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행복 식당-2화 (2/110)

#2화 일단 깍두기부터 (1)

따다다따다- 따따따다따따라다따-

휴대폰 알람을 반사적으로 끈다.

현실감 없이 추락하던 때의 느낌이 떠오른다.

마치 번지점프를 하듯이 몸에서 체중이 느껴지지 않았고, 쿵- 하고 뭔가에 머리가 부딪힌 것 같았다.

그리고 기억이 사라졌다.

설마…… 여기 병원인가?

그 추락 속에서 살아남았다고?

근데, 지금 몇 시지?

머리맡에 놓여 있는 휴대폰을 들어 화면을 확인했다.

“어라? 이게 뭐야?”

내 휴대폰이 아니다.

사고가 나며 휴대폰이 바뀐 건가?

하긴, 그러고도 남지.

교통사고도 아니고, 무려 비행기가 추락했으니.

그나저나 이 휴대폰…… 스마트폰 처음 나왔을 때 내가 쓰던 기종이랑 똑같다.

색깔도 똑같고, 씌워 놓은 케이스도 똑같다.

15년 전이었다면 이게 내 폰이라고 착각했을 정도로.

“근데, 뭔 병원 이불이 이렇게 무거워.”

갑갑한 느낌에 덮었던 이불을 들추는데, 어라?

이 오방색의 두꺼운 솜이불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덮고 자던 이불이다.

이를테면, 애착 이불 같은 거.

더럽게 무겁지만, 한번 덮고 자면 그 마력에서 헤어나오기 힘들다.

이 이불은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 집 처분하면서 같이 버렸는데…….

휴대폰부터 이불까지…… 뭔가 이상함을 느낀 나는 발작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 이게 대체?”

몸 하나 겨우 누일 만한 작은 방.

그 방 안에서 내가 누워 있는 곳은 병원 침대가 아니라 딱딱한 장판 바닥이었다.

가장 황당한 건, 이 모든 풍경이 내게는 너무도 낯익다는 것이다.

2010년 겨울, 아버지가 허리 디스크로 쓰러지시는 바람에 유달리 추웠던 그해의 우리 집, 내 방.

“이거 꿈인가?”

어제부터 왜 이렇게 요상한 일들이 벌어지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도를 넘었다.

꿈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근데…… 비행기를 탄 것부터 비즈니스 석에 앉아 와인을 마시고 비행기가 추락한 것까지 모두 꿈이라고?

뭐, 좋아. 일단 꿈이라고 치고…… 자연스럽게 주변을 둘러봤다.

낡은 브라운관 모니터가 달린 오래된 PC가 보이고, 긴 책장이 달려 있는 일체형 책상이 보인다.

작은 창문의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반짝이는 빛이 느껴진다.

그리고, 벽에 붙어 있는 달력.

2010년이라고 큼지막하게 써 있는 달력.

“역시 2010년이었네.”

2025년 여름에 베트남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있던 내가 2010년 겨울로 돌아왔다?

소설 같은 일이고 영화 같은 일이다.

그런데, 방 안에서 풍기는 꿉꿉한 냄새까지도 그대로인 이 현실감은 뭘까?

그때 멍해 있던 나를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선우야, 아직까지 자니?”

이 목소리는?

소리의 주인공을 떠올리기도 전에 직접 방문을 열고 등장하는 사람.

우리 어머니.

10년 전에 사고로 돌아가셨던…… 고종숙 여사.

어머니가 훨씬 더 젊어진 얼굴로 내 앞에 등장해 있었다.

“빨리 서둘러야지. 오늘 깍두기 담그는 날이야.”

“깍두기요?”

내 어리벙벙한 표정을 본 어머니가 목소리를 높인다.

“오늘 깍두기 담그기로 한 거 몰라? 너 또 밤 늦게까지 게임했니?”

“게임?”

나는 아까 스치듯 지나쳤던 브라운관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맞다.

스물다섯 살의 나는 느지막이 X타크래프트라는 게임에 빠져 있었다.

당시에 또래 친구들은 잘하지도 않던 그 게임.

게임계의 고전, 게임계의 민속놀이인 바로 그 게임.

그래도 나에게는 가장 재미있는 게임이었다.

물론, 할 줄 아는 게 그 게임밖에 없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생각에 빠져 있는데 다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목소리가 커져 있다.

“얼른 준비하고 나와. 시장부터 가야 하니까.”

“네…… 네…….”

