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행복 식당-59화 (59/110)

#59화 진상은 못 참지

“서빙과 설거지. 이게 당분간 네 업무가 될 거야.”

“네.”

짧고 분명한 유혜승의 대답.

머리를 뒤로 질끈 동여매고, 앞치마까지 입으니 몇 년은 식당에서 일한 사람 같다.

평상복을 입고 있을 때는 천상 학생 같더니.

타고난 연기자라서 그런가?

주변 상황이나 입은 옷에 따라서 이미지가 이렇게 달라지는 게 신기하게 느껴진다.

“잘해 보자.”

괜히 그런 말이 나왔다.

나를 제외한 네 사람은 혜승이를 테스트하는 입장이라면, 나는 혜승이를 응원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혜승이는 아까처럼 간결하게 대답했다.

“네. 바로 일 시작하면 되죠?”

군더더기 없는 자세는 일단 맘에 든다.

오늘의 메인 메뉴는 콩국수다.

슬슬 더워지는 날씨에 콩국수 매니아들에게는 지금쯤 딱 생각나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다만, 팬이 있으면 안티도 있는 법.

콩국수는 호불호가 강한 음식 중 하나이다.

따라서 비교적 호불호가 적은 음식인 비빔국수도 같이 준비할 생각이다.

손님들은 선택하면 된다.

고소하고 시원한 콩국수냐.

매콤하고 입맛 도는 비빔국수냐.

물론, 두 가지 다 먹어도 되고.

콩국수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가 콩인 건 두말하면 입 아픈 사실이다.

수없이 많은 콩의 종류 중 콩국수에 들어가는 건 바로 백태이다.

검정콩인 서리태로 하는 콩국수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메인은 여전히 백태이다.

가락시장의 노유림 사장에게 부탁해서 최고 품질의 국내산 백태를 공급받았다.

한가득 배달된 백태의 상태를 직접 확인한다.

노유림을 전적으로 신뢰하긴 하지만, 그래도 검수는 해야 하니까.

국내산 백태는 껍질이 얇고 깨끗하며 윤기가 흐른다.

드문드문 껍질이 보라색으로 변한 낟알도 발견된다.

반면, 중국산 백태는 껍질이 두껍고 보라색으로 변한 낟알이 발견되지 않는다.

낟알의 굵기도 국내산에 비해 매우 고른 편이다.

노유림이 보내 준 물건은 완벽한 국내산 백태였다.

주재료인 콩이 중요한 만큼, 콩국수를 만드는 대부분의 과정은 콩을 손질하는 데 있다.

우선, 콩을 깨끗이 씻은 후 물에 불린다.

다 불린 콩을 한 차례 삶는다.

삶는 시간은 물이 끓어오르고 난 뒤 대략 10분 내외.

잘 삶은 콩은 찬 물에 붓고, 껍질을 벗겨 낸다.

백태의 껍질은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투명색이다.

한 움큼씩 쥐고 손으로 살살 문지르면 그 투명한 껍질이 벗겨진다.

잘 손질된 콩을 믹서기에 붓는다.

콩과 함께 포인트가 되는 두 가지 재료를 같이 갈아 준다.

바로 잣과 땅콩가루.

이 두 가지 재료가 들어가면, 고소함과 풍미가 몇 배 증폭된다.

이 두 가지 재료의 첨가로 그냥 콩국수가 탑(TOP) 콩국수가 되는 것이다.

오늘 하루 분량의 장사를 준비하느라 믹서기는 새벽 내내 쉬지 않고 돌아갔다.

콩물이 완성되면, 병에 나눠 냉장고에 보관해 놓는다.

다음은 국수를 삶을 차례.

소면은 손으로 쥐었을 때 대략 백 원짜리 동전만큼의 양이 일 인분이다.

물이 담긴 냄비에 불을 켜고, 원을 만들 듯 소면을 휘리릭 돌려 낸다.

젓가락을 들고, 다시 원 모양으로 휘휘 저어 주면, 삐져 나와 있던 소면이 회오리 치는 모양으로 냄비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대략 3~4분 정도 익히면 완성이지만, 직접 익힘 정도를 확인해 보고 싶다면, 젓가락으로 몇 가락 들어 올려 눌러 보면 된다.

부드럽게 잘 눌리면 적당히 익은 거다.

잘 익은 소면을 찬물에 치댄다.

충분히 치대야 면발이 쫄깃해진다.

잘 치댄 소면의 물기를 제거하고, 그릇에 동그란 모양으로 예쁘게 담는다.

