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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의 행복 식당-74화 (74/110)

#74화 김치말이 국수 (1)

“아, 미안.”

녀석의 얼굴과 몸을 휴지로 닦아 내 주었다.

“인마. 그게 그렇게 웃기냐? 자식이 웃기면 그냥 말로 하면 되지…… 아으, 더러워.”

“아, 그런 거 아니야. 진짜 미안해.”

진심이었다.

내 사정을 알면…… 이게 웃을 일이 아니라는 건 너도 알 거다.

“뭐, 웃기다니 할 말은 없다만…… 그냥 내 생각엔 이랬어. 우리가 예로부터 배달의 민족이라고 불리잖아. 뭐, 그 배달이라는 게 이 배달하고는 다른 의미지만…… 어쨌든 음은 같으니까. 거기에다가 민족 대신에 동족을 넣는 거야. 뭐, 우리는 같은 피를 가진 민족이다 뭐 이런 의미를 강조하는 거지.”

“음…….”

“왜? 뜻도 별로냐?”

아니, 아니…… 너 이 자식…… 천재 맞구나.

미래의 그 ‘배달의 동족’이라는 이름이 탄생한 배경까지 완전히 일치한다.

갑자기 녀석이 크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

영진동의 천재, 최고의 수재로 불리던 놈이 바로 이놈이었지.

근데,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른다.

“야! 너 이 X끼. 진짜…….”

“뭐, 뭐야? 그게 그렇게 재미없었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흥분할 정도냐?”

“으이구…… 너 이 X끼…….”

이런 놈이 알코올중독자가 되어서 인생을 허비했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너무 화가 났다.

네가 그렇게 되어 버리는 바람에 난 둘도 없는 친구를 잃었고.

전생에 내가 친구가 하나도 없었던…… 게 뭐, 꼭 네 탓만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너무 아깝지 않은가.

이렇게 빛나는 머리가 알코올에 절어서 쓸모없는 무거운 돌덩이가 되었다는 게.

“역시 넌…… XX 똑똑해. 최고야.”

녀석에게 엄지를 척 내밀어 보였다.

“뭐야 또 이런 전개는? 너 사람 갖고 노냐?”

“아니. 넌 진짜 천재라니까.”

녀석의 양쪽 볼을 잡고 힘차게 흔들어 주었다.

배달의 동족.

뭐, 내가 얘기해 준 건 아니니까 양심에 걸릴 건 없고.

그렇게 하라고 해야지.

본인이 낸 아이디어니까.

후훗.

“이모! 여기 소주 하나요!”

“어라? 술을…… 허락한다고?”

녀석의 눈이 욕망으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꿀밤이라도 한 대 먹이겠지만 오늘은 다르다.

이 정도 아이디어를 냈으면 오늘은 한 잔 마셔도 되지.

마침 최고의 안주감인 질 좋은 오소리감투가 있기도 하고.

* * *

한 달 전.

전 갓물주 윤복순 할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 할머니. 김치 보내드려요?

- 아…… 이번에는 내가 갈게. 오랜만에 동네에 가 보고 싶기도 하고. 시장 구경도 하고.

- 아, 그러시겠어요? 언제쯤 오세요?

- 한, 한 달 후쯤? 아직 김치가 많이 남았거든.

- 아…… 알겠어요. 할머니. 그날 오셔서 꼭 식사하고 가세요.

- 그래, 그래.

할머니와의 통화를 끝내고, 한 가지 재료를 미리 준비해 두었다.

오늘을 위해.

그 재료는 바로 김치 국물.

매일 있는 게 김치고 김치 국물 아니겠느냐 하지만…… 할머니를 위한 요리에 쓰일 김치 국물은 좀 다르다.

한 달 정도의 발효와 숙성을 거쳐야 비로소 제대로 된 맛을 낼 수 있으니까.

그 김치 국물을 활용해 만들어 낼 오늘의 메뉴는 바로 이거다.

<오늘의 메뉴>

- 김치말이 국수

- 떡갈비

- 백김치

여름이 다가오면 흔히 생각하는 메뉴는 바로 냉면이다.

하지만, 덥다고 매일 냉면만 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뜨거운 음식을 먹자니 안 당기고.

이열치열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여름철에 뜨거운 음식은 확 와닿지 않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럴 때 냉면의 훌륭한 대체재가 될 수 있는 게 바로 이 김치말이 국수이다.

마침 우리집에는 늘 최고의 재료가 구비되어 있다.

바로 맛있는 김치.

당연하겠지만, 김치말이 국수의 가장 중요한 재료는 바로 김치다.

그 김치가 맛있으면 사실 다른 재료는 그저 김치의 맛을 잘 돋워 주는 정도의 역할만 하면 된다.

