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감자탕, 왜 이제야 한 거야? (1)
이철민은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힘겨운 걸음을 내디뎠다.
자꾸 허리가 굽어지고, 찌릿찌릿 울려 왔다.
한 발 한 발 내딛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5분, 10분 시간이 지나고 몸에서도 땀이 나기 시작하자 걷는 게 확연히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오, 확실히 다르네.’
이철민은 오른쪽에서 자신을 부축하며 걷고 있는 선우의 얼굴을 힐끗 바라봤다.
언제 이놈이 이런 복덩이가 다 됐지?
불과 이틀만에 이놈에게 신의 기적이라도 내린 건가?
힘든 와중에서도 자신의 양쪽을 든든히 받쳐 주고 있는 두 사람의 존재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아, 씨 또 뜨거워지네.’
어제에 이어 이철민의 눈시울이 다시 한번 뜨거워졌다.
* * *
아버지와의 산책을 마치니,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새벽부터 시작된 일과의 피로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이게 스물다섯 살의 몸이라 건강해서 그런 건지, 마음이 가벼워져서 피곤도 못 느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뭐, 좋은 거니까 된 거지. 그나저나…… 생각보다 더 추운데?”
눈이 그치고 난 후 예보된 추위.
어머니와는 내일 메뉴로 김치찌개를 하기로 합의했지만, 뭔가 2% 부족했다.
물론, 고종숙 여사가 담근 맛있는 김치로 끓인 김치찌개는, 어머니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선우네 백반의 인기 메뉴였다.
하지만, 영하 10도를 밑도는 강추위에는 왠지 부족해 보이는 느낌.
잠시 고민하던 나는 휴대폰을 켜서 전화를 걸었다.
“최덕호 사장님. 선우네 백반입니다.”
- 어, 선우니? 이 시간에 웬일이야?
“아직 안 주무셨죠?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 아, 아니야. 말해.
“원래 저희 가게 내일 식자재 배달할 거 없으시죠?”
- 응, 내일은 배달이 없는 날인데 왜?
“갑자기 요청드려서 죄송한데, 내일 돼지 등뼈 좀 새벽에 가져다주실 수 있나 해서요.”
- 돼지 등뼈? 음…… 뭐, 안 될 건 없지.
최덕호 사장은 원래 정육 쪽으로 오랜 기간 일을 해 온 사람이다.
현재도 아내는 정육점을 계속 운영하고 있다.
따라서, 다른 식재료는 몰라도 정육 식재료 쪽은 언제든지 급하게 수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오, 감사해요. 40킬로그램 정도 가능할까요?”
10인분에 들어가는 등뼈가 대략 4킬로니까.
40킬로면 약 100인분에 해당하는 양이다.
평소 드나드는 손님에 비하면 너무 많은 양이지만, 남는 게 모자라는 것보다는 낫다.
당장은 선우네 백반을 운영하며 이익을 남기겠다는 생각은 해서는 안 된다.
가게를 널리 알려서 단골손님을 최대한 많이 확보해야 하니까.
열 명의 손님을 받아 만 원을 남기는 장사가 아니라, 똑같이 만 원을 남기더라도 백 명의 손님을 받아야 하는 단계라는 말이다.
- 40킬로그램? 음…… 좀 많은 양이긴 한데…… 내가 어떻게든 구해서 가져가 보마. 같이 일하는 사람들한테 말하면 되니까.
“사장님, 감사합니다!”
- 감사는 무슨…… 그냥 지금처럼 그렇게 열심히만 해. 오늘 아침에도 일찍 나와서 일하는 모습 보니까 내 기분이 너무 좋더라. 어머니도 많이 좋아하시지?
“네, 그럼요.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참, 감자도 한 박스 부탁드릴게요.”
- 감자? 오케이! 내일 새벽에 선우네를 첫 번째로 들를게.
“네! 새벽에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워드 프로그램을 켜고 오늘 만들었던 직화 제육볶음 레시피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전생에서 장사를 하며 느낀 건, 요리를 할 때 중요한 건 내 손맛이나 감이 아니라 철저한 계량과 레시피에 따르는 정확한 조리법이라는 것.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늘 꾸준한 맛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언제 다시 찾아와도 기대했던 그 맛을 맛볼 수 있도록 말이다.
* * *
영훈대학교 외식경영학과 과실.
내일 있을 전공 과목 시험을 앞두고 여러 명의 학생이 모여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야, 혹시 배고픈 사람?”
입을 연 학생의 이름은 안대훈.
아침에 여자친구와 함께 선우네 백반을 방문했던 그 학생이다.
“나, 나, 나!”
안대훈의 말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은 그의 옆에 있던 여자친구 이수민.