얼떨결에 대답한 나는 옷부터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두꺼운 솜이불과 요를 개어 한쪽에 몰아넣고 거울을 보며 대충 머리를 정리했다.

얼굴이며 머리카락, 몸까지 전부 15년 전 이선우의 모습이다.

얼굴을 확인하니 더 어리벙벙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깊게 생각할 때가 아니다.

‘일단 깍두기부터 담그자. 이게 꿈이든 현실이든 아무것도 아니든 간에…….’

선우네 백반에서 깍두기를 담그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허리 디스크로 쓰러지고 나서는 나와 어머니가 둘이서 했으니, 더 힘들어진 건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깍두기 담그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뭐니 뭐니 해도 우리집 백반의 최고의 히트 상품은 새콤달콤한 깍두기였으니까.

적당히 익은 시점에 손님에게 내어주려면, 깍두기가 다 떨어지기 전에 미리 담가야 했다.

그날이 바로 오늘이다.

겉으로는 다소곳해 보이지만, 은근히 다혈질인 고종숙 여사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면 얼른 준비를 하고 나가야 한다.

……이게 꿈이든 현실이든 뭐든 간에 말이다.

* * *

선우네 백반은 서울의 동쪽 끝 동네 골목의 상가 주택 1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주 고객은 동네 주민들과 근처에 있는 영훈대학교의 학생들.

동네 장사, 단골 장사이다 보니 맛과 서비스에 더 신경을 써야 했다.

번화가에서야, 유동 인구가 많으니 한 번 실수를 했다가도 만회할 기회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동네 장사는 그렇지 않다.

한번 잘못 입소문이 나게 되면, 사실상 장사를 지속하기 힘들다.

매일 오는 사람이 그 사람이고, 먹는 사람이 그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다.

“어머니, 이거 어디에다 둬요?”

“얘가 오늘따라 왜 이래? 늘 두던 데다가 두면 되잖아.”

어머니의 목소리에 옅은 신경질이 묻어났다.

그럴 만도 하지.

이미 수십 번은 해 본 일을 물어보고 앉았으니.

나는 좀 억울하긴 했다.

이 당시에야 깍두기를 만드는 게 매달 있는 월례 행사였지만, 그건 이 당시 얘기고.

“지금 15년이라는 시간을 건너뛰어서 여기 있는 거라고요.”

“뭐? 지금 뭐라고 얘기한 거야?”

“아니에요, 어머니!”

내 목소리가 들렸나?

15년 동안 훈련되어서 이제는 진짜 미소처럼 자연스러운 비즈니스 미소를 지어 보이고 가게 안을 둘러봤다.

채 스무 석도 안 되어 보이는 다닥다닥 붙어 있는 테이블과 의자들.

식당 한가운데에 놓인 구형 석유 난로.

이때는 이 석유 난로가 얼마나 유용했는지.

난로 위에 물이 담긴 주전자를 올려놓고 손님들에게 따뜻한 커피나 차를 제공했었다.

어르신들이 특히 좋아했다.

옛날 생각 난다면서.

석유 난로가 내뿜는 특유의 냄새를 느끼며, 주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기구나!”

기억났다.

늘 무를 갖다 놓던 자리.

여기에 놓지 않으면 안 그래도 좁은 가게에 동선이 꼬이니 나와 어머니가 늘 고집했던 그 자리.

무 놓을 자리를 찾고 환호성까지 지르는 나를 어머니는 이상한 눈길로 훑어봤다.

“얘가 진짜 오늘 왜 이래…… 얼른 다른 재료들도 빨리 옮겨.”

“네, 어머니!”

“…어머니?”

고종숙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어머니’ 소리에 하던 일도 멈춘 채 선우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왜요?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요? 아…… 아까 고춧가루 실을 때 고춧가루가 얼굴에 묻었나?”

헤헤헤.

나는 얼굴을 대충 손으로 훔친 후 어머니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비즈니스 미소가 아닌 진짜 웃음을…….

이 웃음은 지난 며칠간 나를 괴롭혔던 공허함이 사라지면서 나오게 된 찐웃음이다.

어머니의 잔소리를 듣고, 어머니와 함께 시장을 보고, 깍두기 담글 준비를 하고.

이런 너무나도 사소한 일들이 가슴에 뚫렸던 허한 구멍을 메워 주었다.

진심으로 기쁘니 웃음이 안 나올 리 없다.

물론, 눈앞에 있는 고종숙 여사는 심히 당황한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시장에서 봐온 재료를 전부 안으로 들인 나는 본격적인 깍두기 만들기에 돌입했다.

