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사천의 지지자들 (1)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종남파를 시작으로 당문과 아미파까지.
음양쌍괴의 이름으로 내로라하는 강자들을 적지 않게 제압했다.
하지만 강호는 넓고, 고수는 많은 법.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앞으로의 여정을 순탄히 이어가기 위해선 자금부터 마련해야 했다.
“할배, 지금 우리 천검산장으로 가는 거지?”
길을 걷던 유진산이 놀란 표정으로 손녀에게 되물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다 알지. 보물을 어디에 팔면 좋을지, 극살오의 아저씨들한테 물어보려는 거잖아.”
눈치가 보통이 아니었다.
아미파의 불상을 정상적인 경로로 매각할 수는 없을 터. 사천에 인맥이 많은 그들을 통해서 거래 상대를 물색해볼 작정이었다.
목적지는 덕양산 인근의 천검산장.
쉬엄쉬엄 이동해도 반나절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네 짐작이 맞다. 할애비는 이 지역에서 아는 사람이 없으니, 그들의 인맥을 좀 이용해야겠구나.”
“우리가 오면 좋아하겠지?”
“그럼! 설이가 온다면 당연히 좋아하겠지.”
“히히. 빨리 가보자, 아저씨들 보고 싶어~”
유진산은 순수하게 미소짓는 손녀의 얼굴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오냐. 그럼 지금부터는 본격적으로 달려볼까?”
천검산장은 집성촌보다 규모는 작지만, 어느 정도 세를 이루어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언덕에 자리한 수십 채의 크고 작은 전각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하나뿐인 입구는 목책으로 두른 모습이었으며, 망루까지도 보였다.
한눈에 봐도 방어하기에 최적화가 된 모습이었다.
입구를 지키는 두 명의 무사가 검집을 교차하며 가로막았다.
백색의 경장 차림이었으며, 이마에는 검은 띠를 두른 모습이었다.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무공을 익힌 흔적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을 한 번 훑어본 유진산이 손녀에게 전음을 보냈다.
- 네가 한번 잘 얘기해 보거라.
손님으로 온 이상 소란스럽게 할 필요는 없었다.
할아버지의 의중을 알아들은 유설이 공손히 양손을 모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여기가 천검산장 맞죠?”
“너희들 뭐야? 여긴 어떻게 왔어?”
유진산이 손녀에게 계속 대답하라고 눈짓을 보냈다.
경험을 쌓게 해주기 위함이었다.
“걸어서 왔어요.”
“그러니깐 무슨 용무로 왔냐고?”
“극살오의 아저씨들이 여기에 있지요?”
극살오의란 말이 나오자 무사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제야 그들의 시선이 조손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꼬마들로 보이지만, 범상치 않은 기개가 느껴지는 인상착의.
그리고 천으로 말아놓은 등 뒤의 기다란 막대기들은 창이 분명해 보였다.
두 명의 무사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더니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 혹시 음양쌍괴 대협들이 맞으십니까?”
“맞아요. 내가 음괴예요.”
그 순간 무사들은 머뭇거림 없이 길을 열어주었다.
“말,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 한번 찾아올 수 있다고, 미리 언질을 받았습니다.”
“정말요? 빨리 아저씨들을 만나게 해주세요.”
어느새 무사들의 태도와 반응이 백팔십도 달라져 있었다.
“예.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달려가서 불러오겠습니다.”
“히히. 고마워요!”
포권을 건넨 두 명의 무사는 등을 돌려 허겁지겁 달렸다.
그들의 얼굴은 몹시 상기되어 있었다.
“음양쌍괴 맞겠지? 흉악하다는 소문이랑은 좀 다른 거 같은데?”
“확실해.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음괴 대협의 이름을 팔아먹겠어?”
“하긴. 어쨌거나 못 알아보고, 쫓아냈으면 큰일 날 뻔했어.”
“큰일이 아니라 뒈질뻔한 거지.”
