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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232화 (232/238)

232화 상품이 뭐예요 (2)

상품을 두 개나 달라니.

약장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지금까지 이런 참여자는 처음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열 개를 달라고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상품을 받기 위해선 조건이 있었으니까.

“좋다! 아저씨가 신음을 내거나, 뒤로 한 걸음이라도 물러난다면 네게 두 개를 주마.”

“정말이죠. 이따가 다른 소리 하면 안 돼요.”

약장수가 목소리를 낮춰서 유설의 귓가에 속삭였다.

“대신 최선을 다해서 때려야 한다. 알았지?”

그래야만 관중들한테 약을 팔 수 있을 터였다.

어설프게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테니.

“알았어요.”

고개를 끄덕인 약장수가 무대 앞으로 양손을 들고 나아갔다.

“자 여러분! 지금부터 이 호비환의 위력을 제대로 보여드리겠습니다! 한 알만 먹어도 힘이 불끈불끈! 호랑이 기운을 지켜보십시오!”

말을 마친 그가 자신 있게 상의를 탈의했다.

다부진 근육질의 몸매가 드러나자 관중들이 환호했다.

“멋있다!”

“호비환 최고다! 나도 한 통 줘!”

열기가 무르익자 그가 자신의 배를 툭툭 두들기며 유설의 앞으로 다가갔다.

“자, 제가 지금부터 이 무시무시한 곤봉으로 다섯 대를 맞아보겠습니다!”

그의 복근에 새겨진 왕(王) 자 주름이 꿈틀꿈틀 좌우로 춤을 췄다.

피부에 껍질처럼 돋아난 굳은살로 보아 외문무공을 수련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마 어지간한 사람에게 맞으면 통증조차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어찌 알겠는가.

눈앞의 여자아이가 무림십대고수 중 일인이라는 것을. 그것도 무림지존의 자리를 넘보는 음괴였다.

“준비됐어요?”

“그래! 저 상자 안의 상품을 받아가고 싶으면, 있는 힘껏 때려보아라.”

유설은 귀찮다는 듯 움켜쥔 곤봉을 어깨 뒤로 슬쩍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의 복부를 향해 휘둘렀다.

그냥 툭 건드린 것처럼 보였으나, 요란한 북소리가 관중들한테까지 뻗어 나갔다.

동시에 눈앞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펼쳐지고 있었다.

약장수의 두 발이 지면에서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몸이 새우처럼 꺾인 그는 무대 밖을 벗어나 끝없이 날아갔다.

관중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약장수는 볼품없이 처박혀 데굴데굴 구를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가 향하는 곳에는 유진산이 있었다.

‘녀석. 일부러 할애비한테 날려 보냈구만.’

유진산의 한 손이 슬며시 올라가며 그의 등을 사뿐히 받아주었다.

덕분에 약장수는 별다른 상처 없이 무사히 내려설 수가 있었다.

하지만 다리가 풀렸는지 금세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몹시 놀랐는지 금붕어처럼 입만 뻐금대고 있었다. 놀라서 소리도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너……, 너…….”

유설의 정체가 뭐냐고 묻고 싶은 듯했다.

그 또한 무공을 익히는 인물로서 무대 위의 여자아이가 고수라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범접할 수 없는 수준임을.

그때 유진산이 그의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들어봤는지는 모르겠군. 섬서에서는 음괴라 불린다네.”

당문의 아이들도 알고 있을 정도로 음양쌍괴의 명성은 사천에도 퍼져 있었다.

약장수는 두 눈을 연달아 십여 번이나 끔뻑였다.

이제야 자신이 지옥에서 살아나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가 멍한 얼굴로 있는 사이 유진산이 다시 한번 속삭였다.

“어서 올라가야지. 상품을 전달해줘야 하잖는가.”

약장수는 뭔가에 홀린 듯 무대를 향해 엉거주춤 걸어갔다.

한편 아무것도 모르는 관중들은 어리둥절하며 혼란에 빠졌다.

“에, 에구머니나!”

“설마 곤봉에 맞고 날아간 거여?”

그들의 말은 약장수의 귓가에 들려오지도 않았다.

무대 위로 올라간 그는 유설에게 다가가 공손히 양손을 모았다.

이어서 떨리는 음성으로 횡설수설했다.

“살, 살려주십……, 죽을죄를…….”