“어머니. 먼저 무부터 씻을게요. 제가 씻어서 여기 올려놓을 테니까 가져가서 하나씩 썰어 주세요. 아시죠? 사방 3cm 정도로 써는 거?”

“응? 아, 뭐. 알지, 당연히.”

고종숙은 오늘따라 아들 선우의 얼굴을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쟤가 왜 이렇게 적극적이지?’

선우 아빠가 허리 디스크로 몸져누운 후, 울며 겨자먹기로 도움을 요청한 게 아들 선우였다.

나쁜 애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직 철이 덜 든 녀석은 남편의 5분의 1만큼의 몫도 해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사람을 쓰자니 인건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물론, 휴학까지 시키고 선우를 장사에 끌어들인 데에는 엄마로서 너무나 미안함이 컸다.

하지만, 어쩌랴.

그렇게라도 안 하면 세 가족이 굶어 죽게 생겼는데.

사정을 아는 선우가 대놓고 거절은 안 했지만, 그간 녀석이 하는 일이 못 미더웠던 게 사실이다.

근데, 오늘은…….

‘평소와는 너무 다른데?’

너무나도 바뀐 아들의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물론, 좋은 쪽으로.

“자, 무는 다 씻었습니다.”

“버, 벌써?”

“이거 씻는데 뭐 그리 오래 걸린다고요. 아니, 무를 그것밖에 못 썰었어요? 에헤이. 이렇게 느려서야 원. 이래 가지고 장사하겠어요? 언제 무 다 썰고, 언제 밀가루 풀 만들고, 언제 양념 만들어서 무치려고요?”

“…….”

나는 아까 어머니에게 먹은 핀잔에 사소한 복수를 했다.

선우 푸드를 운영하며 입에 밴 꼰대 마인드가 그대로 반영된 잔소리다.

바구니에서 무를 하나 꺼내 도마에 올려놓는다.

장정의 종아리만큼 튼실한 무가 도마 하나를 꽉 채운다.

‘칼질은 좀 오랜만이긴 한데…….’

식당 장사에서 손을 놓고, 경영자로 변신하면서 현장이랑은 다소 거리가 멀어졌던 게 사실이다.

자연히 칼질을 직접 할 일도 없었고.

요리 방송 출연할 때나 직접 칼을 쥐고 써는 정도였다.

첫 무는 천천히 시작했다.

앞과 뒤의 꽁지를 잘라 내고, 무 몸통에 있는 잔털을 제거한다.

무를 세로로 길게 여러 번 자르고, 사방 3cm 깍둑 모양으로 썬다.

너무 알이 크면 절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한입에 먹기도 불편하다.

반대로 너무 알이 작으면 절이는 건 금방이지만, 깍두기를 씹었을 때 특유의 아삭거리는 식감을 느끼기 힘들다.

커다란 중식도가 없는 게 아쉽지만, 그런대로 부엌칼을 가지고 무를 썰어 갔다.

무 썰기가 이렇게 재미있었나?

오랜만에 하는 거여서 그런지 무를 써는 재미가 정말 쏠쏠했다.

특히 무가 썰리면서 칼에 도마가 닿을 때 나는 딱딱- 소리가 그렇게 경쾌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고종숙 여사는 오늘 아들을 보면서 놀란 것 중 지금 이 장면이 가장 경악스러웠다.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선우는 서빙 일은 곧잘 했지만, 음식을 만드는 데에는 재능이 없었다.

물론, 관심도 없었다.

특히 한 달에 한 번 깍두기를 담그는 날에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겨우겨우 일하러 나왔다.

짜증이 가득 담겨 있는 얼굴에 커다란 무를 던져 버리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깍두기를 담그는 날은 다른 사람을 쓰고 싶은 욕구가 폭발하는 날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녀석을 보라.

마치 기계처럼, 마치 일류 요리사처럼 정확하고 간결한 리듬으로 무를 썰고 있는 녀석을…….

심지어 녀석의 표정을 보라.

웃고 있다.

그것도 아주 환하게.

무를 써는 단순한 노동이 재미있어 죽겠기라도 한 것처럼 실실 웃고 있다.

미친놈처럼 말이다.

고종숙은 선우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리저리 몸을 옮겨 여러 각도에서 바라봤다.

이게 꿈인가 싶어 제 얼굴도 꼬집어 보았다.

‘분명 꿈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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