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다시, 먹태는 영원해야 한다 (2)
다들 퇴근한 저녁, 고종숙과 이철민은 오랜만에 둘이 가게에 남아 있었다.
“여보. 오늘은 오랜만에 내가 솜씨 좀 발휘해 볼까?”
“오…… 안 그래도 출출하던 참이었는데…… 뭐를 하시렵니까, 고 여사님께서?”
“음…… 골뱅이 소면 어때?”
“오…… 좋다. 오랜만에 오붓하게 소주 한잔하면서 먹으면 되겠다.”
“오케이. 금방 만들어 올 테니 기다려.”
고종숙이 주방에 들어가고, 이철민이 지친 몸을 의자에 기대고 쉬려는데…… 가게 문이 스윽- 하고 열렸다.
“죄송하지만, 장사 끝…… 어라? 혜승이 왜 다시 돌아왔니? 뭐 놓고 간 거 있어?”
“혹시 방금…… 골뱅이 소면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응?”
이철민이 황당한 표정으로 유혜승을 바라봤다.
그 소리가…… 문밖까지 들렸다고?
하여간, 음식 냄새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맡는구먼.
“맞죠. 사장님 방금 골뱅이 소면이라고 하셨죠?”
“으, 응. 그건 맞지. 맞아.”
“오…… 잘됐다. 안 그래도 저 좀 출출했거든요. 저 ‘조금만’ 먹고 가도 되죠?”
“으, 응? 그, 그럼. 여보!! 골뱅이 소면 곱빼기로. 아니 곱빼기에 곱빼기로!”
혜승이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고종숙은 재료의 양을 두 배, 아니 네 배로 늘렸다.
거의 선우네 백반의 하루치 반찬을 하는 느낌으로.
그렇게 골뱅이 소면을 시작하려는데 유혜승이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으로 들어왔다.
“주방엔 왜 들어와. 저기 앉아서 쉬고 있어. 오늘은 이 아줌마가 하는 날이니까.”
“에이…… 저도 염치라는 게 있죠. 저 때문에 두 분 오붓한 시간 방해했는데…….”
그럼 그냥 가도 됐을 텐데…….
고종숙은 혀끝까지 올라온 말을 겨우 참아냈다.
오랜만에 선우 아빠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됐지만, 혜승이가 있으면 또 있는 대로 즐거운 시간이 될 거다.
얘가 눈치가 있는 애라 그런지 나름대로 딸 같은 역할을 가끔 한다.
그런 모습이 귀엽기도 한데, 자신의 고아라는 처지 때문에 그런가 싶어서 안쓰럽기도 하다.
물론, 이렇게 많이 먹는 딸이 있었으면 집 살림은 진작 거덜 났을 테지만.
“그럼 거기 있는 채소 좀 썰어 줄래? 같은 크기로.”
“네, 알겠습니다. 민호 삼촌 칼 좀 쓸게요.”
“그건 못 쓸걸?”
“왜요?”
“사물함에 넣고 비밀번호로 잠그고 다니거든.”
“아…….”
진민호에게 그 중식도는 군인의 총처럼 소중한 것이었다.
혜승이에게 채소 손질을 맡기고, 고종숙은 양념장 만들기에 돌입했다.
고추장, 설탕, 식초, 고춧가루, 참기름을 볼에 넣고 잘 섞어 준다.
이때 고춧가루는 고운 고춧가루와 굵은 고춧가루를 섞어 쓴다.
두 가지 고춧가루를 섞어 주면 맛의 차이는 별로 없지만, 색감의 차이가 생긴다.
뭔가 더 전문 요리사가 만든 느낌이 난다고 할까?
통조림에서 꺼낸 골뱅이는 절반 크기로 썰어 준다.
어떤 집에서는 이 골뱅이를 잘게 써는데, 고종숙은 개인적으로 그런 집은 참 맘에 안 든다.
그렇게 잘게 썰고 채소만 가득 줄 거면 왜 채소 무침이라고 하지 골뱅이 무침이라고 하나?
모름지기 골뱅이는 큼직큼직해서 씹는 맛이 나야 한다.
골뱅이만으로 조금 부족할 때는 북어채를 사용한다.
오늘은 혜승이가 있기 때문에 북어채도 넉넉하게 꺼낸다.
꺼낸 북어채는 골뱅이 통조림의 양념 국물에 잠깐 절여 준다.
이렇게 국물에 살짝 절여 주면 북어채가 겉돌지 않고, 양념과 함께 잘 무쳐진다.
적당한 크기로 썬 대파, 오이, 양파, 양배추, 청양고추, 골뱅이, 북어채를 양념장을 넣어 잘 무쳐 준다.