옆에서 달리던 무사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장주님한테 보고하러 갈 테니, 너는 태운각으로 가봐. 천 대협이 거기에 있을 테니.”
“그래. 그럼 이따 보자고.”
둘은 방향을 틀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그리고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입구에서 조손이 지켜보고 있었다.
유설이 기다리다 심심한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할배, 여긴 뭐 하는 곳이야?”
“음. 무림세력이 다 똑같지, 여기라고 다를 것이 있겠느냐. 강해지기 위해 수련하고, 돈을 벌고, 세력도 확장하고 말이야.”
“그럼 패도문이랑 비슷한 거네?”
“그렇긴 한데, 어찌 이런 변두리 세력이 사파의 제일 문파에 비교가 되겠느냐.”
두런두런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대협!!!”
이곳을 향해 누군가가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었다.
기쁜 표정으로 달려오는 중년인은 다름 아닌 극살오의의 맏형인 천우환이었다.
“아저씨!”
유설이 해맑은 미소로 마주 달려갔다.
이어서 서로 양손을 맞잡고는 정신없이 흔들어댔다. 물론 유설의 힘에 의한 것이었지만.
“두 분을 이렇게 빨리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어느새 뒷짐을 지고 다가온 유진산이 옅은 미소로 답했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잠시 미루는 게 좋겠군. 헌데 자네 아우들은 왜 보이지 않는가?”
“아아. 이번에 천검산장에서 맡은 의뢰를 돕기 위해 따라갔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진산이 혀를 끌끌 찼다.
“무림맹의 추격을 받는 자들이 어찌 그렇게 밖으로 돌아다니는가? 잠잠해질 때까지 숨어 있어도 부족할 판국에.”
“에이. 설마 사천까지 쫓아오겠습니까? 아우들이 하도 좀이 쑤신다길래, 어쩔 수 없이 허락해줬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진산이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꾸짖었다.
“자네 좀 혼나야겠구만. 무림맹이 그렇게 우습게 보이던가? 강호에서는 그런 자만심이 독이 된다고 충고해주었거늘.”
“죄송합니다, 어르신. 거두절미하고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내게 사과할 필요 없네. 그렇게 촐랑대고 다녀봐야 자네들만 손해지, 노부랑 무슨 상관이 있겠나.”
잠시 혼이 났지만, 천우환은 오히려 가슴이 따뜻해졌다. 자신들을 걱정해주는 그의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멋쩍어진 그가 어색한 미소로 말했다.
“일단 들어가시지요. 우선 이곳 천검산장의 장주님부터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유진산이 턱짓으로 어딘가를 슬쩍 가리키며 말했다.
“이미 저기 나와 계신 것 같은데. 아닌가?”
십여 장 거리에서 누군가 다소곳이 서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사하면서도 단정한 복장의 중년인이었다.
풍채만으로도 그가 주인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그가 엉거주춤 다가와 자신을 소개했다.
“천검산장의 장주 엽성입니다.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찾아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그의 태도는 더할 나위 없이 공손하고 깍듯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강호에서 음양쌍괴와 친분을 쌓을 수만 있다면 큰 재산이 될 테니까.
유진산도 마주 포권을 하며 답례를 해 보였다.
“이렇게 환대해주시니 우리가 고맙지요.”
“아닙니다. 극살오의 형제들에게 대협들의 전설적인 얘기를 전해 들었는데, 꼭 한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옆에서 듣던 천우환이 웃으며 덧붙여 설명했다.
“엽 형 말이 맞습니다. 저한테 대협들을 한 번만이라도 만나게 해달라고 어찌나 조르던지.”
장주 엽성의 반응으로 보아 아마도 거짓은 아닌 듯했다.
자신들을 지그시 바라보는 눈빛이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섬서도 아닌 사천에 이런 열성 지지자가 있었다니. 유진산은 피식 웃으며 한 손을 휘저었다.
