고 있었다.

평온함 속에 숨겨져 흐르는 살벌함.

어지간한 외부인은 겁에 질려 들어오지도 못할 곳이었다.

하지만 음양쌍괴의 얼굴엔 조금의 긴장감도 없었다.

“저기가 좋겠구나.”

유진산이 지목한 곳은 국수를 파는 작은 노점이었다.

놓여 있는 탁상은 고작 네 개뿐.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국수야? 나, 고기 먹고 싶은데.”

“싸우기 전엔 뱃속을 가볍게 해야 한다. 몸이 둔해지기 때문이지.”

“그럼 끝나고 사줄 거야?”

유진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녀와 함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 후 푸근한 인상의 중년 남성이 다가와 물었다.

“너희들끼리 왔니? 국수 두 그릇 말아줄까?”

유진산은 노점수레에 적힌 가격표를 살펴보았다.

현재 그가 가진 돈으로는 한 그릇밖에는 주문할 수가 없었다.

“한 그릇만 주십시오.”

주인은 이상한 눈빛으로 조손을 살펴보더니 이내 등을 돌렸다.

“그래, 잠시만 기다리거라.”

유진산은 느긋이 앉아 주인장이 국수를 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섬세해야 할 요리사의 손에는 굳은살이 진득했다.

그리고 그의 경장 속에 은은히 비치는 근육까지.

한눈에 봐도 외공을 수련한 무림인의 모습이었다.

잠시 후 그가 국수를 들고 와서 앞에 내려놓았다.

탁-!

“자. 맛있게 먹어라, 애들아.”

유진산은 젓가락 두 개를 그릇 위에 올리고는 손녀의 앞으로 밀어 넣었다.

“나 혼자 먹으라고?”

“응. 입맛이 없어서 그래.”

유설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젓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가 고팠는지 무척이나 맛있게 먹고 있었다.

유진산은 그런 손녀의 모습만 봐도 배가 불러왔다.

잠시 후 국수가 절반쯤 남았을 때였다.

“정말 맛있어. 자, 할배도 먹어봐.”

유설이 그릇을 할아버지의 앞으로 쭉 밀어 넣고는 젓가락을 내밀었다.

“나는 별로 생각이 없대도.”

“거짓말하지 마. 돈 없어서 하나만 시킨 거지?”

그야말로 눈치가 귀신이었다.

그러나 어찌 사실대로 말할 수 있겠는가.

유진산은 다시 그릇을 손녀의 앞으로 쭉 밀며 말했다.

“정말 입맛이 없어서 그래.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먹거라.”

잠시 고민하던 유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국물만 조금 더 먹고 넘겨줄게. 알았지?”

“그냥 다 먹어도 된다니까.”

“아니야, 일단 기다려봐. 남겨줄 테니깐.”

이어서 유설이 양손으로 그릇을 들고 육수를 마시려는 그때였다.

돌연 등 뒤에서 곱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거지새끼들. 우리 마을엔 어떻게 들어왔어?”

뒤를 돌아보자 다섯 명의 아이들이 포위하듯 다가오고 있었다.

열서너 살쯤 되어 보였으며, 나이에 맞지 않게 무공 수준이 상당해 보였다.

그리고 앞에 있는 녀석이 대장인 듯했다. 복장부터가 달랐으니까.

회색 경장의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대나무가 수놓아진 청의(靑衣)를 입은 모습이었다.

국수 그릇을 움켜쥔 유설이 녀석과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방금 우리한테 말한 거 아니지? 아니어야 할 텐데?”

청의를 입은 아이가 거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한테 한 소리 맞아. 당가타에 거지새끼들은 없거든.”

분위기가 험악해지려 하자, 육수를 끓이던 노점상의 주인이 달려왔다.

그러나 그의 반응이 이상했다. 오히려 양손을 모으고 아이에게 굽신거리는 것이 아닌가.

“여기가 어딘지 모르고 잘못 온 애들인가 봅니다. 제가 잘 타일러서 보내겠습니다, 소공자님.”

그 순간 소공자라 불린 아이가 다짜고짜 중년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슬쩍 때린 것처럼 보였으나, 그는 다리가 꺾이며 철퍼덕 넘어지고야 말았다.

내공의 차이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리라.

신음이 나올 법도 하거늘, 그는 뭐가 두려운지 꾹 참고 있었다.

“주제를 알고 나서야지.”

“……죄, 죄송합니다.”

그야말로 이해 못 할 상황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때 소공자라 불린 녀석이 등 뒤의 아이들에게 명령했다.

“빨리 잡아서 끌고 와. 당가타에 함부로 들어오는 놈들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줄 테니.”

아이들이 다가오자 유설의 주먹이 천천히 움켜쥐어졌다.

그것을 눈치챈 유진산이 손녀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눈짓을 보냈다.

어디 한번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한 이유도 있었다.

곧이어 아이 한 명이 유진산의 뒷덜미를 움켜쥐며 협박했다.

“처맞기 싫으면 얌전히 따라와라.”

천으로 감싼 쌍룡창도 빼앗기고야 말았다.

내용물이 드러나자 아이들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소곤댔다.

“이건 뭐야? 거지들이 창도 가지고 다니네?”

“외부인인 주제에 무기까지 들고 당가타에 들어왔다고?”

“뭐 하는 놈들인지 우리가 심문 좀 해줘야겠는데?”

그야말로 막무가내였다.

주변에 구경꾼들이 몰려들었지만, 아무도 아이들을 말리지 못했다. 멀리서만 지켜볼 뿐.

유진산도 이런 분위기의 집성촌은 처음 봤기에 적응이 되질 않았다.

우측을 바라보자, 두 명이 손녀의 양쪽에서 팔을 낚아채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로 끌고 가려는 것일까.

그때 유설이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뒤를 돌아보며 애원했다.

“갈 때 가더라도, 국수는 마저 먹고 가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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