이어서 줄줄이 학생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도 좀 출출하네.”
“외식경영학과 학생들답게 좀 신박한 아이디어 좀 내 봐.”
“족발 같은 거 시켜 먹을까?”
“야, 너 또 소주 먹으려고 그러지?”
“내가 무슨 알코올 중독이냐?”
“그런 거 말고 좀 매콤하고, 고소하고, 배도 차고, 가격도 싼 뭐 그런 음식 없나?”
한 여학생의 말에 이수민의 머릿속에 떠오른 음식.
그건 바로 아침에 선우네 백반에서 먹었던 직화 제육볶음이었다.
“아…… 내가 딱 그런 음식을 오늘 아침에 먹고 왔는데…… 아, 또 생각나네…….”
“뭔데? 우리 학교 근처에 그렇게 맛있는 데가 있다고?”
“그렇더라니까. 나도 깜짝 놀랐어. 먹을 데 없어서 그냥 들어간 건데 밥 두 공기나 비우고 왔어.”
“그래? 대훈 오빠도 같이 갔어요?”
“응. 근데 진짜…… 완전 인생 제육볶음이었어. 아…… 생각하니까 또 군침 도네.”
“우리 지금 그거 먹으면 안 돼?”
“야, 백반집이 무슨 이 시간까지 영업을 하냐?”
“아…… 그렇네.”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꼭 가 봐. 거기 완전 맛있어졌어. 다들 깜짝 놀랄 거다.”
“맞아. 그 주인집 아들인가 하는 사람도 몰라보게 달라졌던데? 키 크고 반반하게 생겨 가지고는 매일 인상이나 팍팍 쓰고 있더니…… 오늘은 뭐 완전 다른 사람 같더라고.”
영훈대학교로 날아간 제비가 활동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 * *
새벽 네 시.
가게에 도착해 석유 난로를 켠다.
오늘은 날씨가 더 추우니, 어제보다 더 가게를 따뜻하게 해 놓아야 한다.
이것저것 준비를 하고 있는데 바깥에서 트럭 엔진 소리가 들린다.
“물건 왔어요!”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 최덕호 사장이 쿵- 하고 박스를 내려놓는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자, 인사는 나중에 하고 물건부터 확인해 봐.”
“네!”
최 사장이 내려놓은 박스를 열어 돼지 등뼈의 상태를 확인한다.
육색은 선홍색에 가깝고, 이 정도면 탄력도 괜찮다.
등뼈 하나를 꺼내어 뼈 부분을 자세히 살펴본다.
뼈에 피가 많이 붙어 있거나 핏빛이 검은색을 띠는 등뼈는 절대 사면 안 된다.
돼지 등뼈의 잡내는 뼈에 남은 피에서 비롯되니까.
재료가 신선하지 않으면, 아무리 양념을 잘 써도 깊은 맛을 낼 수가 없다.
최덕호 사장이 가져온 등뼈는 피 색깔도 좋고, 살도 많이 붙어 있다.
이 정도면 합격이다.
최 사장은 신기한 듯이 선우를 바라보았다.
“참, 아무리 봐도 신기하단 말이야.”
“오늘도 그러시네. 앞으로 이런 모습 지겹게 볼 거니까 신기해하실 것 없어요.”
“제발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어제 너희 엄마랑 통화하는데 아주 목소리가 달라졌더라고.”
“네, 어머니 목소리도 앞으로 계속 그렇게 밝을 겁니다. 고기는 합격이네요, 사장님.”
“합격이야? 허허. 그래, 이게 맞는 거지. 사장이 이렇게 꼼꼼하게 식재료를 보는 게 맞는 거야.”
“저 아직 사장 아닌데요. 헤헤.”
“에이, 이 정도면 이제 사장이지.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모르겠지만, 선우 네 모습에서 성공의 기운이 아주 팍팍 느껴진다.”
“그렇다면 아주 잘 보셨습니다! 자, 여기 믹스커피 한 잔 드시고요.”
“그래, 고맙다! 오늘은 나도 들를 거래처가 많아서 이만 가 보마. 커피 잘 마실게.”
“네, 사장님. 다음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돼지 등뼈는 한 번 삶은 후 잘 씻는다.
뼈에 붙은 피와 잔뼈들을 깔끔하게 제거해 줘야 한다.
그런 것들이 바로 잡내의 주범이니까.
씻어 놓은 등뼈를 커다란 솥에 옮기고, 충분히 물을 넣는다.
된장을 풀어 넣고, 양파, 대파, 청양고추, 깻잎 등의 재료들을 손질한다.
어느 정도 고기가 삶아지면, 4등분으로 썰어 놓은 감자를 먼저 넣는다.
