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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236화 (236/238)

236화 날이 좋아서 (1)

유진산의 창끝이 광천일을 겨눴다.

피하지 않고, 정면승부를 벌일 심산이었다.

“보아하니 얼마 살지도 못할 것 같은데, 굳이 명을 재촉하는군.”

그의 도발에 광천일이 비웃으며 물었다.

“일수독황이 누군지 아느냐?”

“운 좋게 반로환동한 모양인데, 아직 한참 꼬맹이로구나. 나를 모르는 것을 보니.”

유진산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꼬맹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애송이는 관심 없어.”

입으로 싸우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했다.

자연스럽게 둘의 대결 구도가 만들어졌고, 유설과 명화사태는 한발 물러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유설은 가면을 쓴 채로 하품을 하고 있었지만, 명화사태는 달랐다.

그녀는 노련한 경험을 살려 숨을 죽이며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음괴가 문제로구나. 이 상황에서 하품할 정도의 여유라니……. 한 명씩 협공을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야 승산이 있다.’

하지만 그게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방법을 고심하던 명화사태가 광천일에게 전음을 보냈다.

- 적당히 밀리는 척하면서 내 쪽으로 유인해. 협공으로 양괴를 먼저 끝장내야 승산이 있으니까.

- 그럴 필요 없으니, 이 오라버니만 지켜봐. 이 일수독황 광천일, 지금껏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으니.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가 활동하던 당시 내로라하는 수많은 고수가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것도 모두 일 합에 말이다.

폭살맹격공이라는 그의 특수한 무공 때문이었다.

명화사태도 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음양쌍괴였으니까.

- 미친 영감탱이야! 보통 놈들이 아니니까, 고집부리지 말고 내 말 들어!

- 걱정하지 말라니까, 할멈.

답답한 명화사태가 전음으로 소리쳤음에도, 그를 설득시킬 수가 없었다.

설마 자신 앞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조금씩 몸을 웅크리는 모습이 왠지 허세가 가득해 보였다.

‘빌어먹을 노인네! 달려가서 확 걷어차 버릴까…….’

성질 같아선 그러고 싶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화를 억누르며 그에게 마지막 전음을 보냈다.

- 내 말 잘 들어, 영감! 반드시 일격에 죽여야 해. 일 합에 놈의 숨통을 끊지 못하면 우리가 당할 수도 있어!

광천일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했다.

그녀의 경고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에 짐승처럼 엎드리고 있었다. 흡사 먹잇감을 향해 도약하려는 맹수의 자세처럼.

웅크린 채 엉덩이를 치켜드는 모습이 웃겼던 것일까? 갑자기 가면을 쓴 유설이 깔깔거리며 배꼽을 잡았다.

“푸훕. 뭐야 저게.”

하지만 광천일과 마주 서 있던 유진산은 몹시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그의 주변으로 모여드는 매서운 기의 흐름 때문이었다.

그것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고, 멈출 줄을 몰랐다.

잠시 뒤에는 숨이 막혀올 지경이었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마치 누르고 눌러서 폭발할 것처럼 계속되는 기의 응축.

만약 저것이 터진다면 어떤 위력을 뿜어낼지 상상조차 되질 않았다.

- 무서우면 말해. 내가 대신 할까?

손녀의 경고가 오히려 그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지금 상황에서 물러선다면 무슨 꼴이 되겠는가.

- 진작 얘기하지. 할애비가 알아서 할 테니, 그냥 지켜보거라.

- 조심해야 해.

그렇지 않아도 유진산도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양가창법을 꺾은 가문의 유가살풍창.

그중에서도 필살의 초식인 맹룡아두(猛龍牙頭)의 기수식을 취했다.

서로가 출수할 준비를 마치며 호흡을 골랐다.

그때 상대와 눈을 마주치고 있던 유진산은 은연중 놀라고야 말았다.

‘뭐지, 저건?’

누렇던 그의 두 눈동자가 돌연 뱀눈처럼 변했다.

형태가 변한 눈동자는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했다.

동시에 자신의 영혼이 그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정신이 잠시 몽롱해지려는 그때.

- 할배, 정신 차려!

손녀의 전음에 유진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그때 광천일이 웅크리고 있던 지면이 움푹 파이며, 기의 파동이 물결처럼 뿜어졌다.

