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행복 식당-50화 (50/110)

#50화 김밥 3종 세트 (2)

돈가스 김밥은 다채로운 맛의 향연이었다.

일반 김밥에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재료의 맛과 함께 느껴지는 폭발적인 돈가스의 맛.

역시 튀김은 세다.

고기로 만든 튀김은 더 세다.

물론, 그 센 돈가스가 다른 재료의 맛을 해치는 건 결코 아니었다.

마치 삼겹살을 쌈 싸 먹는 것 같은 기분이다.

여기서 삼겹살은 돈가스고, 나머지 재료들은 쌈에 넣는 부재료들.

쌈 같은 김밥은 푸짐하고, 다채로웠다.

그리고, 이 디핑 소스.

돈가스 소스와 마요네즈를 섞은 듯한 이 소스의 비율이 정말 훌륭했다.

거기에 청양고추를 넣은 건 신의 한 수였다.

약간의 느끼함을 완벽하게 잡아줬으니까.

다시 어묵국 한입과 단무지 한 조각을 집어 먹고 입을 리셋한다.

자, 다음.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가 되는 녀석이 바로 이 묵은지말이 김밥이었다.

묵은지의 맛도 알고 김밥의 맛도 안다.

그리고, 밥을 묵은지와 먹으면 맛있는 것도 잘 안다.

그러니…… 이 묵은지말이 김밥은 얼마나 맛있겠는가.

입은 언제나 익숙한 것을 원한다.

익숙하면서도 맛있는 거.

김흥범은 외식경영학과 교수라는 책임감에 이런저런 음식들을 먹고 다니지만, 결국 집에 돌아가 먹는 것은 밥과 김치다.

그 밥과 김치가 한데 모인 게 바로 이 묵은지말이 김밥일 테고.

커다란 김밥을 한입에 넣는다.

밥을 둘러싸고 있는 묵은지의 새콤한 맛이 혀에 와닿는다.

아삭.

먼저 씹히는 것도 바로 묵은지다.

잘 익어 새콤하고 양념을 걷어 내 깔끔한 묵은지와, 김밥의 속재료들이 조화롭게 씹힌다.

마치 백반 한 상을 먹은 것처럼.

각각으로도 맛있는 여러 가지 속재료들이 반찬이 되어 입을 즐겁게 한다.

중간중간 존재감을 드러내는 묵은지의 식감이 상쾌하다.

맛 표현?

특별히 할 게 없다.

그냥 맛있는 것과 맛있는 것이 만나서 더 맛있는 음식이 되었다.

1+1이 100이 되었다.

진미채 김밥, 돈가스 김밥, 묵은지말이 김밥.

뭐가 더 낫다고 할 것 없이 전부 훌륭했다.

도시락을 깨끗이 비운 김흥범은 순간 고민에 빠졌다.

‘이걸 칼럼에 올려도 될까?’

홍보의 의도를 갖고 올린 칼럼이 어쩌면 표절과 모방으로 변질될 수 있다.

질 나쁜 인간들로 인해.

어떤 인간들은 김흥범이 칼럼에 올린 새로운 김밥을 도둑 고양이처럼 카피해 갈지도 모른다.

좋자고 한 일 때문에 선우네 백반에 피해를 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 맛있고 새로운 음식을 소개도 안 하자니 너무 아깝다.

‘흐음…… 이선우 사장이랑 얘기해 봐야겠네.’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겠는가.

권한을 갖고 있는 당사자와 얘기를 해 보면 될 일이다.

* * *

오늘의 메뉴가 김밥이다 보니, 매우 좋은 점이 있다.

바로, 아침 준비를 끝으로 더 이상 조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덕분에 오늘 선우네 백반의 주방 풍경은 꽤 한가했다.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부모님이 장사를 시작하고 난 후에는 소풍 때 김밥을 먹어 보지 못했다.

안 그래도 음식을 만드는 게 일인 부모님께 소풍이라고 김밥을 싸 달라고 하는 것도 못할 짓이다.

그래서 소풍날에도 따로 소풍이라고 말하지 않았던 적도 많았다.

운동회 날이나 그림 그리기 대회 날에도 마찬가지.

이러고 보면 내가 생각보다는 속이 깊다.

하하.

속이 깊긴 했지만, 다른 친구들의 김밥 도시락이 안 부러운 건 아니었다.

꼭 김밥을 먹어서가 아니라, 다들 김밥을 싸 오는데 나만 평범한 도시락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어렸을 때는 뭔가 친구들과 다르다는 것이 성인일 때보다 더 크게 느껴진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소풍 때는 밥을 따로 먹었다.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 보니, 어쩐지 내가 부모님이 없는 고아처럼 느껴졌다.