고춧가루, 고추장, 간 마늘과 마법의 가루 MSG를 넣고 계속 끓인다.
양파, 대파를 넣고 20분 정도 끓여 주면 완성이다.
깻잎, 청양고추는 손님 상에 나갈 때 따로 끓이면서 같이 넣을 생각이다.
“감자탕은 이제 끓이기만 하면 되고…… 이제 소스를 만들어 볼까?”
감자탕 고기에 찍어 먹을 겨자 소스.
이게 없으면 또 감자탕이 감자탕 같이 안 느껴진다.
작은 부분이지만, 이 소스 하나의 디테일이 훨씬 전문성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준다.
백반집에서 먹는 감자탕이 아니라 진짜 전문점에서 먹는 감자탕의 느낌을 말이다.
볼(Bowl)에 진간장, 물, 식초, 설탕, 연겨자를 넣고 잘 섞어서 준비해 준다.
소스 준비까지 마치니 문을 열고 고종숙 여사가 등장한다.
“선우야, 미안해서 어쩌냐. 오늘도 늦잠을 자 버렸네. 네 덕분에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가……··.”
“아니에요, 엄마. 어차피 오늘은 준비할 거 별로 없다고 천천히 나오시기로 하셨잖아요.”
“그래도…… 어랏, 근데 이게 무슨 냄새야? 이거 혹시…… 감자탕 냄새 아니니? 오늘 우리 김치찌개 하기로 했잖아?”
“아, 미리 말씀 못 드렸네요! 제가 어제 자기 전에 생각을 해 보니까 오늘같이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는 김치찌개보다는 감자탕이 더 나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한번 해봤어요.”
“감자탕을? 아니, 그게 그렇게 쉽게 맛을 낼 수 있는 요리가 아닌데…….”
고종숙 여사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진다.
“그럼 일단 맛 한번 보실래요?”
“그럼, 당연히 그래야지. 지금 다 된 거니?”
고종숙은 반신반의하며 주방으로 발길을 향했다.
제육볶음은 초심자도 어찌어찌 맛을 낼 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감자탕은 아니다.
본인도 여러 번 특별 메뉴로 감자탕을 시도했다가 맛이 안 나서 포기하지 않았던가.
‘아마 잡내 잡는 것부터 쉽지 않았을 거야.’
돼지 등뼈의 잡내를 잡지 못하면, 감자탕은 시작부터 완전 실패다.
냄새나는 고기를 오래 끓여 봐야, 그 냄새만 더 지독해질 뿐이다.
‘안 되면 버려야지 뭐. 김치찌개는 금방 할 수 있으니까.’
고종숙은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었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 아들에게 뭐라 말은 하지 못하겠지만, 음식점에서 요리가 맛없는 건 어느 누구도 용서해 주지 않는다.
괜히 특별 메뉴라고 손님에게 내었다가 역효과만 더 크게 날 수가 있으니까.
고종숙이 기다리는 사이 선우가 뚝배기에 1인분의 감자탕을 끓여 내왔다.
“앉아서 기다리시지 왜 서 계셨어요?”
“아들이 한 요리를 빨리 맛보고 싶어서 그랬지.”
어머니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마음을 감추려고 했지만, 대충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보였다.
불안하시겠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상관없다.
어차피 저 불신의 마음은 감자탕 국물을 한술 뜨는 순간, 180도 바뀔 테니까.
“그래도 여기 앉아서 드세요.”
어머니를 억지로 테이블로 끌고 가 자리에 앉혔다.
방금 한 밥을 한 그릇 퍼 드리고, 겨자 소스와 함께 고추, 양파 등 곁들여 먹을 채소도 깨끗이 씻어 내놓았다.
어머니는 자리에 앉자마자 헐레벌떡 감자탕 뚝배기에 숟가락을 가져갔다.
첫 국물을 맛본 어머니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예상과 다르게 너무 맛있어서 저러시나?
어머니가 다시 한번 국물을 맛본다.
이번에는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떠오른다.
한 번 더 먹어 보니까 확실히 맛있어서 저러시는 것 같은데?
세 번째부터는 표정으로도 입으로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다.
그저 묵묵히 국물을 마시고, 등뼈에 달라붙은 고기를 뜯고, 감자를 으깨어 국물과 함께 비벼 드신다.
중간중간 고추를 깨무는 아삭- 소리가 고요한 선우네 백반에 울려 퍼진다.
그렇게 10분.
어머니의 뚝배기에 담겨 있던 등뼈 두 조각은 앙상한 뼈다귀만 남기고 전사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고종숙 여사의 오른손 엄지가 천천히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