쿠웅-!!!

그 순간 그의 신형이 폭발하듯 날아올랐다.

한번 펼치면 반드시 상대를 죽이는 필살의 무공.

이 무시무시한 폭살맹격공은 스스로가 무기가 되어 상대를 찢어발긴다.

전신이 강기에 휩싸인 그의 모습에, 유진산도 다급히 창을 내질렀다.

‘어림없다!’

지이이잉-!

울음을 토해내는 용살창은 상대의 머리를 물어뜯을 듯 거침없이 나아갔다.

창끝에 서린 시퍼런 창강(槍剛)이 정확히 광천일의 미간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머리를 들이밀다니?

‘뭐지?’

이렇게나 무식하게 나올 줄이야.

예측을 벗어난 그의 반응에 유진산은 적잖게 당황했다.

하지만 더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미 창끝이 그의 이마를 가격하고 있었으니까.

둔탁한 굉음이었다.

마치 목창으로 거대한 종을 찌른 듯한 느낌이었다.

손목으로 다가오는 묵직한 충격.

그리고 손아귀가 찢어지며, 용살창을 놓쳐버리고야 말았다.

상상을 초월한 위력에 유진산은 머릿속이 창백해졌다.

‘이럴 수가?’

하지만 놀람도 잠시.

어느새 지척으로 파고든 광천일이 가슴에 쌍장을 내지르고 있었다.

유진산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금강불괴신공을 극대화하는 것 외에는.

유진산의 입에서 핏물이 토해져 나왔다.

동시에 두 발이 지면에서 떠오른 그는 오 장을 날아 지면을 데굴데굴 굴렀다.

유설이 한달음에 달려가 널브러진 할아버지를 안아 들었다.

그의 입에서 쇳소리가 힘없이 토해져 나왔다.

“……끄으으. 아가, 할애비 죽는다.”

“안 돼, 죽지 마!!!”

유설이 다급히 그의 상의를 열어서 살펴보았다.

두 개의 붉은 손바닥 자국이 가슴에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때 유진산이 두 눈을 스르륵 감으며 말했다.

“……슬퍼하지 말거라.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 게다.”

유설은 다급히 할아버지의 손목을 진맥하고 있었다.

약간의 내상이 전부였을 뿐, 다행히도 죽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금강불괴신공이 살린 것이다.

안도한 유설은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는, 성난 강아지처럼 미간을 좁혔다.

“거짓말 마, 할배. 이걸로 안 죽어.”

그 순간 유진산이 실눈을 뜨며 속삭이듯 물었다.

“……눈치챘어?”

자신을 놀렸기 때문일까? 유설이 할아버지의 가슴을 주먹으로 ‘팍’ 때렸다.

“끄악!”

하필이면 맞은 부위를 때리다니.

유진산은 가슴을 움켜쥐고 데굴데굴 굴렀다.

“할배, 미안해!”

한편 음양쌍괴와는 달리 광천일과 명화사태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양괴를 일격에 전투불능으로 만들었으니 좋을 수밖에.

비록 그의 숨을 끊지는 못했지만, 고무적인 성과였다.

“잘했어, 영감. 이제 우리가 힘을 모아 음괴만 잡으면 끝이야.”

분기탱천한 아미파의 태상장로였지만, 광천일의 반응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우리라니. 내 역할은 여기까지야, 할멈.”

“그게 무슨 말이야? 벌써 치매가 왔어?”

그가 붉어진 자신의 이마를 가리켰다. 유진산에게 용살창을 받아낸 부위였다.

“부상이 심해. 이대로는 싸울 수 없으니,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명화사태가 다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런 기회를 어떻게 놓친단 말인가.

아미파에서도 성질이 급하고 불같다고 소문난 태상장로였다.

그녀가 참지 못하고, 그를 몰아붙였다.

“영감, 미쳤어? 갑자기 무슨 개뼉다구 같은 소리야?”

광천일이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좀 도와줘. 내가 힘을 내서 싸울 수 있게.”

“……어떻게?”

“내게…… 내게…… 입맞춤을 해줘.”

주름이 가득한 명화사태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미친!”

