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행복 식당-44화 (44/110)

#44화 전통과 고집 사이 (2)

‘뉴트로’

레트로(Retro)와 ‘New’가 결합된 말이다.

이름에서 느낄 수 있듯이, 조금 지난 것이나 옛날 것들이 이제 와서 다시 유행하는 현상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 곧 이 뉴트로 열풍이 불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김명장 베이커리처럼 옛 분위기를 갖고 있는 빵집들도 다시 조명받기 시작한다.

지방에는 오랜 전통을 이어온 빵집들이 뉴트로 열풍을 타고 기업화가 될 정도로 크기도 한다.

“파티시에님. 오늘 제가 만든 메뉴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어머니와 다르게 꼬박꼬박 그를 파티시에라고 불러 준다.

“음…… 사실 처음에는 좀 당황스러웠지. 가지면 가지, 된장이면 된장. 우린 이렇게 단순한 게 익숙하거든. 허허.”

“맞아요. 아무래도 경험하지 못하셨던 음식이니 처음에는 좀 당황스러우셨을 거예요. 근데, 맛은 어떠셨어요?”

“맛? 좋았지! 전체적으로는 볶은 된장 맛이 고소하게 나는 게 훌륭했고, 폭 익은 가지 맛도 아주 좋았고. 아! 뭔지는 모르겠는데 뭔가가 살짝 쳐주는 맛이 있더라고. 설명하자면…… 매운 된장이라고나 할까? 그 맛도 괜찮았어.”

음…… 요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빵을 만드는 사람이라 맛 표현이 수준급이다.

“탁 쳐주는 그 맛. 혹시 그게 뭔지 아세요?”

김명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반장 소스라고 하는 겁니다. 표현하신 대로 매운 된장 소스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아…… 그럼 그게 우리나라 소스가 아니라…….”

“중국 소스죠. 그러니 가지된장덮밥은 한식과 중식의 퓨전 음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 퓨전…….”

잘 알고 있다.

김명장이 ‘퓨전’ 같은 단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그는 빵을 만들 때도 고집스러울 정도로 전통 방식을 고수한다.

사람들이 ‘퓨전’이라고 말하는 것들을 그는 ‘아류’라고 생각한다.

전통이 지켜지지 않은 잘못된 것이라고.

“김명장 베이커리의 빵을 먹다 보면, 옛날 생각이 나서 너무 좋아요. 빵 봉지만 봐도 추억이 새록새록 돋아나니까요.”

“…….”

“그런데요, 파티시에님. 지금 어린아이들도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할까요?”

“응?”

“제가 어렸을 때 김명장 베이커리에 갖고 있던 추억을 지금 어린아이들도 가지게 될까요?”

“흐음…… 아마도, 아니겠지. 지금대로라면. 찾아오는 손님도 떨어졌지만, 그 손님들도 대개 어르신들이야. 애들은 얼굴 못 본 지 꽤 됐다.”

“아…… 그렇다면 이거 문제네요.”

“문제?”

“네. 걔들은 김명장 베이커리 대신에 파리 빵집이나 매일 빵집을 추억할 테니까요. 어디에나 있는 흔한 빵집. 같은 메뉴를 갖고 있어서 어떤 지점에서든 대체할 수 있는 그런 빵집. 레시피에 따라 공장에서 만들어져서 누구라도 만들 수 있는 그런 빵을 파는 빵집.”

“…….”

김명장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이런 부분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겠지.

“잘 아시겠지만, 그런 건 추억이 될 수 없잖아요. 기억은 될지 모르지만.”

“추억이 아니라, 기억이라고?”

“네. 김명장 베이커리의 ‘추억’은 저를 과거의 그때로 돌려놔요. 철없었지만, 아름다웠고 순수했던 그때로요.”

“…….”

“하지만, ‘기억’은 그렇지 않죠. 다만, 머리가 기억할 뿐이에요. 아, 파리 빵집에 소보로빵이 있었지. 근데, 매일 빵집의 소보로빵이 좀 더 맛있었던 것 같아. 뭐, 이런 느낌?”

“…….”

“기억에는 감정이 빠져 있는 거죠. 나를 휘익- 하고 감싸 안는 어떤 감정이.”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살지. 추억이 없으면 과거가 없는 인간처럼 헛헛하고.”

“맞아요.”

두 번째 살아 보니까 더 확실하게 알겠더라고요.

추억이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 건지.

그런 추억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게 얼마나 큰 마음의 자산이 되는지.

“그런 아이들을 위한 추억을 만들어 주세요.”

“내가? 후훗.”

김명장이 자조적인 웃음을 날렸다.

“아까도 말했잖아. 추억을 만들어 주려고 해도 찾아오는 아이들이 없다고.”

“아저씨.”

