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가족 나들이는 시장으로
짜장라면을 끓일 때 가장 애매한 부분이 바로 물을 버릴 때다.
나의 경우 약간의 물기가 있는 상태에서 부드럽게 비벼 먹는 편을 선호하는데, 얼마나 물을 남겨야 할지 늘 고민하게 되니까.
그러던 어느 날, 벼락같이 어떤 방법이 내 머릿속을 강타했다.
먼저 그릇을 준비한다.
설거지를 줄이기 위해서라면, 어차피 덜어 먹을 때 쓰게 될 그릇을 활용하는 걸 추천한다.
그릇에 끓고 있는 면수(?)를 한 국자 퍼낸다.
찰랑찰랑하게 차오른 면수에 분말 스프를 집어넣는다.
보통 짜장라면에 추가되는 오일은 이때 넣어도 되고, 나중에 면을 비빌 때 넣어도 된다.
스프와 물을 잘 섞는다.
이때 매운맛을 원할 경우 청양고추를 썰어서 넣어 줘도 된다.
오늘은 매운맛을 안 좋아하는 아버지를 위해 청양고추는 생략한다.
면이 잘 익으면, 냄비에 있던 국물은 아낌없이 다 버려 준다.
쏟아지는 국물의 해일 속에서 건더기를 잘 지켜 낼 수 있다면, 체를 이용하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그럴 자신이 없다면 체를 이용하는 걸 추천한다.
그렇게 남은 면을 다시 냄비에 집어넣고, 이번에는 아까의 스프 물(?)을 면과 섞어 잘 비벼 준다.
짜장 양념에 소외되는 면이 없도록, 흰 부분이 보이지 않도록 잘 섞어 주면 된다.
대접에 일 인분씩 잘 담고, 계란프라이도 올려준다.
고춧가루와 채 썬 오이는 선택 사항.
일요일의 요리, 짜장라면의 완성이다.
오늘 비법의 핵심은 이거다.
국물을 얼마나 남겨야 할지 걱정할 필요 없이, 과감하게 버릴 수 있다는 것.
물론, 애초에 빡빡한 짜장라면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이 비법은 무용지물이다.
“아버지, 어머니! 라면 다 됐어요.”
두 분은 부스스한 얼굴로 나란히 방에서 나오셨다.
“선우야. 피곤할 텐데 늦잠 좀 자지 그랬니?”
“전 괜찮아요. 잘 주무셨어요?”
“우리야 잘 잤지. 아함.”
어머니가 기지개를 켜며 아버지의 몸을 껴안는다.
두 분…… 요새 부쩍 사이가 좋아지셨다.
원래 시장 내에서도 사이좋기로 유명한 부부이지만, 아버지가 앓아누운 이후로 알게 모르게 두 분 사이가 소원해졌던 것도 사실이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폭 안긴 모습을 나는 뿌듯하게 바라본다.
바라던 일요일 풍경이다.
따뜻한 초봄의 햇살처럼 우리의 마음도 따뜻해지는 그런 아침.
“오…… 국물이 자박자박한 게 딱 내 스타일이네?”
“부드럽게 후루룩 넘어가는 게 진짜 좋다.”
두 분은 내 나름의 비법으로 만든 짜장라면을 맛있게 드셔 주었다.
오이를 별로 안 좋아하시는 아버지 대신 어머니의 짜장라면에는 채 썬 오이가 수북했다.
계란을 별로 안 좋아하는 어머니 대신 아버지의 그릇에는 계란프라이가 두 개 올려져 있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취향이 같은 사람끼리 사는 게 아니라, 취향이 달라도 서로 맞춰 줄 수 있는 사람끼리 사는 거라는 생각.
오늘은 두 분을 모시고, 재미있는 곳에 다녀올 생각이다.
봄- 하면 생각나는 식재료도 사오고, 바람도 쐬고, 맛있는 것도 먹고.
가족 나들이의 날이다.
* * *
구형 SUV를 몰고 우리 가족이 도착한 곳은 바로 인천 소래포구에 있는 수산 시장이다.
내가 돌아오기 전 살던 시점에 이곳은 현대화 사업이 진행되어 깔끔한 모습이었다.
물론, 난 그것보다 지금의 이 모습이 좋다.
좌판에 각종 해산물을 늘어놓고 파는 시장 상인들.
그 사이사이를 요리조리 지나다니는 재미.
바닥에 흥건한 물이 신발에 튀고, 옷에 튀고.
사람들과 부딪히기도 하고, 너무 복잡하여 일행을 잠시 잃기도 하는.
그런 전통시장의 맛.
그 맛이 아직 여기에 살아 있었다.
“꽃게 좋아 보인다. 저거 암꽃게지, 여보?”
