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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230화 (230/238)

230화 무인의 자존심 (2)

짙은 긴장감 속에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그렇게 잠시 당소천을 노려보던 유설은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릇에 남은 소면을 마저 먹기 위해서였다.

무시무시한 고수를 눈앞에 두고도, 먹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다니. 그야말로 범접할 수 없는 대범함이 아닐 수가 없었다.

당소천은 어이가 없는지 두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그를 향해 유진산이 나직이 말했다.

“아직 식사가 다 끝나지 않았으니, 조금 기다려주지 않겠나.”

예상외로 양괴가 점잖게 얘기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음괴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인지 당소천은 흥분이 누그러든 듯했다.

그는 묵묵히 서서 기다렸다. 음괴가 식사를 마치기를.

그리고 유진산도 손녀가 소면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잘 판단했다. 그래도 눈치는 있는 녀석이구나.’

유진산은 그릇이 깨지기 전에 식사를 마친 상태였지만, 유설은 한창 맛있게 먹던 상황이었다.

먹는 것만큼은 누구보다 예민한 손녀가 아니었던가.

적정선에서 도발을 멈춘 당소천의 선견지명에 유진산은 내심 감탄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비참한 말로가 뒤따를 것이 자명했으니까.

“잠깐만. 거의 다 먹었어.”

유설이 소면 그릇을 들어 올렸다.

국물과 함께 건더기까지 남기지 않고 다 먹으려 하다니. 아무래도 입맛에 맞는 모양이었다.

“괜찮으니 천천히 먹거라.”

모두의 시선이 음괴를 향해 집중되어 있었다.

당문의 원로들은 물론 몰려드는 시장의 구경꾼들까지.

한눈에 봐도 그들의 사기가 흔들리고 있었다. 음괴가 태연히 소면을 먹는데도 당소천이 보고만 있으니 그럴 수밖에.

그때 조손을 미행해왔던 노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즉시 시장을 폐쇄할 테니, 모두 귀가하거라!”

그의 한마디에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나의 문파처럼 움직이는 집성촌이라 그런지 그 누구도 거역하는 자가 없었다.

유진산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상황이었다.

‘결투의 결과를 공유하지 않겠다는 것이로군.’

당소천은 당문의 무인들이 의지하는 지주나 마찬가지였다.

만에 하나 그가 모두의 앞에서 무너진다면? 당문은 분명 뿌리째로 흔들리고 말 것이다.

그것을 조금이나마 방지하기 위함이리라.

주변은 삽시간에 썰렁해졌다.

남아 있는 자들은 음양쌍괴와 당소천. 그리고 당문의 원로 몇 명이 전부였다.

유설이 소면 그릇을 내려놓는 소리였다.

얼굴엔 만족스럽다는 표정이 남아 있었다.

“맛있었어.”

“그래. 배불리 먹었으니, 이제 소화도 시켜야지.”

드디어 음양쌍괴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들과 마주한 당소천은 둘을 번갈아 보며 탐색했다.

자신만만했던 아까의 모습과는 달리 신중한 모습이었다.

“둘 중 누가 나와 승부를 볼 것이오?”

그 또한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음괴와 싸우게 되리란 것을.

다만 확실히 해두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그의 오만했던 말투도 한층 겸손해져 있었다. 음양쌍괴를 인정한 것이리라.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도 고운 법.

“내가 싸울 거에요.”

배가 불러서 기분이 좋아진 유설은 아까보다 얼굴이 밝았다.

그때 유진산이 쐐기를 박아 당소천을 안심시켜주었다.

“걱정할 것 없네. 나는 절대로 끼어들지 않을 테니.”

유진산의 기준에서 자식 교육을 잘못시킨 가주보다는 당소천이 더 존중받을 자격이 있었다.

승부만 내면 그뿐, 굳이 그와 감정적으로까지 대립할 필요는 없었다.

“그 말 반드시 지키시오.”

시장의 한복판.

고요해진 거리에서 두 명의 고수가 마주 섰다.