그는 지금 자신이 뭐라고 떠들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이곳에서 우리에 대한 소문이 어떻게 퍼진 거지?’

사천의 무림인이 자신들을 두려워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엉거주춤하던 약장수는 손녀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더니, 상품을 건네주었다.

무언가를 건네받은 유설은 입이 귓가에 걸렸다.

“살, 살펴 가십시오.”

무대 위에서 폴짝폴짝 내려오는 손녀의 걸음은 누가 봐도 몹시 신난 모습이었다.

“할배, 나 상품 타왔어!”

유설이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수염이 달린 두 개의 가면이었다.

“그래, 장하다. 어디 한번 보자꾸나.”

손녀가 가면을 건네주며 물었다.

“응. 이건 무슨 가면이야?”

유진산은 가면을 살펴보며 손녀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파촉의 역사를 이어받은 성도이기에 가면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영락없는 촉나라의 장수들이었다.

“가만있어 보자. 이 가면은 수염이 곱고 아름다운 걸 보니 미염공(美髥公) 관우로구나. 그리고 이 무서운 얼굴에 우락부락한 수염은 장비일 테고. 하나 골라보거라.”

유설은 고민하지도 않고 반사적으로 관우의 가면을 골랐다.

“나는 이거!”

“음. 그래, 잘 생각했다. 그게 네 뒤에 붙어있다던 장군에 대한 예의지.”

이미 유설은 가면이 마음에 드는지 얼굴에 써보고 있었다.

얼굴에 대비해서 가면이 조금 크긴 했지만, 착용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 어때? 무서워?”

“음.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구나. 천하대장군이라 해도 되겠어.”

기분이 좋아진 유설이 할아버지의 팔을 잡아끌며 방향을 잡았다.

“푸히히. 할배, 우리 저쪽으로 가보자.”

좌우로 먹거리가 줄지어 늘어선 시장 골목이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사천의 길거리 간식을 안 먹어 볼 수는 없을 터.

“이 지역은 두부가 유명하지. 저쪽에 파는 취두부를 한번 먹어보겠느냐.”

마음만 먹는다면 백여 장 밖의 음식도 맡아볼 수 있는 손녀였다.

유설은 두부 가게를 살펴보며 코를 킁킁거렸다.

그러더니 어깨를 오므리며 부르르 떨었다.

“으윽! 냄새가 고약해.”

두부를 발효시켜서 만든 음식이기에 냄새가 지독한 게 정상이다.

유진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참을 웃고 나서 말했다.

“그럼 저건 어떠냐. 저 호마병(胡麻餠)이라는 과자는 할애비도 어렸을 때 먹어본 적이 있는데, 맛이 제법 괜찮았단다.”

“응, 저건 괜찮아. 빨리 가서 먹어보자.”

호마병은 시루에 깨고물을 뿌려서 찐 과자로 섬서에서는 보기 힘든 간식이었다.

조손이 다가가자 젊은 가게 주인이 호객행위를 시작했다.

“자, 와서 한번 먹어봐요. 여기가 바로 사천에서 제일가는 호마병 맛집이에요.”

“정말 여기가 제일 맛있어요?”

“그럼요, 꼬마 아가씨. 다른 곳은 값싼 깨를 쓰지만, 여긴 통참깨로 이렇게 바로 볶아서 만듭니다. 씹으면 바삭한 게 맛이 아주 좋지요.”

유설이 침을 삼키는 소리였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전낭부터 뒤적거리며 말했다.

“두 개 주세요.”

계산을 마친 유설은 할아버지와 하나씩 나눠서 들었다.

이어서 입안에 넣고 오물거리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어때요? 맛이 괜찮지요?”

처음으로 먹어보는 고소한 과자에 유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다, 다섯 개 더 주세요!”

유진산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손녀를 바라보았다.

밥을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거늘.

보면 볼수록 늘어나는 먹성에 놀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래, 돈이 있어야 저렇게도 실컷 사 먹을 수 있는 게지.’

빈털터리가 되기 싫다던 손녀의 마음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장은 소공자에게 얻은 전리품으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한계가 있을 터.

아미파에서 자본을 충당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번 기회에 맹주년에게 제대로 한번 골탕을 먹여야겠구나.’

아미파는 가문의 원수라 할 수 있는 무림맹주의 사문이었다.

게다가 창룡대의 양성에도 관여했기에 아주 괘씸한 문파였다.