“그러네. 요새 철이잖아. 알이 아주 꽉꽉 들어찼겠다. 선우야. 꽃게 좀 사다가 쪄 먹을까?”
“좋죠. 근데, 먼저 장사 때 쓸 식재료 좀 살까요, 우리?”
“아…… 그럴까?”
“아이고. 우리가 너무 신나서 애들처럼 아무 생각도 없이 돌아다녔네. 호호호.”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이들처럼 신나 했다.
그러고 보니…… 식당을 하시면서 두 분 참, 여유 없게 사셨다.
일요일을 정기 휴일로 만든 것도 내가 돌아오고 나서부터였다.
장사가 잘 안되니 하루 쉬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그렇게 쉬지도 못하고 일을 하니 몸에는 피로가 쌓여 갔다.
어쩌면 아버지의 허리 디스크는 그래서 생긴 건지도 몰랐다.
그래서는 안 된다.
식당을 하는 사람은 건강해야 한다.
그래야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도 있고, 그래야 손님 앞에서 웃을 수도 있다.
이런 걸 워라밸이라고 하지.
일과 삶의 균형.
두 분에게 반드시 필요했던 거였다.
주꾸미.
딱 요즘이 제철인 이 녀석이 오늘의 타깃이다.
주꾸미 중에서도 이 시기에 알을 배는 암놈은 속된 말로 ‘알배기’라고 하는데, 이놈을 찾아야 한다.
이때 주꾸미를 파는 상인들에게 물어보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버지는 돌아다니면서 상인들에게 ‘이거 국산 맞아요?’, ‘이거 알 꽉 차 있어요?’라고 물어보시는데…….
누가 사실대로 말해 줄까?
이곳 소래포구는 ‘바가지’로 악명이 높다.
속임수와 바가지 씌우기가 판을 치는 거친 곳이 바로 이곳이라는 말이다.
저런 순둥순둥한 얼굴로 물어봐야 돌아오는 대답은 다 똑같다.
- 오늘 아침에 우리 바깥사람이 잡아 온 국내산이야!
- 당연하지. 딱 보기에도 꽉 차 보이잖아. 싸게 줄게!
이런 상인들의 말에 속으면 안 되는 건 당연한 거고.
결국 내가 좋은 주꾸미를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나는 지난 생에 주꾸미집을 운영했던 기억을 되살려 주꾸미들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그러던 와중에 눈에 딱 들어오는 좌판이 있었다.
아주머니는 누가 사든지 말든지 관심도 없다는 듯이 내가 가까이 다가가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주꾸미가 가득 든 고무 대야를 살핀다.
“아주머니. 물건 좀 봐도 되죠?”
“…….”
아주머니는 말도 없이 대충 고개를 끄덕인다.
알아서 하라는 뜻.
바가지를 들고 주꾸미를 퍼 올린다.
한 마리를 집어 들고 샅샅이 살핀다.
“음…… 머리에 상처도 별로 없고…… 색깔도 거무튀튀한 게…… 이거 국내산이네.”
“선우야. 이 거무튀튀한 게 국내산이라고? 크기도 너무 큰데? 중국산이 크기도 더 크고 색깔도 안 좋다고 하던데…….”
아이고, 아버지.
완전히 잘못 알고 계시는구나.
“아버지. 국내산이랑 중국산은 그렇게 구분하는 게 아니에요.”
“아니라고? 그럼 어떻게 구분하는 거냐?”
“음…… 첫째, 이 머리를 잘 살펴봐야 해요.”
“머리?”
“네. 중국산은 ‘소랑패기’라는 어획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머리에 상처가 많이 생겨요.”
“소랑패기?”
“네. 소라껍데기를 바닥에 내려서 알을 밴 암놈이 산란을 위한 안식처로 생각하도록 유인해서 잡는 방법이에요.”
“오…… 근데 머리에 상처는 왜 생기는 거야?”
“소라 껍데기에서 머리를 쿡 찔러서 빼내기 때문이죠.”
쿡 찌르는 시늉을 하자, 어머니가 살짝 인상을 썼다.
“오…… 그다음은?”
“다음으로는 이 색깔. 거무튀튀하고 짙을수록 싱싱한 국내산입니다. 검은색을 띠는 이유는 주꾸미가 보호색을 발산하기 때문인데요.”
“보호색이라…….”
“네. 중국에서 잡아온 놈들은 아무래도 시간이 더 오래 소요됐기 때문에 보호색을 발산할 힘을 다 잃어요. 이미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상태이기 때문에.”
“반면, 국내산은 잡힌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보호색을 충분히 발현할 수 있는 거고?”
“정답입니다. 그리고, 크기는 중국산이냐 국내산이냐에 따라 갈리지는 않아요. 무조건 크다고 중국산은 아니라는 거죠.”