폭풍처럼 등장한 신예로서 단숨에 무림십대고수의 반열에 오른 음괴. 그리고 또 한 명은 당문의 역대 제일고수로 사천성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었다.

구경꾼이 몇 명 없었지만, 그야말로 무림을 떠들썩하게 만들 대결이었다.

“일 합에 내 모든 것을 걸 것이오.”

장기전으로 가지 않고, 단 한 번의 격돌로 승부를 내겠다는 얘기였다.

그가 이렇게 선포한 것은 의아한 일이 아니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암기를 단 한 번에 쏟아내는 전무후무한 필살의 암기술. 당문 최고의 무공인 만천화우(滿天花雨)를 펼치려는 것일 터.

- 조심하거라, 아가. 그놈이 아주 위험한 무공을 펼칠 테니, 방심하면 안 돼.

- 으응. 내가 알아서 할게.

더는 얘기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유설은 상대방과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즐기는 타고난 싸움꾼이었다.

모든 것을 다 얘기해주면 흥미가 식을 수밖에.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천화우가 어떤 무공인가. 무림인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전설적인 무공이었다.

유진산은 강제로라도 알려주려고 했다.

- 할애비 말을 들어. 아무튼, 이번 초식은 만천화우라는 초식인데, 이건 모든 암기를…….

유진산은 전음을 보내다 말고 멈추었다.

아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설에게 향하는 전음이 중간에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 녀석이?’

손녀가 귀를 닫은 이상 방도가 없었다. 잘 막아내길 바랄 수밖에.

그는 노심초사하며 둘을 지켜보았다.

유설과 당소천의 거리는 육 장.

서로가 눈을 마주친 채 틈을 노리고 있었다.

보통 이러한 싸움에서는 얼마나 빨리 거리를 좁히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

하지만 유설은 다가갈 생각조차 없는 듯했다.

한 손으로 용화창을 슬쩍 내밀고는 뱀의 꼬리처럼 살랑살랑 흔들어댈 뿐이었다.

“먼저 던져요.”

암기술을 쓰는 상대에게 선공을 양보하겠다니? 그 말은 곧 제 자리에서 공격을 받아낸다는 의미였다. 그야말로 너무나도 불리한 조건이었다.

유진산은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고, 지켜보던 당문의 원로들은 환호했다.

그리고 당소천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지금껏 그 누구도 만천화우 앞에서 이토록 거만한 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음괴가 당문의 마지막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당소천의 주위로 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의 도포자락과 그것을 덮은 붉은 피풍의가 강풍에 휘날리듯 펄럭였다.

그러자 그의 옷 내부에 깨알같이 감춰진 암기들이 드러났다. 그 수가 족히 수천 개는 되어 보였다.

‘저 많은 암기를 한 번에 쏘아 보낸다고?’

긴장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손녀가 아무런 방어 동작조차 하지 않고 있기에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그래도 자기 나름대로 계획이 있을 터.

유진산은 손녀를 믿고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점차 기의 폭풍이 거세지며 당소천의 도포자락이 찢어질 듯 휘날렸다.

마치 칼날처럼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천천히 자세를 낮추며, 양손을 천천히 내리깔았다.

그리고 한 호흡이 더 지난 뒤.

갑자기 그의 손이 수십 개로 늘어났다. 분명 유진산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 모습은 흡사 마흔 개의 손을 가진 천수관음(千手觀音)이 현신한 것만 같았다.

곧이어 잔상을 그리는 수많은 손이 모든 암기를 동시다발적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팟-!!!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놀라운 광경에 모두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유진산의 불안함은 극에 달해갔다.

여전히 유설이 아무런 동작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한 손만 슬쩍 내밀고 있을 뿐.

하지만 그의 긴장은 단번에 풀어져 버렸다.

‘어창술(馭槍術)?’

유설의 코앞으로 날아오른 용화창이 허공에서 풍차처럼 회전하고 있었다.

그것도 빠르기를 가늠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십여 장까지 돌풍이 휘몰아칠 정도로.