그 위에 만들어 둔 콩물을 넉넉하게 부어 주고, 계란 반 개, 채 썬 오이 조금, 방울 토마토 두 알을 고명으로 얹는다.

자, 초여름의 별미 콩국수 완성이다.

* * *

오늘은 날씨가 최고의 도우미였다.

5월 중순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더웠으니까.

일기예보를 대충 확인하고, 메뉴 기획을 한 거긴 한데, 이렇게까지 더울 줄은 몰랐다.

서울 최고 기온이 30도?

5월의 기온이라기에는 믿기 힘든 수치였다.

“이 샤프! 나 오늘 콩국수 당기는 거 어떻게 알았어?”

“딱 그러실 것 같더라고요.”

“키야. 역시 이 샤프야. 이제는 사람 마음까지 막 알아 버리네?”

“감탄하시기는 이릅니다. 콩국수 맛보면 아예 까무러치실 테니까요.”

“뭐? 허허허허허. 그래. 그럼 빨리 한 그릇 줘 봐요!”

참새가 방앗간을 찾듯 방앗간 황씨 아저씨가 가게에 들어왔다.

방앗간 내부가 많이 더웠는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이후에도 들어오는 손님들의 첫마디는 대부분 이거였다.

- 오늘 같은 날은 진짜 시원한 콩국수가 딱이지.

최근에는 이런저런 루트를 통해 가게가 알려지면서 멀리에서 찾아와 준 손님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그 손님들에게는 유독 고마운 생각이 든다.

더 맛있게 해 드려야겠다는 책임감 같은 감정도 들고.

그저 우리 가게를 믿고 멀리서 찾아와 주시는 분들이니까.

그러니, 식당이 기대에 못 미치면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하지만…… 가끔씩은 전혀 고맙게 느껴지지 않는 손님도 있다.

고맙지 않은 게 아니라, 확 때려 주고 싶은 손님들.

일명 진상 손님.

동네 장사를 할 때는 그런 진상이라고 해 봐야 황씨 아저씨뿐이었다.

사실 그 진상도 귀여운 수준이었다.

그냥 좀 더 맛있게 만들어 달라고 투정을 부리는 느낌이었으니까.

하지만, 진짜 진상들은 참…… 말도 안 되는 어거지로 울화통을 치밀게 한다.

그런 손님 중 최근에 가장 황당했던 경우는 이랬다.

밥을 다 먹고 나가던 그 진상은 이렇게 말했다.

- 요즘 들어 양이 좀 적어진 것 같네요.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어라?

분명히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처음 온 손님인데.

- 그러셨나요? 저희는 무한 리필은 아니지만, 양이 부족하다고 말씀하시면 조금 더 드립니다. 다음부터는…….

- 그걸 손님이 어떻게 알아요? 써 붙어 있지도 않은데.

- 아…… 그건 아무래도…… 정식으로 드리는 게 아니다 보니…….

- 암튼 저는 육천 원 다 못 낼 거 같은데요.

- 네?

결국 육천 원 내기 싫다는 거다.

밥은 저렇게 밑바닥이 보이게 다 먹어 놓고서는 말이다.

이런 사람들이랑은 말다툼을 해봐야 득보다 실이 크다.

그래서 그냥 어려운 사람한테 적선했다고 생각하고 돈을 안 받고 보낸다.

육천 원이 아니면 얼마를 낼 건지 물어보는 짓 같은 건 생각만 해도 구차하니까.

- 만족을 못 하셨으면 오늘은 그냥 가셔도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옳다구나 하고 휭 나가 버리는 진상 녀석.

그런 녀석이 왔다 가면 어머니는 꼭 김치 담그던 소금을 한 바가지 들고 와서 문밖에 뿌린다.

뿌리는 힘이 어찌나 센지 거의 소금 덩어리가 진상 녀석의 뒤통수까지 날아갈 기세다.

그런 진상 중의 하나가 오늘도 출몰한 듯하다.

그것도 하필이면 오늘 처음 일하는 혜승이를 타깃으로.

“소금인지 설탕인지 보고 어떻게 알아?”

걸걸한 목소리를 내는 50대 정도로 보이는 중년 남자.

목과 팔에 어울리지 않는 금덩어리를 달고 있는 꼴이 그냥 보기에도 천박해 보인다.

콩국수에 같이 제공되는 소금과 설탕.

취향껏 넣어 드시라고 각각의 그릇에 따로 담아 나간다.