“그 방법밖에는 없으니, 어서 선택해.”

광천일은 이미 결심을 굳혔다는 듯 확고하게 말했다.

표정과 말투에서는 타협의 여지가 조금도 없어 보였다.

명화사태는 선택을 해야만 했고,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음괴가 잠시 한눈을 팔고 있지만, 불시에 달려든다면 광천일 혼자 도망칠 기세였으니까.

“이런 시발…….”

“비구니가 그렇게 욕을 하면 쓰나. 시간 없으니까, 빨리해줘.”

말을 마친 광천일이 입술을 천천히 내밀었다.

흉측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명화사태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주름진 두 노인의 입술이 맞닿는 순간이었다.

돌연 광천일이 양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붙잡았다.

“웁!”

명화사태는 발악했지만, 그의 내공을 당해낼 수가 없었기에 뿌리치지 못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입맞춤이 계속되던 찰나.

어디선가 여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다가 급격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태상장로님, 어디 있습니까!?”

“저희가 도우러 왔습니다!”

아미파의 비구니들이었다.

사문으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명령을 어기고 되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녀들은 멍한 얼굴로 정지하고야 말았다.

“태, 태상장로?”

“지, 지금 뭘 하시는…….”

불가의 문파인 아미파에서는 남자와의 신체적인 접촉이 금지되어 있다.

하물며 가장 큰 어른인 태상장로가 웬 노인과 입맞춤을 하고 있다니.

곧이어 광천일의 손에서 벗어난 명화사태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사, 사문으로 올라가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녀보다 아래 배분인 금희사태가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죄, 죄송합니다, 사저. 저희는 걱정이 돼서.”

명화사태는 장로들과 제자들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도움 안 되니까, 모두 꺼져!”

그녀의 한마디에 몰려온 비구니들이 꽁지가 빠지게 도망쳤다.

옆에서 광천일이 애틋한 눈빛으로 그런 그녀를 위로했다.

“쑥스럽지, 할멈? 나도 처음이었어.”

명화사태는 대답 대신 침을 ‘캭’ 뱉어버렸다.

생각 같아선 그를 몰아붙이고 싶었지만, 더는 그럴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음괴가 팔짱을 낀 채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다 끝났어요?”

광천일이 명화사태를 보호하듯 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상대할 테니, 할멈은 뒤로 가 있어.”

“그게 무슨 미친 소리야? 우리 둘이 싸워도 될까 말까…….”

그 순간 광천일이 그녀의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더는 얘기하지 말라는 의사였다.

명화사태를 뒤로 물린 그는 다짜고짜 유설의 앞에 성난 개처럼 웅크렸다.

유진산과 싸울 때와는 다르게 자신감과 패기가 넘쳐 보였다.

“네가 음괴로구나. 오늘이면 묻힐 테지만, 노부가 그 이름을 기억하마.”

광천일은 다시 한번 무적의 폭살맹격공을 준비했다.

이 무공은 일 초식만 존재할 뿐, 이(二) 초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음 초식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강력하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그 누구도 받아낸 자가 없었다.

그런데도 유설은 아무런 방어 자세조차 하지 않았다.

단지 검지로 나무에 기댄 유진산을 가리키고 있을 뿐.

“우리 할배를 저렇게 만들었으니, 쭈그렁 할아버지라고 안 봐줘요.”

“시끄럽구나, 건방진 애늙은이년. 왜 이렇게 옹알거려?”

또다시 광천일의 전신으로 기의 폭풍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유설은 미동도 없이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일수독황(一手毒皇) 광천일. 그는 확신했다. 이번 일격에 음괴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음을.

준비를 마친 그가 드디어 공격을 개시하려 했다.

광천일의 반경 일 장으로 지면이 움푹 파였다.

곧이어 화산이 폭발하듯 그의 신형이 쏜살같이 날아올랐다.

마치 먹잇감을 덮치려는 호랑이같은 모습이었다.

찰나의 순간. 그동안 꼼짝도 하지 않던 유설이 그를 향해 마주 쏘아져 나갔다.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는, 가히 빛처럼 빠른 속도였다.

눈 깜짝할 사이 둘의 신형이 맞물리고 있었다.

유설의 무릎이 광천일의 안면에 틀어박히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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