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혜승이의 아픔, 그리고 수제 치킨 (2)
어떤 아픔이 있는 사람은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과 자연스럽게 동질감을 느낀다.
오늘 혜승이가 정은이에게서 느꼈던 그런 감정들 같은 거 말이다.
물론, 지금 혜승이의 모습에서 아까의 그 심각하고도 진지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우와…… 이거 진짜 맛있다…… 아니 오빠는 왜 백반집을 해요? 치킨집 하면 진짜 초대박 날 것 같은데?”
입가에 튀김 가루를 잔뜩 묻힌 채 헤헤 웃으며 말하는 혜승이.
말을 할 때마다 입안에서 씹고 있는 치킨이 보인다.
진짜 최악이다.
저런 애가 여배우라고?
톱 배우라고?
이거 아무리 봐도 내 기억이 조작된 것 같다.
그래.
사람의 기억이란 게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이름이 같고 생긴 게 좀 비슷하고 똑같이 많이 먹는다고 해서 아무나 톱 배우가 되는 건 아니지.
흠…… 근데, 많이 먹는 거에서 좀 걸리기는 한다.
저렇게 생긴 유혜승이라는 사람이 ‘저렇게까지’ 많이 먹을 사람일 확률은 매우 매우 희박하다.
그러니까…… 저런 사람이 두 사람일 가능성이 말이다.
아, 물론 이초희라는 괴물도 있긴 하지만…….
걔는 이름이 이초희잖아.
“치킨집? 그건 맨날 닭만 튀겨야 되잖아. 지겨울 것 같은데.”
“백반집도 맨날 밥만 만들어야 되잖아요. 지겨운 건 매한가지 아닌가?”
“아니. 달라 달라.”
난 단호하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두 가지 다…… 아니 수많은 업종의 외식업을 경험해 본 사람으로서 치킨은 정말 쉽지 않은 업종이다.
경쟁이 심해서 살아남기 쉽지 않다는 건 뭐 문제될 게 없다.
지금 당장만 해도 이 머릿속에는 치킨집으로 성공할 만한 아이템이 수십 개는 떠오르니까.
그런 것들도 기회가 되면 하나씩 시작할 예정이지만…… 하여간, 가장 큰 문제는!
좋은 기름으로만 튀기기 위해 하루에 60개를 튀기든 100개를 튀기든 매일 치킨을 튀기기 시작하는 순간 재앙이 찾아온다.
그 재앙은 바로…… 치킨을 먹기 싫어진다는 거다.
하루 종일 치킨을 튀기고 양념을 묻히다 보면 그냥 기름 냄새만 맡아도 아주 진절머리가 난다.
머리와 옷에 치킨 기름 냄새가 스며들고 가게에서뿐만 아니라 집에서까지 치킨 냄새가 난다.
그냥 내 스스로가 치킨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치킨을 먹고 싶겠는가?
치킨이 먹기 싫어진다는 건 엄청난 문제다.
다시 스물다섯 살로 돌아오면서 했던 나의 다짐이 깨지는 거니까.
나의 다짐이 무엇이었나?
즐겁게 장사를 하면서 행복하게 살겠다는 거.
무엇보다 맛있는 음식을 원 없이 즐기면서 살겠다는 거 말이다.
근데 치킨을 못 먹는다?
치킨이 맛이 없어진다?
냄새만 맡아도 싫어진다?
이것만큼 끔찍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치맥이 없는 세상이라니.
그래서 늘 생각한다.
이번 생에는 치킨 브랜드를 만들지언정 치킨을 튀기지는 않겠다고.
레시피를 개발할지언정 그 레시피로 하루 60개씩 치킨을 튀기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질문을 한 혜승이는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얘는 일부러 질문을 해서 내가 입을 열게 만든 다음, 그사이에 자기 혼자 치킨을 독차지하려고 했던 건 아닐까?
궁금하지도 않은 걸 물어보고 나를 생각하게 만든 건 그저 내가 치킨에 집중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고도의 술책 아니었을까?
그때 이 아귀의 손이 네 개 중 마지막 하나 남은 닭 다리를 향하고 있었다.
탁-
아귀의 손목을 확 잡아챘다.
“하나는 양보해라. 인간적으로.”
아, 얘가 인간은 아니긴 하지.
“헤헤헤…….”
민망한 듯 헤헤 웃는 녀석의 손엔 여전히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포기하지 않았다는 거다.
하지만, 나도 이건 포기할 수 없다.
