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날이 좋아서 (2)
안면을 가격당한 광천일은 뒤로 눕듯이 넘어져 버렸다.
꽈당-!
그의 얼굴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앞니가 날아가고, 코피가 터져 나왔지만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평생을 수련해온 폭살맹격공이 고작 무릎 공격에 파훼되다니. 이 상황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광천일은 몹시 충격을 받은 듯 일어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저 말도 안 되는 힘은 대체 뭐지?’
혼란에 빠진 그를 음괴가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어떻게 요리할까 고민하는 듯한 눈빛으로.
이대로라면 음괴에게 곧 죽임을 당할 터.
지켜보다 못한 명화사태가 쏜살같이 접근해서 그의 어깨를 뒤로 잡아끌었다.
“이 영감탱이야! 그러게 같이 하자니까, 왜 허세를 부려!?”
“……할멈.”
“시끄럽고, 싸울 준비나 해.”
음괴와 거리를 벌린 두 노인은 어깨를 맞대었다.
비겁하더라도 이대 일로 싸우겠다는 의사이리라.
그런 둘을 음괴가 팔짱을 끼고 지켜보았다.
“잘 알았어요. 그럼 사이좋게 쉬게 해줄게요.”
말을 마친 유설이 한쪽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어디선가 창 한 자루가 날아들어 손아귀에 ‘착’ 감겼다.
창을 움켜쥔 순간부터는 기세가 무섭게 돌변했다.
그 모습에 두 노인은 긴장한 얼굴로 저주를 퍼부었다.
“……빌어먹을 음괴.”
“오늘 같이 죽자꾸나. 아미파의 원수년.”
여차하면 동귀어진이라도 할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 무너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대 일로 싸우려고 했던 계획은 단번에 무산되어버렸다.
“그것참 곱게 늙을 것이지, 주둥이들이 아주 더럽구나.”
음괴의 옆으로 양괴가 비틀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설마 부상이 얕았던 것일까? 살아남은 것도 어이가 없거늘, 다시 싸우려 하고 있다니.
명화사태가 광천일을 노려보았다. 어찌 된 것인지 묻는 눈빛이었다.
“분, 분명 폭살맹격공이 제대로 적중했거늘…….”
유진산은 용살창을 땅에 푹 박아넣고는 창대에 몸을 기대었다.
“내가 보기보단 몸이 좀 단단해. 어쨌거나 승부는 마무리를 지어야 하지 않겠나. 이렇게 끝내기엔 좀 억울해서 말이야.”
광천일은 그가 금강불괴신공을 익힌 것을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축 처진 그의 몰골을 보며 한편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건방진 놈. 그 꼴로 나와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물론.”
유진산이 왼팔을 슬쩍 비틀자, 손목에 차고 있던 염주가 튕겨 나왔다.
동시에 그의 왼손에서 ‘우두둑’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봉인해두었던 사악한 힘을 해제한 것이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광천일과 명화사태는 어리둥절했다.
그때 유진산이 손녀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승부를 마무리 지어야겠으니, 잠시 뒤로 물러서 있거라.”
할아버지의 진지한 모습에 유설도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명화사태는 일이 틀어진 것에 분개하며, 검을 움켜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마지막 기회야, 영감.”
“걱정하지 마, 순식간에 죽여버릴 테니. 음괴가 돕지 못하게 잠시만 막아줘.”
유설은 끼어들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 모습에 광천일과 명화사태는 내심 환호했다.
광천일 또한 유설에게 맞은 충격이 있었으나, 유진산의 부상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창에 기대어 겨우 몸을 지탱하는 주제에 자신과 싸우겠다니.
최대한 빠르고 신속하게 끝낼 셈이었다.
외마디 고함과 함께 광천일이 지면을 박찼다.
그의 절기는 폭살맹격공이지만, 같은 초식을 세 번이나 펼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의 다른 무공들 또한 무시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강기를 머금은 그의 주먹이 유진산의 머리를 으깰 기세로 다가갔다.
쐐에엑-!