“소문은 항시 과장되는 법이지요.”
“과장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우선 안으로 모실 테니, 어서 이쪽으로…….”
엽성이 앞장서서 그들을 가장 고풍스러운 전각으로 안내했다.
그는 조손을 금빛 비단이 깔린 탁상에 앉히고는, 직접 다과를 준비하는 정성까지 보였다.
물론 유진산도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었음을.
찻잔을 움켜쥔 유진산이 환대에 대한 보답으로 그를 치켜세워주었다.
“장주님의 성품에 감탄했소. 이런 사소한 일까지 부하들에게 시키지 않고, 직접 다 하시다니.”
칭찬 한마디에 엽성의 입이 귓가에 걸렸다.
“허헛! 과찬이십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아무래도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았다.
유진산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본론을 꺼냈다.
“우리가 갑작스레 방문한 이유는 정보를 좀 얻고자 함이오.”
“정보를 말입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저희가 뭐든지 알아봐 드릴 테니.”
유진산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손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유설이 보따리에서 불상을 꺼내 탁상 위에 ‘탁’ 올려두었다.
“이거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불상을 살펴보던 엽성이 연신 감탄하며 물었다.
“이건 무슨 불상입니까? 굉장히 귀해 보이는 물건이로군요.”
“아미파에서 받았어요. 우리 집값 대신에.”
엽성이 동시에 목을 빼며 물었다.
아미파가 어디인가. 사천에서 가장 강한 정파 세력 중 하나였다.
그들이 음양쌍괴에게 순순히 불상을 내줬을 리는 없을 터.
묵묵히 지켜보던 천우환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전리품입니까?”
그들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듯 유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비록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전리품이 무엇인가. 전투에서 이긴 후 상대의 물품을 취하는 것을 뜻한다.
엽성이 기대 섞인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그럼 아미파도 종남파처럼 쑥대밭으로……?”
이번 질문에 대한 대답은 유진산이 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소. 어쨌거나 그 불상을 감정하고, 매입해줄 수 있는 상대를 좀 알아봐 줄 수 있겠소? 아무래도 정상적인 경로로는 힘들 것 같아서 말이오.”
얘기가 끝나기 전에 엽성은 이미 고개를 마구 끄덕이고 있었다.
“정말 잘 찾아오셨습니다. 마침 제가 가능한 자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일이 이렇게나 쉽게 풀리다니.
거래 대상이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궁금해졌다.
“뭐 하는 자들인지 물어봐도 되겠소?”
엽성은 자신이 도울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 기쁜 듯했다.
그가 미소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 있게 답했다.
“예, 대협. 저희와 거래하는 세력인데 이름이…… 흑야방이라고 합니다. 못 들어보셨죠?”
그 순간 유진산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방금 흑야방이라고 했소?”
“예. 사천에서는 얼마 안 된 신흥세력인데, 수완이 아주 대단합니다.”
흑야방이라니. 이곳에서 그 이름을 들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무서운 속도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것은 알았지만, 벌써 사천에까지 진출한 모양이었다.
반가운 이름에 유설도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흑야방이라구요? 정말요?”
“예. 혹시 아는 곳입니까?”
어디 알다뿐이겠는가.
유설이 아기였을 시절부터 양주산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해 온 자들이었다.
방주인 풍호와 그의 아내인 현희까지. 보고 싶은 인물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유진산도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와는 아주 가까운 자들이오. 책임자가 누군지 알고 있소?”
대외적인 정보임을 내색하듯 엽성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저도 지금까지 딱 한 번 만나봤는데, 그녀는 자신을 은화린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다행히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그동안 여러 번이나 서로 도움을 주고받지 않았던가. 흑야방의 남부지역을 총괄하던 여인으로 조직의 거물이었다.
사천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그녀가 직접 내려온 모양이었다.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없었다.
“그들에게 우리가 좀 보자 한다고 전해줄 수 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