“오…… 그렇구나.”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잠자코 보고 있던 좌판 아주머니가 입을 열었다.
“젊은 친구가 제법이네?”
아주머니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주머니. 제 말이 다 맞죠?”
“응, 다 맞아. 아들 참 잘 두셨네. 이런 아들 데리고 다니면, 속아서 물건 사는 일은 없겠어.”
“하하하. 저희 아들이 좀 똑똑하긴 하죠. 하하하. 저를 닮아서.”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런 건 아빠가 아니라 엄마를 닮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호호호.”
“여보. 자꾸 선우가 당신 닮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당신이야말로 선우가 당신을 닮았다고 착각하는 것 같은데…….”
요즘 두 분 사이에 가장 큰 이슈.
이선우는 과연 누구를 닮았는가.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그 이슈가 여기서도 튀어나왔다.
다행히 아주머니가 중재를 해줬다.
“아, 주꾸미도 암놈 숫놈이 만나야 이렇게 커다란 알을 배는데 두 사람이 그렇게 싸워서 뭐 할 거야? 그냥 반반씩 닮은 걸로 하소. 싸게 줄 테니까. 몇 킬로나 살 거야?”
여전히 논쟁 중인 두 분을 뒤로하고,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한 이십 킬로 정도 사려고요.”
“이십 킬로? 세 식구 먹는데 뭘 그렇게 많이 사?”
“사실 저희가 동네에서 장사를 하거든요. 내일 메뉴로 주꾸미를 좀 내볼까 싶어서요.”
“아, 그래? 아이고…… 그럼 아들이 부모님 장사도 도와주고 있는 거야? 세상에 어찌 이런 아들이 다 있나…… 알 잘 밴 놈으로 골라 줘야겠구먼. 잠깐 기다려.”
말을 마친 아주머니가 안쪽의 가게로 들어가셨다.
잠시 후 나온 아주머니의 손에는 스티로폼 박스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자, 받아. 이거…… 우리 자식들 보내 주려고 따로 빼놓은 거야. 알 가득 밴 놈이라 가격으로 치면 보통 주꾸미 가격 두 배는 받아야 돼. 그냥 원래 가격으로 줄 테니까 가져가.”
“어, 아주머니…… 자식들 주려고 남겨 놓은 건데 저희한테 주셔도 되는 거예요?”
“자네가 너무 예뻐서 그래. 식구끼리 먹을 것도 아니고, 사람들한테 팔 거라며. 좋은 놈으로 팔아야지.”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그래. 다른 건 뭐 필요한 거 없어? 나도 여기서 장사하지만, 여기 사람들 백이면 구십구는 못 믿을 놈이야. 특히 외지인들한테는 더 심하고. 웬만하면 여기서 다 사 가. 난 사기 같은 건 안 치니까.”
“아주머니. 그럼 여기 꽃게도 있나요?”
“꽃게? 있지. 꽃게도 팔게?”
“아니요. 아버지가 좋아하셔서 여기서 쪄 먹고 가려고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쪽에서 여전히 논쟁 중이셨다.
- 선우 키만 봐도 나를 닮았다는 걸 알 수 있잖아. 당신은 평균 이하이고.
- 키만 닮은 거지. 얼굴은 완전 나를 빼닮았잖아요. 머리도 그렇고.
- 머리? 하하하. 머리야말로 나를 닮았다니까. 저 숱 많은 것 좀 보라고.
- 누가 머리숱 닮았대요? 머리 안이요. 뇌. 뇌가 나를 닮았다니까요. 선우는.
“쯧쯧쯧. 이 집은 자네가 가장이구먼. 좋은 놈으로 골라 줄 테니까. 이 집으로 가서 먹고 가.”
아주머니는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진리식당.
“내 조카가 하는 데인데, 여기서 왔다고 하면 잘해 줄 거야. 내가 전화 한 통 넣어 줄게.”
“앗,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그래. 맛있게 먹고 가. 아, 두 마리 정도는 탕으로 해 달라고 해. 내 조카가 꽃게탕 하나는 진짜 잘 끓여.”
“네, 그렇게 할게요.”
“그래. 다음에 또 와. 아니다. 머니까 이 명함 가져가서 필요한 거 있으면 전화 줘. 택배로 보내 줄 테니까.”
진실수산.
아주머니의 가게 상호명이었다.
진실수산, 진리식당.
혹시 신실한 종교인이신가?
아니면, 진실한 물건만 팔겠다는 아주머니의 다짐이 담긴 그런 이름?
괜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여전히 논쟁 중인 두 분을 모시고, 시장 안쪽에 있는 진리식당으로 향했다.
말씀을 많이 하셨으니, 두 분 다 시장하실 거다.
곧 맛보게 될 꽃게를 떠올리니 내 입에도 자연스럽게 군침이 돌았다.
아,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