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행복 식당-88화 (88/110)

#88화 반계탕과 합석 (2)

“콜록, 콜록. 크윽.”

사레가 들렸는지 노유림이 갑자기 크게 기침을 했다.

그 모습을 본 우성진은 티슈를 꺼내 조용히 그녀의 앞에 내밀고, 비어 있는 잔에 물을 따라 건넸다.

“감사해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진정이 된 노유림이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우성진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답했다.

이번에는 노유림이 힘겹게 총각 김치를 깨물고 있었다.

총각 김치는 통째로 먹어야 제맛이다, 라는 고종숙의 지론에 따라 선우네 백반의 총각 김치는 절대 썰어서 나가지 않는다.

그때 우성진이 갑자기 주방 쪽으로 움직였다.

오른손에 가위, 왼손에 집게를 들고 나온 그는 커다란 총각김치를 깍두기 크기로 자르기 시작했다.

무 몸통을 자르고, 이파리까지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우성진은 김치 그릇을 쓰윽- 노유림 쪽으로 밀어 넣었다.

“가, 감사해요.”

이번에도 역시 고개만 슬쩍 끄덕일 뿐인 우성진이었다.

* * *

“거래처한테는 돈 안 받습니다.”

“그래도 받으세요. 이러면 저 다시 여기 못 와요.”

“어차피 자주 오시지도 못하잖아요. 그러니, 그냥 가세요.”

“에이…….”

노유림이 고마워하면서도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맛있게 드셨어요?”

“네. 완전 맛있었어요. 닭은 또 왜 이렇게 크고…… 그렇게 큰데도 왜 이렇게 부드러운지…… 국물도 정말 시원하고요. 아, 그리고 닭죽! 진짜 최고였어요. 삼계탕 찹쌀밥의 아쉬움을 완벽하게 달래 주는.”

“후후. 그렇게 느껴 주셨다니 감사해요.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이고요. 참…… 성진이 형이랑은 좀 친해지셨어요?”

“아…… 저분…… 원래 그렇게 말씀이 없으세요?”

“네…… 혹시 좀 불편하셨어요?”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아예 아니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묘하게 자신을 배려해 주는 그의 마음을 느끼고 난 후에는 그런 어색함도 불편함도 조금씩 사라졌다.

사레가 들렸을 때 티슈를 내주고, 총각김치를 힘겹게 베어 먹고 있을 때 손수 김치를 잘라 주는 그의 모습이 생각났다.

말수는 적지만 묘하게 사람을 편하게 해 주는 그런 느낌의 사람이었다.

노유림이 가게를 빠져나간 후에 우성진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 맛있게 먹었어?”

“응. 맛있더라.”

“다행이네…… 근데…… 얘기도 좀 하지 그랬어?”

“얘기? 아…… 음…… 알잖아. 원래 처음 만난 사람들이랑 말 잘 못 하는 거.”

“하긴…… 내가 미안해. 괜히 또 합석을 시켜서……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었는데…….”

“아, 아니야. 아니야. 참…… 저분 여기 자주 오셔?”

“노유림 사장? 아니…… 시장이 워낙 바쁘다 보니까. 사실 오늘 처음 온 거야. 거래는 매일 하지만.”

“아, 그렇구나…….”

뭐지?

왜 성진이 형의 얼굴에서 아쉬움 같은 감정이 느껴지는 거야.

설마 이 형…… 노유림에게 마음을……?

뭐, 안 될 것도 없지만…… 왠지 기분이 묘하네?

향후 가락시장 최고의 채소 도매상이 될 노유림 사장과…… 다산시장의 스킨헤드가 될 성진이 형…….

아, 물론…… 스킨헤드를 비하하는 건 아니다.

혹시나…… 혹시라도 두 사람이 잘된다면 노유림에게 그 사실을 알려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윤리적이고 인간적인 고민을 해 본 것뿐이다.

어쨌든 나를 통해서 알게 된 두 사람이니…… 노유림이 괜히 A/S를 요청할 수도 있지 않은가.

대머리 될 줄 알았다면, 사귀지도 않았을 거라면서…….

물론 뭐 다 내 뇌에서만 일어난 상상일 뿐이다.

* * *

오늘의 메뉴는 건강식인 반계탕.

이런 메뉴에 이 사람이 빠지면 섭섭하다.

저녁 시간 즈음 가게에 도착한 동양학 박사 정인태 교수님.

“와, 오늘은 저녁에도 만석이네?”

“복날이잖아요. 하루 종일 이랬어요. 마침 저쪽에 자리가 하나 비어 있네요. 저쪽으로 앉으시겠어요.”