아마도 남자는 소금 대신 설탕을 넣었거나, 설탕 대신 소금을 넣었던 듯했다.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처음부터 사장이 나서면 오히려 일이 커지는 경우도 있으니.

“알이 굵은 게 소금이고, 가는 게 설탕이라고 아까 설명은 드렸는데요…… 그래도, 제대로 표시해 드리지 못한 게 저희 실수 같네요. 죄송합니다.”

오…….

혜승이의 대답은 백 점 만점에 구십구 점이었다.

다소 딱딱해 보이는 말투 때문에 1점 깎였다.

하지만, 내용은 완벽했다.

이미 설명을 드렸다는 말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송하다는 말.

어렸을 때부터 이런저런 곳에서 일을 많이 해 봤다고 들었는데, 이런 데서 그 경험의 깊이가 느껴진다.

“죄송이고 뭐고, 난 설탕 넣은 콩국수는 안 먹어. 그러니까 다시 해 와.”

“네?”

“왜 목소리가 잘 안 들려? 다시 해 오라고!”

남자는 윽박지르듯 혜승이에게 소리쳤다.

이제는 나서야 할 때다.

급하게 앞치마를 벗고 홀로 나가는데…….

혜승이가 소금 그릇에 담긴 소금을 듬뿍 떠서 콩국수 그릇에 붓고 섞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이 정도 넣으면 손님이 넣으신 설탕은 다 중화가 됐을 거예요. 좋아하시는 소금 맛이 가득 날 테니까 맛있게 드세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혜승이는 그대로 꾸벅 인사를 하고, 다시 하던 일로 복귀했다.

남자는 얼굴이 벌개져서는 소리쳤다.

“야! 너 이리 안 와!”

그때 듬직한 체구의 진민호가 채소를 썰던 중식도를 들고 홀로 나왔다.

나도 그와 함께 남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거기에…… 영훈대학교의 즐라탄, 빅터 요한손이 우리와 함께했다.

빅터는 처음 먹어 보는 콩국수에 완전히 빠져서 세 그릇째 국수를 흡입하던 중이었다.

우리 셋이 다가서자 남자는 주춤했다.

그럴 만했다.

진민호의 진중한 표정과 중식도를 보면 나까지 무서워졌으니까.

왠지 그는 마음만 먹으면 진짜 칼을 쓸 수도 있을 거라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빅터도 만만치 않았다.

즐라탄을 실제로 봤다고 생각해 보라.

그 덩치와 인상이 얼마나 위협적이겠는가.

“에이, 밥맛 다 떨어졌네. 야, 가자!”

남자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일행을 데리고 쏜살같이 밖으로 빠져 나갔다.

본래 힘으로 뭔가를 해결하려는 사람은 더 큰 힘 앞에서는 늘 무릎을 꿇게 되어 있다.

그게 간사한 인간들의 특징이고.

“빅터, 고마워.”

“고맙낀! 총국수 먹으니까 힘이 팍팍 나써어!”

“총국수가 아니라, 콩국수. 콩. 국. 수.”

“아, 맞다. 콩국수. 하하하. 선우. 나 이거 한 그릇 더 먹어도 돼?”

“물론이지. 마음껏 먹어. 배 터질 때까지.”

“오케이!!! 선우 짱!!!”

* * *

약간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오늘의 장사도 무사히 끝마쳤다.

수많은 손님의 맛있다는 말과 함께.

그나저나 혜승이의 멘탈이 조금은 걱정이 됐다.

“너 괜찮아?”

“네.”

여전히 간결하고, 무심한 대답이다.

저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은 표정이 진심이라면…… 멘탈에 있어서는 나보다도 한 수 위인 듯하다.

40년을 살았다가 다시 돌아온 나보다도.

어쩌면 저런 멘탈이 있으니까 그 험하다는 연예계에서도 버텨 나간 걸까.

최고의 배우가 될 때까지?

“괜찮다면 다행이네. 일은 안 힘들었어?”

“네. 생각보다 쉽던데요.”

“아, 그랬어? 그렇다면 그것도 다행이네.”

“네.”

“음…… 그럼 이제 퇴근해 봐. 오늘은 첫날이니까…… 정리까지 하는 건 내일부터 하는 걸로 하자.”

“알겠습니다. 그럼 들어가 볼게요.”

꾸벅 인사를 한 혜승이는 나머지 분들께도 일일이 인사를 하고 퇴근했다.

정리를 마치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오늘은 왠지 다들 할 말이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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