공기를 가르며 주먹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유진산은 별다른 방어를 하지 않았다. 단지 창대에 몸을 기대어 있을 뿐.
곧이어 그의 얼굴에 주먹이 적중하려는 그때. 돌연 축 늘어져 있던 그의 왼손이 섬전처럼 솟구쳐 올랐다.
가벼운 손짓처럼 보였지만 벼락처럼 빨랐으며, 바위처럼 무거운 힘이 내포되어 있었다.
검은 기류에 휩싸인 작은 손아귀가 광천일의 주먹을 쳐낸 소리였다.
“……큭!”
광천일은 튕겨 나가는 자신의 주먹을 느끼며 몹시 당황했다.
의문이 가득했으나 길게 생각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그는 오른발로 균형을 잡으며, 다시 한번 오른쪽 주먹을 내뻗었다.
여지없이 그의 주먹은 또다시 튕겨 나가고 있었다.
오기가 생긴 광천일은 미간을 찡그렸다.
‘오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이것도 한번 받아봐라!’
그의 두 주먹이 순간적으로 수십 개로 늘어난 듯 보였다.
그것은 곧이어 유진산을 향해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기세 좋게 공격하던 그는 점차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검은 기류를 동반한 그의 왼손이 채찍처럼 움직이며, 모든 공격을 차단했다.
자신이 고작 한 손을 당해내지 못하다니?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광천일은 양손의 통증 때문에 공격을 멈추고 잠시 물러섰다.
그리고 곧이어 화들짝 놀라고야 말았다.
어찌 된 일인지 양손이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유진산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뭘 그리 놀라고 있어? 아까의 그 자신감은 어디로 가고.”
“이, 이 사악한 놈들! 마공까지 손을 댄 것이냐!?”
따지자면 마공은 아니었다.
하지만 왼손에 봉인된 힘의 내력을 일일이 해명할 마음은 없었다.
귀찮게 그럴 이유도 없을뿐더러, 말해봐야 믿지도 않을 테니까.
“우리가 마공을 익히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 오늘 죽을 늙은이가 궁금한 것도 많구나.”
말을 마친 유진산이 처음으로 반격을 개시했다.
광천일은 다급히 쌍장을 마구 내질렀지만, 그의 왼손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서로의 손이 맞물리길 잠시 후.
얼마 가지 못해 그는 유진산에게 일격을 허용하고야 말았다.
“크으윽!”
그의 두 발이 지면을 끌며 주르륵 밀려 나갔다.
복부 부근의 겉옷에 검은 손바닥 자국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유진산이 마무리를 짓기 위해 그를 향해 전광석화처럼 따라붙었다.
공교롭게도 광천일이 밀려나고 있는 곳은 명화사태가 있는 위치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움직임을 개시했다. 위기에 처한 광천일을 돕기 위해 나선 것이다.
명화사태는 앞뒤 재지 않고, 유진산을 향해 검강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녀의 난입을 지켜보고만 있을 유설이 아니었다.
찰나의 순간, 유설의 신형이 밝은 섬광과 함께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빛이 번뜩였다가 다시 사그라진 그 순간. 어느새 유설은 명화사태의 측면에서 옆구리에 주먹을 쑤셔박고 있었다.
이 귀신같은 경신술은 검후에게 전수받은 기술이었다.
허리가 활처럼 꺾인 명화사태는 단번에 고꾸라졌다.
그리고 뒤이어 광천일도 그녀 옆에 쓰러지고야 말았다.
기어코 유진산에게 마무리 일격을 당한 것이다.
“끄으으…….”
조손은 널브러진 채 신음하는 둘을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이제 마무리를 지을 차례였지만, 잠시만 기다리기로 했다.
둘이 할 말이 남아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광천일의 고개가 힘겹게 우측으로 돌았다.
앞니가 빠지고 피로 얼룩진 처참한 얼굴이었지만, 그는 분명히 웃고 있었다.
“할멈……. 방금 나 구해주려고 나선 거 맞지?”
“……웃지 마. 정드니까.”