“오케이. 근데, 동생. ‘삼복 더위에는 입술에 묻은 밥알도 무겁다’는 속담 아는가? 그만큼 몸도 마음도 지치는 게 바로 이 삼복 더위 기간이라는 거지.”

“아…….”

“동의보감에 보면 우리 선조들도 삼계탕을 즐겨 먹었어. 삼복에는 심한 열이 기를 상하게 한다고 하여, 닭고기로 기를 보해야 한다고 했지. 닭고기는 성질이 따뜻하여 맛이 달고, 허한 것을 보하고 골수를 채우며, 정을 보호해 주고 양기를 북돋아 준다고 되어 있거든. 여기에 성질이 따뜻한 인삼을 같이 넣어 끓여 주면 오장의 기를 보해 주고, 정신과 혼백을 안정시켜 준다고 했지.”

“아…….”

오늘도 정인태 교수님 덕분에 옛 선조의 지혜를 알게 되었다.

건강식이라고 하면 역시나 빠질 수 없는 인물, 주광재도 가게에 나타났다.

“오, 광재. 오랜만이네?”

“네, 형. 잘 지내셨어요?”

“그럼 그럼.”

광재에게 인사를 하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마침 또 자리가 없었다.

그리고, 눈에 띄는 정인태의 앞자리.

오늘은 합석 데이인가?

다행히 두 사람은 흔쾌히 합석을 받아들였다.

* * *

“광재 학생은 평소에 어떤 식습관을 선호하시는가?”

찢어 낸 닭고기를 입으로 가져가며 정인태가 물었다.

“음…… 저는 건강식이요.”

“건강식?”

정인태의 눈이 순간적으로 반짝 빛났다.

“구체적으로 어떤 식인가? 예를 들자면 말이지.”

“아…… 그러니까…… 고기는 굽지 않고 삶아 먹고, 인공조미료가 든 음식은 거의 먹지 않고요. 설탕이나 소금 등도 최대한 멀리하는 편이죠.”

“오…… 아주 좋구먼.”

정인태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고요?”

주광재는 의아한 얼굴로 정인태를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그의 식습관을 좋다고 말해 주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다.

고기를 삶아 먹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고기는 구워야 제맛이지.’ 라든가 ‘그렇게 먹을 거면 고기를 안 먹고 말지.’라는 반응을 보였다.

인공 조미료가 들어 있는 음식을 안 먹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아우, 까탈스러워.’라든가, ‘그렇게 맛있는 거 다 안 먹고 오래 살아서 뭐 할래?’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눈앞에 이 사람은 그걸 좋다고 말했다.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인가?

정인태는 또 나름대로 생각에 잠겼다.

주광재 같은 학생은 그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동의보감 같은 곳에 나온 옛 가르침을 너무 무시하고 살아간다는 게 평소 그의 생각이다.

단것, 짠 것, 구운 것,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고 그것에 완전히 길들여져 있다.

그러다 보니 ‘맛있다’라고 하면 대부분 특정한 맛이 강하게 나는 자극적인 음식들이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이 학생은 건강식을 좋아한다고 했다.

사실 그로서는 잘 믿어지지 않는 일이긴 했다.

한창 식사를 하는 도중, 주광재가 물었다.

“교수님, 닭고기를 소금에 안 찍어 드시네요?”

“아…….”

아닌 게 아니라 정인태의 소금 그릇은 물기 하나 없이 깨끗했다.

“동의보감에는 이렇게 나와 있지. ‘서북인은 소금을 적게 먹어 수명이 길고 병이 적으나 동남인은 짠 것을 즐겨 수명이 짧고 병이 많다.’ 라고. 서북인과 동남인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갑론을박이 있지만, 중요한 건 이거지. 조선 시대에도 소금을 과하게 먹는 게 건강에는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얘기.”

“아, 그렇군요.”

주광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처음 만난 거지만, 정인태는 동의보감이나 동양학 등을 얘기할 때는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자신이 하고 있는 학문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거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저렇게 열정이 넘치는 교수님에게 수업을 듣는다는 건, 참 괜찮은 일일 거 같다는.

정인태의 말은 계속됐다.

“탕의 육수와 김치에 이미 충분한 소금이 들어 있는 것 같으니…… 굳이 이 닭고기를 먹으면서까지 소금을 찍어 먹을 필요는 없지. 너무 과하거든. 그나저나…… 광재 학생은 왜 소금을 안 찍어 먹는 건가?”

“아…… 밥을 먹으면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긴 하지만…….”

주광재는 가족이 앓았던 병에 얽힌 이야기를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했다.

얘기를 다 듣고 난 정인태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런 사연이 있어서 그랬구먼…….”

이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됐다고 생각하는 터였다.