곧이어 당소천이 쏘아 보낸 수많은 암기가 용화창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가주인 당소군이 사용했던 암기술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늘을 가득 메운 암기가 꽃비가 되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그 속에 내포된 살상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창과 무엇이든 막아내는 방패가 격돌하면 이러한 광경일까?

스스로 회전하는 용화창이 다가오는 암기를 모조리 쳐내고 있었다.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당문의 원로들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유진산조차도 실전에서 처음 보는 어창술의 위력에 전율했다.

‘대단하다, 우리 설이! 아주 장하다!’

유진산은 두 손을 움켜쥔 채 손녀를 응원했다.

수많은 암기가 용화창을 뚫기 위해 필사적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어창술이 만들어낸 장막을 돌파할 수가 없었다. 다가서는 족족 분쇄될 뿐.

콰콰쾅-! 콰콰쾅-!

소리의 강도는 점차 약해졌고, 암기의 숫자는 급격히 감소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언제 그러한 일이 있었냐는 듯 고요만이 감돌았다.

당사자들 간에는 아주 긴 시간이었지만,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후.”

당소천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모든 기력을 다 쓴 탓인지,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예상외로 그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어 후련하다는 듯이.

그리고 그를 향해 용화창이 허공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다가갔다. 그 모습이 마치 놀리는 듯 보였지만, 그 누구도 뭐라 할 수가 없었다.

당문의 원로들은 이미 무공의 최고경지라는 어창술 때문에 충격에 휩싸인 상태였다.

“어, 어창술이라니.”

“소천 형님…….”

유설이 조종하는 용화창은 마치 영혼이라도 깃든 듯 당소천의 주위를 천천히 배회했다.

그 모습이 마치 목을 칠 듯, 말듯. 그리고 언제 칠까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저항하지 않고 두 눈을 지그시 감아버렸다.

그것은 결투에서 패배했으니, 깔끔하게 죽겠다는 의사표현이었다.

당문의 원로들이 울부짖었다.

당소천을 살리고 싶겠지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의 목숨은 이미 음괴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모두의 감정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그 정도면 되었다.”

유진산의 한마디에 용화창이 유설의 손아귀로 단숨에 돌아왔다.

“아직 한 대도 안 때렸는데?”

“저자의 모습을 보니, 이미 수천 대를 맞은 것과 다름이 없구나.”

“그럼 그냥 간다구?”

“무인으로서 존중받을 자격이 있는 자다.”

그는 수치스럽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으며, 도망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렇게나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하다니.

유진산은 오랜만에 마주한 제대로 된 무림인의 모습에 기분이 좋았다.

어쨌거나 당소천은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자포자기한 모습이었다.

당문의 제일고수라는 칭호가 지닌 무게감.

그토록 무거운 짐을 짊어진 자가 결국 넘어진 것이다.

“……더 놀고 싶은데.”

“됐으니, 그만 가자꾸나.”

당문에 온 목적은 이미 달성한 셈이었다.

그들은 오늘의 사건을 쉬쉬하려 하겠지만, 스스로는 알고 있을 터였다. 당문이 음양쌍괴에게 무너졌다는 것을.

유진산은 손녀를 잡아끌고 마을의 입구를 향해 걸었다.

당문의 원로들은 그런 둘을 멀뚱멀뚱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창술을 목격한 이상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암룡대(暗龍隊)를 동원하는 것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마을 입구에 도착하자 유설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이번에도 아무도 안 죽었네.”

종남파에서도. 그리고 당문에서도.

유진산은 이번 출타에서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왜? 할애비가 물렁해진 것 같아서 걱정되느냐?”

“아니,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게다. 하지만 죽여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망설이지 않고 그리할 게다.”

소싯적부터 수없이 겪어봐서 잘 알고 있었다. 망설이는 순간 당하는 곳이 무림이었다.

그때 무심코 듣고 있던 손녀가 갑자기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아 맞다! 할배, 큰일 났어.”

“큰일이라니, 뭐가?”

유설이 울상을 지으며 소리쳤다.

“우리 집값 안 받고 나왔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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