잘 익은 배추김치는 양념을 털어 낸 후 송송 썰어 준다.

썰어 낸 김치를 설탕, 맛술, 참기름, 참깨 등으로 양념하여 준비해 둔다.

육수는 세 가지의 국물을 이용하여 만든다.

김치 국물, 동치미 국물, 멸치 육수.

이 세 국물이 조화롭게 만들어 내는 하모니에서 감칠맛이 생겨난다.

만들어 둔 육수는 살얼음이 얼을 정도로 냉동실에 보관해 둔다.

고명으로 활용할 오이, 동치미 무 등도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준비해 둔다.

끓는 물에 소면을 펼쳐 넣고, 눌지 않게 잘 저어 가며 익혀 준다.

물이 끓어오르면 찬물을 넣어 넘치지 않도록 한다.

면이 투명해질 정도로 익으면, 체에 받쳐서 흐르는 물에 마사지하듯 면을 비벼 준다.

이때 소금과 참기름을 살짝 추가하여 같이 비벼 주면 조금 더 탱탱한 식감이 생겨나게 된다.

대접에 일 인분 크기로 예쁘게 만 면을 넣고, 만들어 둔 육수를 부어 준다.

그릇의 가장자리까지 차오를 정도로 육수를 부어 주고, 김치, 동치미 무, 오이 등의 고명을 얹어 주면 완성.

살얼음이 동동 뜬 국물이 그냥 보기에도 참 시원해 보인다.

김치말이 국수는 그것만으로도 참 맛있지만…… 새콤달콤 시원한 국수만으로 식사를 하기엔 못내 아쉬운 게 사실이다.

비빔냉면을 고기와 함께 먹는 걸 좋아해서 ‘육쌈냉면’이라는 신메뉴도 만들어 낸 우리나라 사람들 아니겠는가.

육쌈냉면의 고기 역할을 할 오늘의 메뉴는 바로 떡갈비다.

오늘의 떡갈비는 한입에 넣기에도 부담스럽지 않을 크기로 만들 예정이다.

떡갈비의 존재감이 너무 커져 버리면 주객이 전도될 수도 있으니까.

떡갈비는 어디까지나 김치말이 국수의 아쉬운 맛을 보조해 주는 역할만 하게 될 것이다.

다진 소고기와 다진 돼지고기를 반반씩 사용한다.

고기는 키친타월을 활용해 핏물을 최대한 제거한다.

간장, 설탕, 올리고당, 참기름, 마늘, 매실청, 다진 파를 섞어 양념장을 만든다.

두 가지 고기를 볼에 담아 먼저 섞어 준 후, 양념장을 넣고 치댄다.

퍽. 퍽. 퍽.

잘 치댈수록 간도 잘 배고, 고기도 더 맛있어진다.

잘 치댄 반죽을 동그랑땡 크기로 떼어 빚어 준다.

기름을 두르고 중약불에 은근히 구워 주면, 떡갈비 완성.

자, 이제 시식 시간이다.

“어머니, 아버지, 이모, 삼촌, 혜승아. 시식 시간입니다. 모이세요!”

“와…… 시식 시간이다!”

우리 식당의 막내…… 하지만, 먹는 양은 첫째인 혜승이가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다.

“선우야. 이모, 삼촌…… 이렇게 하니까 진짜 좀 가족 같은 느낌이 드는데?”

안순미 이모의 말.

“듣고 보니 그렇네요. 가족끼리 모여서 아침 식사하는 것만 같은 느낌.”

“저는 삼촌이라고 불러주시니 참 좋습니다. 아, 오해는 마세요. 제가 어른 대접 받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니까.”

“에이…… 삼촌이 무슨 어른 대접 같은 걸 받기 바라는 사람도 아니고…… 그런 오해 안 합니다.”

진민호가 대접받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면 지금 여기서 새파랗게 어린 나에게 장사를 배울 일도 없었겠지.

“감사합니다. 그냥 삼촌이라고 불러주시니 조금 더 사장님이랑 친해진 것 같아서요. 그게 좋은 겁니다.”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자, 삼촌도 어서 드세요. 지금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아…….”

진민호가 침음성을 흘렸다.

혜승이가 온 이후로 우리 가게의 아침 식사 풍경은 실로 많이 달라졌다.

원래는 다들 음식에 대한 얘기도 하면서, 평가도 하면서 피드백도 주고받으면서 천천히 즐겼었는데…….

지금은 그런 거 없다.

까딱하다가는 시식이자, 아침 식사인 그 음식들이 혜승이 입으로 다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러 위기감에 다들 전투모드가 된다.

일단 먹고, 얘기는 나중에.