네 개 중에 세 개 주고 하나 먹겠다는데…… 이건 솔직히 내가 먹어야지.
아무리 아귀를 위한 특별 간식이라지만.
어렵게 획득한 닭 다리를 오른손에 쥐었다.
색깔 참 곱다.
내가 튀겼지만 참…… 황금색 튀김옷이 적절한 두께로 입혀진 닭 다리의 모습이 참…… 아름답다.
먼저 튀김옷과 살이 두툼하게 뭉쳐 있는 살을 한 움큼 베어 문다.
바스락.
튀김옷의 바삭함이 느껴지나 싶더니 고소한 닭 껍질의 진한 맛이 느껴진다.
어렸을 때는 퍽퍽한 닭 가슴살을 좋아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이 닭 껍질이 좋아진다.
기름기가 많은 닭 껍질이 튀김옷과 만나 바삭하게 튀겨지니…… 맛이 없다면 사기지.
닭 껍질 튀김의 고소한 맛이 느껴지나 싶더니 어느새 부드러운 닭 다리살이 혀에 닿는다.
지방이 적절하게 섞여 있는 닭 다리살은 언제 어떻게 먹어도 맛있다.
첫입의 감동은 닭 다리를 뜯는 동안 내내 이어진다.
이 부위는 정말 맛없는 구석이 없다.
다리뼈에 얇게 붙어 있는 마지막 살점까지 다 떼어 먹고 마지막에는…… 닭 다리 관절 끝에 붙어 있는 연골까지 오도독 씹어 먹는다.
발골 완료.
내 오른손에 남아 있는 건 얼마 전까지 두툼한 닭 다리였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허연 뼛조각이다.
최덕호 사장님이 공급해 준 닭이 신선하긴 했나 보다.
이렇게 뼈가 희디희고 고운 걸 보면.
그렇게 만족스럽게 닭 다리를 뜯고 접시를 본 순간…….
“야!!!”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수북하게 튀겨 두었던 치킨 두 마리가 깔끔하게 사라져 있었던 것.
그리고 그 앞에는 아귀 유혜승이 헤헤헤 하고 입을 벌리고 웃고 있었다.
아…… 진짜 저 아귀 같은 것…….
물론, 저 아귀는 그 치킨을 다 먹고서도 전혀 배가 부른 것 같지 않았지만…….
하긴, 그러니까 아귀지 달리 아귀겠는가.
선우네 백반이자 우리집 옥상.
치킨은 다 털렸고, 치킨 대신 닭 다리 모양 과자 대용량 사이즈를 들고 혜승이와 함께 올라왔다.
나는 500밀리미터 맥주 캔, 혜승이는 1.5리터 콜라 페트를 각자의 손에 쥐고.
한여름이긴 했지만, 평상에 앉아 있으니 아주 가끔씩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도 했다.
그렇게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이 참 반가웠다.
선풍기나 에어컨 바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오늘 힘들었지?”
평상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혜승이에게 넌지시 물었다.
“아…… 엄마한테 얘기 들었구나?”
“엄마?”
“원장님이요. 원장님이 우리한테는 엄마나 다름없으니까.”
“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뭐, 원장님도 일부러 그러신 것 같진 않고 그냥 네가…….”
“에이. 그렇게 구구절절 늘어놓을 거 없어요. 내 어린 시절 얘기가 무슨 국가 기밀도 아니고. 그리고…… 이미 잊었어요. 아빠란 존재는.”
“음…….”
아빠란 존재를 잊는다…….
그건 아빠가 돌아가시거나 아빠를 잃어버린 것과는 다른 뉘앙스다.
기억 속에서 아빠의 존재를 일부러 지워 냈다는 뜻이다.
기억하기 싫었으니까.
그건 또 한편 매우 슬픈 일이고.
“그럼 왜 오늘은 그렇게 막 나섰던 거야? 자칫 위험할 수도 있었는데.”
“음…… 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본능 같은 거였나 봐요. 제 어렸을 때와 똑같이 당하고 있는 정은이를 보자마자 다른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어요. 그저 저 어린애를 구해 줘야겠다는 생각 말고는…… 그 이후로는 사실 기억도 잘 안 나요. 헤헤.”
혜승이는 애써 밝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 웃음이 진짜 웃음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안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그렇게 무작정 나서지 마. 그러다 정말 큰일 나.”
“오…… 나 지금 걱정해 주는 거예요?”