이때 너무 빡빡 무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빡빡 무치면 수분이 나오고, 그 수분이 양념장의 맛을 흐리게 할 수 있다.
양념이 각 재료들과 잘 섞여질 정도로만 가볍게 무쳐 준다.
끓는 물에 잘 삶은 소면은 찬물에 씻은 후 물기를 제거하고, 참기름과 깨소금을 넣어 살짝 비벼 준다.
그럼 소면 자체의 풍미가 올라와서 더 맛있어진다.
커다란 접시 가운데에 골뱅이 무침을 담고, 둘레에 적당한 크기로 말아 놓은 소면을 담으면 오늘의 야식 골뱅이 소면 완성.
“자, 시작합시다.”
“오…… 맛있겠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이철민은 싱싱해 보이는 오이를 먼저 공략했다.
사각사각.
새콤달콤 매콤한 양념장과 만난 오이의 맛이 시원하다.
다음으로는 오늘 요리의 주인공 골뱅이.
잘지 않은 커다란 알맹이가 식욕을 자극한다.
한입 베어 무니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이 훌륭하다.
유혜승은 푸드파이터답게 한 번에 모든 맛을 느끼는 방식을 택했다.
앞접시에 소면 한 덩이를 담고, 골뱅이, 북어채, 양파, 오이, 대파 등의 재료를 빠짐없이 올렸다.
모든 재료들을 소면과 함께 쓱쓱 비벼서 그대로 입으로 가져간다.
우와앙.
와구와구.
턱을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입 안에 골뱅이 소면이 꽉 찬다.
천천히 천천히 입을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그 맛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골뱅이는 야들야들하면서도 찰진 식감이 좋았다.
양념이 적당히 밴 북어채의 맛도 놀라웠다.
북어채가 이렇게 부드러웠나 싶은 느낌.
중간중간 씹히는 양파, 오이, 대파 등의 채소는 각각의 색을 내면서도 골뱅이, 북어채와 잘 조화를 이뤘다.
그리고, 소면.
역시…… 사람은 탄수화물을 먹어야 한다.
새콤하고 매콤한 양념장과 함께하니 소면이 더 달았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먹던 세 사람.
유혜승이 여전히 처음과 같은 속도로 먹고 있는 데에 반해, 어느 순간 고종숙과 이철민의 젓가락은 느려지기 시작했다.
충분히 배을 채운 두 사람은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여보…… 아무리 봐도 우리 선우가 희선이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지?”
“당신도 그렇게 느꼈어?”
“나뿐만 아니라, 다들 그렇게 느꼈을걸? 아까 재동이 엄마도 그러던데? 선우가 희선이 좋아하는 거 아니냐고.”
“하긴…… 그렇지. 마음도 없는 애한테 아침부터 그렇게 도시락을 싸 줄 리는 없지.”
“그럼, 그럼. 안 그래도 장사하느라 피곤할 텐데 그렇게 시간을 쪼개서 도시락을 싸 준다는 건…….”
“뭔가 있는 거지.”
고종숙과 이철민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당사자는 아니라고, 아니라고 하는데, 두 사람은 여전히 둘 사이를 의심했다.
아니, 의심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두 사람 사이를 응원한다고 해야 하나?
두 사람이 이어지기를 기원한다고 해야 하나?
“내가 희선 엄마한테 살짝 떠볼까?”
“희선 엄마한테 직접?”
“그래. 굳이 뭐 돌아갈 거 있어? 직진하는 거지.”
“하긴…… 선우랑 희선이…… 어렸을 때부터 참 잘 어울렸어.”
“맞아. 아기 때부터 아주 같이 있으면 남매냐고 물어봤지. 서로 닮기도 했고.”
“정작 걔네 둘은 모르는 것 같지만…….”
“천생연분이지…….”
“당사자들이 저렇게 마음이 있는데도 소극적이면…….”
“우리라도 나서 줘야지. 언제까지 저렇게 뜨뜻미지근하게 둘 수는 없지.”
“그럼, 그럼.”
“움직여 보자고.”
“좋았어. 참, 혜승아. 넌 어떻게 생각하니? 선우랑 희선이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니?”
두 사람의 얘기는 듣는지 마는지 골뱅이 소면만 먹고 있던 유혜승이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이요?”
“응, 선우랑 희선이.”
고종숙과 이철민은 기대를 품은 얼굴로 유혜승의 대답을 기다렸다.
“저는 잘 모르겠던데요.”
“응? 그래? 둘이 생긴 것도 비슷하고, 서로 잘 알고…… 잘 어울리지 않니?”
“음…… 선우 오빠는 선한 인상에 밝은 이미지라면 희선 언니는 어딘가 모르게 좀 강해 보이는 인상이에요. 서로 잘 아는 건 뭐 오랜 시간 친구로 지냈으니 당연한 거고요. 뭐, 잘 아니까 서로의 단점에 대해서도 너무 잘 알 거고. 그러니, 친구로 지내기에는 좋겠지만 또 결혼은 다른 문제이지 않을까요?”