선먹후톡(Talk)이 우리 가게의 아침 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우와…… 잘 먹었다.”

“진짜 시원하네.”

“이 떡갈비도 물건이네? 자칫 아쉬울 수 있는 한 끗을 얘가 보완해 준다고나 할까?”

“맞아요. 김치말이 국수 다섯 번 먹고 떡갈비 한 번 먹으면 딱이에요.”

사람들이 방금 입을 연 혜승이의 얼굴을 일제히 바라본다.

의문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아버지가 대표자가 되어 용감하게 말을 꺼낸다.

“혜승이 너…… 어른들 앞에서 거짓말하는 거 아니다. 벌써부터 그런 습관이 들면 안 되는 거야.”

“네? 거짓말이요?”

“그래. 내가 봤어…… 넌…….”

머뭇거리는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지원사격을 한다.

“다섯 번에 한 번이 아니라…….”

순미 이모가 어머니의 말을 받는다.

“김치말이 국수 한 그릇에 떡갈비 한 접시…….”

그 말은 민호 삼촌으로 이어진다.

“그걸 다섯 번…… 했잖아.”

“아…… 호호호. 제가 좀 어리잖아요. 원래 어릴 때는 좀 많이 먹죠. 헤헤헤.”

혜승이가 민망한 듯 웃는다.

아…… 무슨 여배우가 진짜 저렇게 많이 먹냐.

어쩌면 내가 미래의 일을 잘못 알고 있던 거 아닐까?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는 그 여배우는 눈앞에 있는 먹신 혜승이와 동명이인인 거 아닐까?

그런데, 신기한 건…….

연예인들은 입금 전과 입금 후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던데…….

얘는 삼백육십오 일을 이렇게 먹어도 살이 안 찐다.

타고난 건가?

오늘도 역시 혜승이의 먹성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시식 시간이 마무리되었다.

자, 이제 오늘의 장사 시작이다.

* * *

반가운 손님이 오시기로 한 날인 걸 알았는지 아침부터 까치가 울었고, 초여름의 쨍쨍한 날씨는 손님들을 가게로 불러 모았다.

아침부터 가게 안은 ‘시원하다’는 소리로 가득 찼다.

참 웃긴 말 중에 하나가 이 ‘시원하다’는 말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뜨거운 걸 먹을 때도 시원하다고 말하고, 온탕에 들어가는 순간에도 시원하다고 말한다.

차가운 걸 먹을 때도 시원하다고 말하고, 찬 계곡물에 들어갈 때도 시원하다고 말한다.

도대체 이 시원하다는 건 뭘까?

뜨거운 걸 먹어서 시원하다는 건, 속이 풀려서 시원하다는 걸까?

근데 더 웃긴 건…… 우리의 즐라탄, 빅터 요한손이다.

그는 완벽하게 이 ‘시원하다’는 말을 구사한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같이.

“선우. 이 국수 너무 시원해. 내가 얼음장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아. 아…… 너무너무 좋다. 어제 먹은 보드카 때문에 속도 울렁거렸는데 아주 시원하게 풀렸어. 진짜 짱이다. 짱 시원해 이거!”

진짜 온도가 시원해서 시원하다는 말과 속이 풀려서 시원하다는 말을 완벽하게 다른 상황에서 구사하는 빅터다.

다른 말은 어눌한데 음식에 관련된 말은 유독 빨리 습득한다.

사람은 뭐든지 자기가 좋아서 하는 건 빨리 배우는 법인가보다.

황종훈 아저씨는 과거의 추억들을 꺼내기에 바빴다.

“예전에는 냉면집에서 말이야. 김치말이 밥을 만들어 줬어. 그때는 다 못 먹고 못 살 때니까, 냉면 국물이 진짜 아까웠다고. 그래서 면을 다 먹으면 잘게 썬 김치와 밥을 국물에 말아서 먹었거든. 지금 사람들은 잘 이해 못 할 풍경이겠지만…… 그때는 그랬어.”

냉면 육수에 말아먹는 밥이라…… 확실히 지금은 볼 수 없는 풍경이지만, 왠지 이해는 됐다.

먹을 것이 귀한 시기에 그 남은 냉면 육수마저도 얼마나 아쉬웠겠는가.

그러니, 김치라도 조금 넣어서 밥을 말아 먹는 게 어쩌면 당연한 풍경이었을 수도 있다.

“그나저나 이 음식…… 복순 할매가 참 좋아했을 텐데…… 복순 할매 파주에서 잘 사시나?”

“나 얘기하는 거야?!”

그때 갓물주 윤복순 할머니가 뜨거운 햇살을 등에 받으며 가게로 들어왔다.

할머니.

오랜만에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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