“그래. 걱정하는 거다. 사장이 직원 걱정하는 게 당연한 거지. 네가 거기서 다치면 내가 다 책임져야 되는 거거든. 외근이었으니까.”
“아…… 그렇구나. 근데…… 오빠는 사장 아니라니까요?”
“끄응.”
그래.
사업자등록증상 사장은 내가 아니라 두 부모님이지.
하여간, 세상을 너무 일찍 알아도 문제라니까…….
“하여간, 조심하라고. 좀. 먹는 것도 좀…… 조심해서 먹고. 아무리 그래도 그걸 다 먹냐. 그걸 다 먹어?”
“헤헤헤. 그건 조금 미안해요. 아니……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너무너무 맛있어서 계속 먹다 보니까…….”
“크흠…….”
또 너무너무 맛있었다니까 어째 할 말이 없어지네?
어떨 때 보면 참 여우라니까.
사람 마음을 이리저리 흔들고 갖고 노는 게 말이다.
이러니까 배우라는 직업을 가졌나 싶기도 하고…….
“야, 아무튼 다음부터는 닭 날개 하나 정도는 더 남겨 놔라. 그 정도 예의는 갖춰야지. 후에 배우가 될 사람이…….”
“배우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차.
“야, 뭐 그냥 그렇다고, 인마. 그러니까 닭 날개 하나 정도는 꼭 남기라고. 알겠어?”
이럴 땐 그냥 대충 얼버무리는 게 최고다.
뭔가…… 굉장히 길었던 오늘 하루도 이렇게 지나간다.
그나저나 내일 반찬 뭐 하지?
하도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다 보니 내일 메뉴 구상도 못 했다.
* * *
반찬 구성은 못 했지만, 별걱정은 없다.
백반집 좋다는 게 뭐겠는가?
특별한 메인 요리가 없어도 맛있는 밥과 반찬이 있다면 충분히 손님들을 감동시킬 수가 있다.
사실 애초에 백반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뭔가 특별한 메뉴보다는 ‘집밥’을 먹고 싶어서 오는 경우가 많다.
마치 집에서 먹는 것과 같은 밥과 반찬으로 한 끼를 맛있게 먹는 것을 기대하는 거다.
물론, ‘맛있게 먹는다’는 게 핵심이기는 하다.
장사가 잘되는 백반집이라는 건, 곧 밥도 맛있고, 반찬도 맛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거니까.
오늘의 찌개는 너로 정했다.
바로 돼지고기 김치찌개.
이건 선우네 백반에게 있어서는 전가의 보도 같은 거다.
왜냐?
바로 최고의 김치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기 때문.
돼지고기랑 선우네 김치를 넣고 팍팍 끓이면 다른 양념은 없어도 될 정도로 맛있으니까.
반찬은 흔히 먹지만 매일 먹어도 맛있고 익숙한 그런 반찬들로 준비할 예정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맛은 바로 아는 맛이다.
반대로 말하면 아는 맛만큼 사람들의 군침을 돌게 하는 것도 없다는 것.
‘아는 맛이 무서운’ 반찬들 시리즈의 첫 번째는 바로 비엔나 소시지 볶음이다.
비엔나 소시지, 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추억’이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도시락을 싸서 다니던 학창 시절에 비엔나 소시지는 언제나 최고의 반찬 중 하나였다.
비엔나 소시지는 야채랑 볶아도 맛있고, 부대찌개에 넣어도 맛있고, 떡볶이에 넣어 먹어도 맛있다.
사실 그냥 전자렌지에 넣고 잠깐 데워서 맥주 안주로 해도 그만이다.
칼집을 넣어도 맛있고, 칼집을 안 넣어서 열기를 이기지 못한 소시지가 중간중간 그냥 터져 있어도 맛있다.
언제 어떻게 어떤 모양으로 먹어도 맛있지만, 오늘은 좀 모양을 내어 보기로 했다.
“삼촌. 이거 아랫부분만 여덟 등분으로 칼집 내주세요.”
“오호…… 이렇게나 많은 걸요?”
진민호의 앞에 깔려 있는 소시지는 어림잡아도 수백 개가 넘어 보였다.
하긴, 오늘 하루에 오는 손님들 전부를 위한 반찬이니…… 많을 수밖에 없다.
당황해하는 민호 삼촌에게 엄지를 척 내밀어 보인다.
“삼촌은 할 수 있습니다!”
“음…… 알겠습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진민호는 결연한 의지로 그의 중식도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