“미안해, 할멈……. 지켜주지…… 못해서”
그 순간 명화사태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노파였거늘.
그녀의 손이 지면을 끌며 광천일을 향해 움직였다.
“못생긴 영감탱이……. 이제 함께 가……. 둘이.”
검게 그을린 광천일의 손도 부들부들 떨며 마주 나아갔다.
“할멈…….”
그렇게 둘은 주름진 손을 꼭 맞잡았다.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이.
그때 둘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유진산이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손녀가 훌쩍거리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손녀에게 전음을 보냈다.
- 아가, 왜 울어?
- 나도 모르겠어……. 그냥 슬펐어.
- 인생이 다 그런 거니, 마음에 담아둘 것 없다. 이제 끝내야 하니까, 잠시 눈 좀 감고 있거라.
- 잠깐만, 할배. 불쌍하단 말이야.
신나게 때릴 땐 언제고, 왜 지금 와서 측은지심을 느낀단 말인가.
웃긴 노릇이었지만, 유진산은 이해한다는 듯 손녀의 어깨를 두들겼다.
- 무림의 세계에서는 항시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한다. 살 만큼 산 늙은이들이니, 함께 보내주자고.
유설은 차마 지켜볼 수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계속 훌쩍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미파는 봐주지 않으려고 했거늘. 손녀의 마음이 불편하다는데 어쩌겠는가.
‘……어찌한다. 어차피 그냥 놔둬도 얼마 못 가서 죽을 노인네들이긴 한데.’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이내 결심을 굳히고는 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어이, 노인네들. 오늘은 날이 좋아서 살려주는 거니, 운이 좋은지 알아.”
서로의 손을 붙잡고 있던 광천일과 명화사태는 어리둥절했다.
자신들을 이렇게 조건 없이 살려준다니? 무림의 세계에서는 꿈도 꿀 수가 없는 일이었다.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두 눈만 끔뻑여대고 있었다.
그때 유설이 어디선가 꽃잎 두 장을 따서 다가왔다.
그러더니 유진산의 옆에 쪼그려 앉으며 중얼거렸다.
“대신 앞으로는 이 꽃처럼 말을 예쁘게 써요. 알았어요?”
유설은 분홍 꽃잎을 광천일과 명화사태의 입술에 하나씩 물려주었다.
몸이 얼어붙은 둘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두 눈만 끔뻑여댔다.
그때 유진산이 왼손을 쓱 흔들어 보이며, 마지막 말을 건네었다.
“이제 우리에 대해서 잘 알겠지? 감당할 자신이 없으면, 어디 가서 헛소리는 하지 않는 게 좋아.”
마공을 익혔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피곤한 일이 뒤따를 터.
무서울 건 없었지만,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조손은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무기와 전리품을 챙겨 들고 다시 길을 떠났다.
아미산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더는 가로막는 자들이 없었다.
그리고 유설은 뭐가 기분이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했다.
“혼자 뭐가 그렇게 좋아? 할애비 아픈 거 안 보이느냐.”
조금 전 광천일에게 맞은 양쪽 가슴이 아직도 아려왔다.
옆에서 걷던 유설이 씩 웃으며 대꾸했다.
“아까 내가 확인했어. 운기조식만 좀 하면 괜찮아질 거야.”
“확인하긴 뭘 확인해? 이러다 할애비 죽으면, 설이 너 혼자 살아야 해.”
유설이 깔깔 웃으며 대꾸했다.
“할배는 튼튼해서 안 죽는다며. 근데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유진산은 턱짓으로 손녀의 등에 멘 보따리를 슬쩍 가리켰다.
“우선 저것부터 팔아치워서 여비를 마련해야지. 계속 노숙할 수는 없잖느냐.”
불상은 부피 때문에라도 빨리 처분하고 싶었다.
계속 들고 다니기에도 걸리적거렸으니까.
“비싸게 받았으면 좋겠다.”
“음. 그러려면 가치를 아는 전문가를 찾아야겠구나. 우선 덕양산으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