“…….”
유혜승이 논리적이면서도 단호한 대답에 두 사람의 말문이 턱 막혔다.
얘가 이렇게 논리적인 애였나?
“흐흠. 뭐 혜승이 말도 듣고 보니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네?”
“그런가? 우리가 급한 마음에 괜히 서두르는 건가?”
“뭐, 그럴 수도 있고…… 어쨌든 희선이도 당분간은 경찰 시험 준비하느라 바쁠 테니, 그냥 좀 두고 봅시다.”
“그래, 그럽시다.”
그렇게 세 사람의 골뱅이 소면 야식 타임은 마무리됐다.
선우와 희선을 이어 주려던 두 사람의 야심찬 계획도 불은 소면처럼 흐지부지됐고.
* * *
창성이 형은 학교 다닐 때 소위 ‘노는 애’였다.
일진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부족하지만, 늘 친구들 사이에서 노는 분위기를 주도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했고, 본인이 나서서 모임을 주도하는 걸 좋아했다.
그러다가…… 스무 살 어린 나이에 그만 지금의 형수님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게 되었다.
잘 노는 형이었지만, 그래도 책임감이 있던 창성이 형은 그대로 형수님과 결혼을 하고 생계 전선에 뛰어들었다.
어쨌든 형수님과 아이를 먹여 살려야 했기에 결정한 당연한 선택이었다.
이런저런 일을 전전하다 약간의 목돈을 모아 차린 게 바로 이 영진호프였다.
워낙 사람 좋아하는 성격인 창성이 형이다 보니 손님들에게도 잘해 줬다.
단골손님도 늘어갔고, 가게 운영도 어느 정도 잘됐다.
하지만, 문제는…… 그사이 또 생겨 버린, 아이 둘을 감당할 만큼 넉넉하게 벌리지는 않는다는 거다.
그러니 자꾸 다른 방법을 찾게 되고, 바깥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 형이었다.
도쿄포차 브랜드는 그런 형에게는 구세주처럼 보일 것이다.
브랜드 담당자의 말만 들으면 무슨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오는 것처럼 큰 행운을 잡았다고 생각하겠지.
저렇게 실실거리고 있는 형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기대부터 무참히 깨 줄 필요가 있겠다.
방법은 간단하다.
직접 자신의 두 눈으로 현실을 마주하면 된다.
“형. 근데 그 도쿄포차라는 데…… 한 번 가 보기는 했어?”
“가 봤냐고? 아니. 근데, 그쪽에서 강남점 매출정산표 보내 줬거든. 그거만 봐도 잘 알겠던데?”
에휴.
저렇게 세상 물정을 모르니, 사기 비스름한 수법에 넘어가지.
가입자 끌어모으려고 매출액 부풀리는 건 우습지도 않게 하는 애들이 바로 걔네들이란 말이다.
하지만, 내가 이리 말한다 한들 형이 ‘그래, 네 말이 맞아.’ 하고 넘어올 리 없다.
이건 전생에 수많은 사람과 직간접적으로 만나면서 느낀 사실이다.
사람은 가까운 사람의 진심 어린 충고보다는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의 사탕발림에 더 취약하다는 것.
“형. 근데 나는 좀 궁금하네. 그 도쿄포차라는 데 말이야. 강남점이면 택시 타고 금방 갈 거 같은데. 나랑 같이 한번 가 보자. 거기 안주 맛도 한번 볼 겸.”
“지금? 야, 아무리 그래도 장사 도중에 어떻게 그래.”
“어차피 지금 손님도 없잖아. 그리고…… 형은 궁금하지도 않아? 그래도 형이 앞으로 하게 될 프랜차이즈가 대충 어떻게 운영되는지는 알아 둬야 할 거 아냐.”
“음…… 그런 건 어차피 계약하면 다 알려 준다고 했는데…….”
에휴.
거듭해서 속 터지는 말만 하고 있다.
아니, 프랜차이즈를 한다는 사람이 그 가게 한 번 안 가 보고 덜컥 계약한다는 게 말이 되나?
이건 거의 중고차 구입할 때 물건도 안 보고 계좌이체 먼저 해 주는 그런 수준이다.
망설이고 있는 형을 강제로 끌고 나왔다.
이렇게 답답한 형이 좋아서 그런 건 아니다.
이건 다 이 답답한 형이 먹태 하나는 잘 만들기 때문이다.
그 먹태가 이렇게 사라지는 게 아쉽기 때문이다.
자, 가 보자고.
도쿄포차의 실태를 보여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