정인태가 동양학 공부를 하며 옛 선조들의 지혜를 이어 가기 위해 건강식을 하는 거라면 주광재는 가족력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건강식을 하게 됐다는 것.

서로의 사연을 알게 되자, 두 사람의 심리적 거리가 마주 보고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물리적 거리만큼 가까워진 듯했다.

“까탈스럽다고 욕먹을 때가 제일 억울해요. 까탈스러운 게 아니라 건강하게 먹고 살자는 건데…….”

“내 말이 그 말 아니겠는가? 옛 선조가 남긴 지혜를 따라 건강하게 먹고 건강하게 살자는 건데 다들 왜 그러는지…….”

“맞아요. 그게 다들 안 아파 봐서 그래요. 저야 워낙 주변에서 아픈 사람들을 많이 봐서.”

“그렇지, 그렇지. 망양보뢰(亡羊補牢) 라는 말이 있네. 양을 잃고 나서야 울타리를 고친다는 뜻이지.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과 같은 뜻이야. 이걸 건강에 대입하면 뭐겠는가?”

“건강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들이 건강을 챙기기 시작한다는 거 아닌가요?”

“그렇지, 그렇지! 하지만, 이미 그때는…….”

“늦었지요. 몸은 이미 상해 있을 테니까.”

“크으…… 광재 학생 아주 명석하구먼. 자네 같은 똑똑한 친구가 동양학을 배워야 하는데…….”

“과찬이십니다. 교수님이야말로 정말 귀에 쏙쏙 들어오게 잘 가르쳐 주시네요. 이런 교수님만 계시면 학교 수업이 참 재미있을 텐데요. 하하하.”

“하하하하하. 과찬이네, 과찬이야.”

두 사람은 이 백반집에 오직 두 사람만 남은 듯 화기애애한 대화를 이어 갔다.

처음 만난 사이지만, 참 죽이 잘 맞는 듯했다.

* * *

“맛있게 드셨어요? 광재도 맛있게 먹었어?”

“네, 동생 덕분에.”

“네, 형 덕분에요.”

“후훗. 두 분 표정을 보니 왠지 부쩍 가까워진 것 같은데요. 음식이 맛있어서 그랬나?”

슬쩍 넉살을 떨어 본다.

“음…… 그런 것도 있겠지만, 광재 학생이 워낙 좋은 사람이라서 식사하는 내내 너무너무 즐거웠지 않았겠는가. 하하하.”

“저야말로 교수님이 워낙 멋진 분이셔서 같이 식사를 하는 동안 너무너무 즐거웠습니다. 하하하.”

에잉?

이 분위기는 뭐지?

모르는 사람끼리 합석을 시켜 놓은 터라 내심 불안하고 미안한 마음이 있던 차였다.

그런데…… 두 사람의 반응은 마치…… 소개팅 자리에서 천생연분을 만나서 ‘우리 오늘부터 1일이에요.’라는 말을 하고 있는 그런 남녀를 보는 것 같았다.

“모르는 분끼리 합석을 시켜 드려 죄송했었는데…….”

“에헤이. 그런 소리 하지 말게나.”

“에이…… 오히려 너무 감사하죠. 이런 교수님을 소개해 주셔서.”

“…아…… 뭐 그렇다면 저야 두 분께 감사하죠. 하하.”

“아니야, 아니야. 내가 동생한테 고마워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멋진 동생을 나한테도 소개해 줬으니. 하하하.”

“동생……이요? 그럼 오늘부터 저 교수님을 형이라고 불러도 되요?”

“아, 그렇고 말고! 아우! 오늘 밥값은 내가 계산할 테니 지갑 넣어 두시게!”

끝까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가게 밖을 나간 두 사람.

어깨동무까지 한 두 사람은 아직 할 얘기가 남았는지 2차에 간다고 했다.

뭐랬더라? 쌍화탕을 먹으러 간다고 했었나?

하여간, 무슨 전통 찻집에 간단다.

두 사람에게 참 어울리는 2차 장소였다.

하루 만에 거의 소울 프렌드가 되어 버린 듯한 두 사람.

생각해 보니 두 사람 사이에는 ‘건강식’이라는 공통점이 있던 거였다.

가족력으로 인해 건강식을 하는 광재와 동양학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옛 선조들의 식이습관을 따르는 정인태.

어떻게 보면 두 사람…… 진짜 잘 만난 거다.

오늘 메뉴가 반계탕이어서 그랬나.

시장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성진이 형과 노유림 사장도 그렇고, 건강식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정인태 교수와 광재도 그렇고…….

왠지 서로의 반쪽을 만나 온전해진 것만 같은 그런 느낌.

물론…… 그냥 느낌일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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