파티시에가 아니라 아저씨다.

어렸을 적 그를 부르던 그 호칭 그대로.

아저씨, 소보로빵 하나 얼마예요?

할 때 그때 부르던 그 느낌으로.

“아이들에게 먼저 다가가려는 노력을 해 보셨나요?”

“뭐?”

순간적으로 발끈하는 듯한 김명장 아저씨.

하지만, 한 번쯤은 그에게 알려 줄 필요가 있다.

“아저씨가 지켜 온 그 방식, 너무 좋죠. 저에게는 추억을 떠올리게 하니까. 하지만…… 지금의 아이들은 벌써 입맛이 달라요. 저희 때와는 접하는 게 다르고, 먹어 왔던 게 달라요. 매체에서 접하는 게 다르고요.”

“…….”

“한 번쯤은…… 그런 것도 생각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저런 아이들에게 제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추억을 선물해 주시려면요. 김명장 베이커리라는 빵집이 있었지…… 하는 기억에 불과한 게 아니라, 진짜 추억이요.”

때마침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우리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김명장은 잠시 동안 그런 아이들을 바라봤다.

“나는 그게 노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통 방식을 지키는 거요?”

“그래. 이스트(Yeast)가 아니라 천연효모를 활용해서 건강한 빵을 만드는 것. 최대한 전통적인 방식을 지켜가면서…… 그런 게 바로 아이들을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했다. 빵을 만드는 사람이 가져야 할 정신이라고 생각했고.”

“네, 맞아요. 그러셔야죠. 앞으로도 계속.”

“응? 방금 전에는 아이들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하라고 하지 않았니.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그런 빵을 만들라는 말 아니었어?”

“네. 그렇다고 해서 파티시에님의 방식을 버릴 필요는 없죠. 전통 방식으로 건강한 빵을 만들되, 새로운 요소들을 조금씩 첨가하시는 겁니다. 가지된장덮밥처럼. 전통적인 된장에 두반장 소스를 살짝 섞는 그런 방식으로요.”

“아…….”

뉴트로 빵집들이 성공했던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그들만의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면서,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한두 가지 요소를 섞었다.

팥빵에 버터를 넣은 앙버터빵이라든가, 원래 있던 소보로빵을 튀겨 낸다던가 하는 식으로.

그들은 유명해지면서 오히려 프랜차이즈 빵집의 트렌드를 선도해 나갔다.

또한, 천연효모종을 사용한 전통 방식의 빵 제조 방식은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각광받는다.

건강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점점 더 높아져 가기 때문이다.

아저씨에게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 아저씨를 믿고 끝까지 해 보세요. 절대 포기하지 마시고.

그러면 언젠가는 그에게 영광의 날이 다시 찾아올 거다.

머지않은 미래에.

단, 퓨전 한식처럼 요즘의 고객들에게 다가서려는 노력도 좀 필요하겠지.

세상은 일방적인 방식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거니까.

* * *

방앗간 황종훈 아저씨와 철물점 장만국 아저씨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둘 사이에는 사이좋게 한 그릇씩 가지된장덮밥이 놓여 있었다.

“자네가 먼저 한 입 혀 봐.”

“왜 나더러 먼저 먹어 보라는 거야?”

“아니, 자네가 같이 먹자고 했으니께 자네가 먼저 먹어 봐야지. 그게 예의 아닌감?”

“에헤이. 그런 게 어딨어? 같이 들어왔으면 같이 먹어 봐야지.”

두 사람은 생소한 메뉴를 앞에 두고 차마 숟가락을 들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진민호가 뚜벅뚜벅 두 사람 쪽으로 다가왔다.

“손님들. 제가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중후한 그의 목소리에 두 사람의 대화가 중단됐다.

진민호는 머릿속으로 선우의 말을 가만히 떠올렸다.

- 혹시 가지된장덮밥을 꺼려하는 분들에게는 이렇게 권해 주세요.

“먼저 덮밥을 한 숟가락씩 떠 보시죠.”

“네?”

“드시는 방법을 좀 알려 드리려 합니다.”

진민호의 진중하면서도 은근히 설득력 있는 목소리에 두 사람은 숟가락을 들었다.

“다음 여기 있는 고추장아찌를 하나씩 올려 보시죠.”

고추장아찌는 먹기 좋은 크기로 어슷하게 썰려 있었다.

“자, 이제 드시면 됩니다.”

두 사람의 숟가락이 천천히 움직였다.

오물오물, 아삭.

중간에 아삭거리는 소리는 고추장아찌가 씹히는 소리.

“음…… 이거 맛있는디?”

“생각보다 되게 익숙한 맛이네. 생긴 게 우리나라 음식같이 안 생겨서 쫄았더니만. 하하.”