그래서인지 종남파나 당문처럼 봐주고 싶지가 않았다.

두런두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어느새 유설이 호마병을 다섯 개나 먹어치웠다.

“벌써 다 먹었느냐.”

“응. 이제 저쪽으로 가보자. 맛있는 냄새가 나.”

“……또 먹으려고?”

“으응? 또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부터 시작인데.”

유진산은 손녀에게 끌려다니며 성도의 시장을 전부 돌고야 말았다.

여러 간식을 맛보고, 옷도 새로 사 입고, 연극도 구경하며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 것이다.

점차 유진산의 심신이 지쳐갈 무렵.

드디어 해가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했다.

조손은 성도에서 아미산의 입구까지 불과 반 시진도 안되어 주파했다.

얼굴에는 가면을 쓰고 등에는 자루도 하나씩 들쳐멘 상태였다.

우선 산 중턱의 목표지점까지 도달한 둘은 잠시 숨을 골랐다.

“한번 와본 곳이지만, 다시 보니 또 새롭지?”

아미산은 험산으로 지세가 가파르며, 봉우리들이 구름을 한참이나 뚫고 올라가 있다.

이 구간부터는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하나뿐이었고, 좌우로는 깎아지른 절벽만 까마득히 치솟아 있었다.

“응. 이 산은 정말 높아서 아름다운 것 같아.”

“그러고 보니 아미산은 천하에서 가장 경치가 수려하다고 하여, 아미천하수(阿美天下秀)란 말로도 유명하단다.”

“그럼 여기가 최고야?”

유진산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비구니들이 지어낸 헛소리다. 어느 곳을 가나 모두가 자기들의 것이 최고라 우기지. 아주 못된 습성이다.”

“우리는 그러지 말자.”

“오냐.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아무튼, 저쯤인 것 같구나.”

아미산으로 가는 유일한 관문.

비구니들이 매복한 장소였다.

돌아가는 길은 없었기에 돌파해야 한다.

“나무 위에 여덟 명이 숨어있어.”

“오냐. 할애비가 왼쪽의 셋을 맡을 테니, 너는 나머지 다섯을 상대하거라.”

“알았어. 근데 우리인 줄 알아보지 못하겠지?”

조손은 수염 가면을 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할애비 얼굴이 보여? 가면만 보고 알아볼 수 있겠어?”

“아니, 모르겠어.”

“그것 보아라. 쟤들이 우리가 음양쌍괴인 줄 어떻게 알겠느냐.”

거사가 끝나고 나면 분명 첫 번째 의심 대상으로 떠오를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것이 바로 유진산이 의도하는 것이었으니까.

“자, 가보자꾸나!”

둘의 움직임에는 거침이 없었다.

무서울 게 무엇이 있겠는가.

이곳부터는 무차별적으로 밀고 들어가서 보물을 담아올 계획이었다.

얼마 나아가지 않아 비구니들이 나무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유설의 말대로 정확히 여덟 명이었다.

종남파의 관문을 지키던 녀석들보단 무공 수준이 월등히 높아 보였다.

“멈춰라!”

“지금 즉시 무릎을 꿇고, 정체를 밝혀라!”

비구니들이 가면을 쓴 음양쌍괴에게 검을 겨눴다.

협조하지 않으면 무력을 쓰겠다는 듯 살기(殺氣)마저도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조금도 위협이 되지 않았다.

유설이 용화창을 치켜들며 근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는 관우다!”

비구니들은 말문을 잃고야 말았다. 하나같이 황당함을 넘어 혼란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유설이 할아버지한테 눈짓을 보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유진산도 잘 알고 있었다.

내키진 않았지만, 손녀가 부탁하니 맞춰줄 수밖에.

“……장, 장판파의 장비가 바로 나다!”

아주 잠시간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곧이어 침묵을 깨고, 가장 성깔 있어 보이는 비구니가 미간을 꿈틀거리며 중얼거렸다.

“……뭐야, 이 미친 꼬마들은.”

“말했잖아요. 관우와 장비라고!”

더는 무슨 말이 필요할까.

넋을 놓고 있는 비구니들을 향해 조손의 신형이 전광석화처럼 쏘아져 나갔다.

등에 헝겊으로 싸인 단창이 사선으로 매달려 있었지만, 굳이 무기는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주먹을 꾹 움켜쥔 유진산은 좌측으로. 그리고 유설은 우측으로 곡선을 그리며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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