분명히 도시락을 싸 주는 엄마가 있었지만, 그때는 마음이 그랬다.

세월이 흐르고, 선우 푸드가 커진 후.

자연스럽게 사회 공헌에 대한 생각을 했다.

기업인들이 으레 그렇듯이.

얼마를 기부했다는 보드판을 들고, 고아원의 대표 아이와 함께 사진을 찍어 언론에 내었다.

선우 푸드가 이렇게 좋은 일을 한다는 걸 자랑했다.

물론, 요즘 세상에는 내가 한 일을 자랑하지 못하면 그것도 바보로 친다.

한창 기업을 키우기에 매몰되어 있었던 나도 마찬가지였고.

실제로 한 것보다 더 커 보이게 홍보를 했고, 카메라 앞에서는 세상 착한 사람처럼 웃었다.

그렇게 선우 푸드의 회장으로서 ‘지역사회 공헌’이라는 역할 놀이에 충실했다.

‘근데 뭐…… 마음에 남는 건 없었지.’

그랬다.

좋은 일을 하면 뿌듯하고, 보람차야 한다고 배웠는데 그러질 못했다.

왜일까?

돈은 냈지만, 마음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좋은 일을 했다는 건 널리 알렸지만, 마음으로 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남는 게 없었던 거다.

그런 아쉬움을…… 이번 생에는 느끼지 않으려고 한다.

* * *

영진 꿈마을.

이곳은 영진동 끝자락에 위치한 작은 고아원이다.

주택가에 위치한 이곳은 과거에는 커다란 단독주택이었다.

고아원을 위한 리모델링을 한 이곳은 마치 유치원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규모가 작은 만큼 원생 수도 적다.

모든 원생을 합쳐 봐야 스무 명 남짓.

“진짜 이 정도면 될까요?”

“네. 충분할 것 같은데요.”

김밥을 실은 상자를 내리며, 이초희가 걱정스레 묻는다.

이초희는 점심 시간에 밥을 먹으러 왔다가 내게 포섭당했다.

선우네 백반의 온라인 홍보대사라면 이 정도는 도와줘야 되지 않겠냐는 내 말을 생각보다 흔쾌히 받아 줬다.

어차피 더 이상 수업도 없고, 부른 배도 꺼트려야 된다면서.

하긴, 김밥을 한 다스나 먹었다.

열두 줄.

진미채, 돈가스, 묵은지 각각 네 줄씩.

그런 그녀의 입장에서 김밥 60줄은 너무 작아 보일 거다.

원생 스무 명에 선생님들까지 스물다섯 명.

내가 보기엔 거의 두 끼 분량일 수도 있겠는데 말이다.

이초희가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운데, 저쪽에서 한 분이 열심히 뛰어오는 게 보인다.

“안녕하세요!”

다가오신 분은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경쾌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혹시…… 원장선생님?”

“네, 영진 꿈마을 원장 차미란이라고 해요. 전화 주셨던 분이시죠?”

“네, 전화드렸던 이선우입니다. 영진시장에서 작은 백반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 반가워요.”

차미란은 힘차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에너지가 좋았다.

뭔가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풍기는 에너지.

물질보다는 마음이 풍요로워서 진심으로 웃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만의 에너지.

“반갑습니다.”

손을 마주 잡고 크게 흔들었다.

맞잡은 손에서 따뜻한 기운이 전달되는 듯했다.

* * *

고아원 내부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이 있었다.

커다란 식탁 위에 주르륵 앉은 아이들은 나와 이초희가 배달해 온 김밥을 맛나게 먹었다.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김밥은 역시…… 돈가스 김밥이었다.

세 살 어린이부터 열아홉 고3까지.

그들은 돈가스 김밥을 가장 빨리 비워 냈다.

한편, 선생님들에게 가장 사랑을 받은 김밥은 묵은지말이 김밥이었다.

특히 김밥을 싸고 있는 김치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다.

“이 김치…… 사장님이 직접 담그신 거예요?”

“아, 저희 어머니께서 담그신 겁니다.”

“와…… 어머님 솜씨가 진짜 좋으시네요.”

“그럼요. 선우네 백반 김치 진짜 유명해요.”

옆에 있던 이초희가 거들었다.

부른 배를 꺼트리겠다던 그녀는 싸 온 김밥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녀의 먹성에는 참……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한참을 먹은 아이들이 부른 배를 두드리고 있는 와중 유독 시선을 잡아끄는 학생이 있었다.

나이는 대략 고등학생 정도?

그 여학생이 내 시선을 끄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엄청나게 잘 먹는다는 것.