“그러게 말이여. 고추장아찌랑 묵어서 그런가?”

“하하. 고추장아찌가 조금 도움이 됐을 수도 있죠. 다음번엔 이 김을 한 번 싸서 드셔 보세요. 한층 감칠맛이 살아날 겁니다.”

두 사람은 진민호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렇게 김에 올린 밥을 먹은 두 사람이 동시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거구먼!”

“이거네!”

더 이상은 진민호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

두 사람의 숟가락이 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그렇게 가지된장덮밥은 성황리에 팔려 나갔다.

황종훈이 다녀간 이후, 손님들이 확 늘었던 건 물론이다.

만나는 상인들마다, 방앗간 손님들마다 가지된장덮밥을 홍보해 주었으니까.

- 가지된장덮밥이라고 알아? 볶음밥보다 더 맛있고, 된장비빔밥보다 더 구수한 그거. 빨리 가서 먹어 봐. 한정 판매래.

한정 판매 같은 건 하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 * *

두릅나무 순은 향이 좋고, 식감이 훌륭한 고급 식재료이다.

특히 산에서 자연적으로 자라난 두릅나무 순은, 그 향이 재배한 그것보다 훨씬 진하고, 식감도 좋다.

3월 말에서 5월까지는 이 두릅나무 순을 수확하기 좋은 계절이다.

두릅이 반찬으로 나온다는 소문이 돌면, 시장 상인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일 것이다.

나조차도 이십 대 때는 이게 무슨 맛이야, 라고 생각했던 그것을 나이가 들수록 스스로 찾아먹을 만큼 맛있어졌으니까.

두릅을 찾아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닿은 곳은 강원도 화천의 깊은 산골 마을.

“이모, 저 왔어요!”

“이게 누구야! 선우야!”

이모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우리를 맞이해 줬다.

산골에 사니 사람이 더 보고파지고, 더 그리워진다는 이모였다.

“야, 너는 언니는 안 보이고 조카가 먼저 보이냐?”

“아이고, 웬 질투? 그럼 언니는 다 늙은 사람이 좋겠수, 선우처럼 팽팽한 젊은 애가 좋겠수?”

“하이고, 말은 잘하지.”

“처제! 이거 참 실망이네. 나도 늙었다고 쳐다도 안 보는 거야?”

“형부는 또 왜 이러실까? 제가 큰절이라도 올릴깝쇼?”

이모는 두 손을 포개어 이마에 올리고 절을 하는 척했다.

“에헤이. 그냥 하는 말이지! 하하하. 너무 반갑다. 한 일 년 만인가?”

“형부 그렇게 쓰러지고 못 봤으니까…… 그쯤 됐겠네요. 이렇게 건강해져서 다시 뵈니까 너무 좋네요!”

“나도! 하하하.”

나름 시끌벅적하고 감격적인 상봉 인사가 끝났다.

이모는 이모부와 이혼을 한 후, 이 산골에 혼자 들어와 살고 있다.

처음엔 외가댁 가족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여자 혼자 산골에 들어가 살다가 큰일을 당한다는 둥, 전기도 잘 안 들어오는 데 가서 살다가 아프기라도 하면 어쩌냐는 둥…….

하지만, 이모는 그런 걱정들을 모두 불식시키며 이렇게 건강하게 혼자서 잘 살아가고 있다.

어머니의 여섯 형제 자매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모가 바로 이 고미숙 이모다.

꾸밈없고 순수한 모습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이모를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가벼워진다.

산골에 혼자 산 이후로 이모는 더 행복해 보인다.

무엇보다 도시에서 살 때의 그 찌든 때가 다 벗겨진 것 같다.

“자, 먼저 밥부터 먹자고요.”

이모는 나무로 만든 커다란 야외 테이블에 한 상 가득 밥을 차려 놓았다.

“와…….”

어머니와 아버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릅나무 순, 엄나무 순, 미나리, 냉이, 쑥 등 봄나물로 만들어진 반찬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기 때문.

“나물로 한 상 차려 봤는데, 두 어르신들은 좋아할 테고, 선우도 이런 거 좋아하니?”

“그럼요. 전 아무거나 안 가리고 잘 먹습니다.”

사실은…… 매우 좋아합니다.

내 안의 40대 아재가 몸으로 이 맛을 기억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 익어 가는 단백질 냄새는 뭐지?

그때 내 눈에 띈 커다란 드럼통.

반이 잘린 그 드럼통 위에 올려져 있는 석쇠.

그리고 그 위에는…….

“나물만 먹으면 서운하니까 삼겹살도 좀 굽고 있어. 읍내 정육점에서 두툼하게 썰어 온 거. 조금만 기다려. 다 익어 가니까.”

와…… 내가 이래서 이모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니까.

츄릅.

입안에 군침이 가득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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