아까부터 차근차근하게 김밥을 집어먹는 데 그 손길이 멈출 줄을 모른다.

이미 꽉 찬 배를 부여잡은 다른 아이들이 행복한 고통으로 괴로워할 때도 그녀의 젓가락질은 멈추지 않고 있다.

둘째, 어디에선가 분명 본 적이 있는 듯하다는 것.

여학생은 누가 봐도 예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스무 명의 아이들 사이에서도 확 튈 만한 군계일학의 미모를 소유하고 있다.

물론, 그래서 어디에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나는 분별이 있는…… 마흔 살의 선우 푸드 회장이다.

- 우리 어디에선가 본 적 있지 않아요?

고아원의 학생을 상대로 이런 작업 멘트를 날릴 그런 나이도 아니고.

그런데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특히 저 먹는 모습이 참 익숙하다.

떠오를 듯 말 듯한 느낌만 머릿속을 간질인 채로 그렇게 식사 시간이 끝났다.

* * *

원장실.

“김밥 진짜 맛있게 잘 먹었어요. 처음엔 너무 새로워서 이게 뭔가 싶었는데, 맛을 보고 난 후에는 멈출 수가 없더라고요. 호호.”

“잘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원장 선생님이 내어주신 믹스커피를 홀짝이며 대답했다.

“거봐요, 사장님. 60줄 적다고 했죠?”

“아…… 그러게요. 제 예상을 빗나갔네요. 분명히 많다고 생각했는데…….”

맞은편에 앉은 차미란이 한바탕 크게 웃는다.

“우리 애들이 좀 잘 먹어요. 호호. 선생님들도 다들 잘 드시고. 아, 그리고…… 애들 중에 특히 잘 먹는 친구가 하나 있어서. 호호호.”

“아! 저 알 것 같아요. 그 긴 머리 여학생.”

“네, 맞아요! 혜승이. 유혜승.”

혜승, 유혜승.

이름조차도 왠지 낯익다.

“아, 그 여학생! 저도 깜짝 놀랐어요. 거의 저랑 비슷하게 먹던데요? 근데도 어쩜 그렇게 몸이 예쁜지…… 어려서 그런가.”

이초희의 말마따나 먹는 양이 거의 그녀와 비슷해 보이는 유혜승이었다.

“저도 혜승이 보면서 놀라요. 부럽기도 하고.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 찐다니까요. 밥도 밥인데 단 건 또 얼마나 좋아한다고요. 그렇게 먹고 운동도 안 하는데…… 혜승이는 유전자 자체가 축복받은 애예요. 얼굴도 너무 예쁘고.”

“맞아요. 정말 예쁘게 생겼더라고요. 인기 진짜 많을 것 같아요. 연예인해도 되겠더라니까요.”

이초희가 차미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잠시만.

연예인?

유혜승, 연예인, 잘 먹는다.

잘 먹는 연예인, 유혜승.

아!

불현듯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TV 속의 한 장면이었다.

어떤 식당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먹고 있는 예쁜 여배우와 그걸 놀란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다른 남자들.

그 여배우의 먹는 모습이 방금 전 김밥을 먹는 유혜승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

‘유혜승…… 그녀는 설마…… 배우가 될 관상인가?’

장면이 떠오르자 아까까지는 떠오르지 않던 정보들이 줄줄 생각나기 시작했다.

- 배우 유혜승, 먹방 BJ들이 울고 갈 식성의 소유자.

- 유혜승, 백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수상.

- 고아에서 톱 배우까지…… 배우 유혜승의 휴먼 드라마.

먹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여학생은 나중에 톱 배우가 되는 유혜승이었다.

막힌 혈관이 뚫린 듯 가슴이 후련했다.

그리고, 재미있었다.

한창 수다를 떨고 있는 옆의 두 사람은 모르는 걸 내가 알고 있다는 게.

미래를 안다는 거에는 이런 소소한 재미도 있는 거다.

그나저나…… 백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받는 여배우와의 인연을 이렇게 흘려보낼 수는 없지.

“원장님.”

“네, 사장님.”

“앞으로도 한 달에 한 번씩 꾸준히 찾아오겠습니다. 그리고, 영진꿈마을 원생들은 백반집에 오면 절반 가격으로 식사를 제공하겠습니다.”

“아이고,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하지만, 무리는 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닙니다. 저희 선우네 백반이 영진 꿈마을 원생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겠습니다.”

“아, 네. 호호. 그래 주시면 너무 감사하죠.”

가게로 돌아가는 길.

뿌듯한 감정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이건 아무런 대가 없이 좋은 일을 했다는 데 대한 마음의 보상일 것이다.

정말 아무런 대가 없이.

그 어떤 사심도 없이.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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