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계곡의 맛 (2)
도토리묵 무침으로 입가심을 한 다음, 내 시선은 부추를 잔뜩 머금은 채 끓고 있는 오리백숙으로 향했다.
노르스름한 국물은 딱 보기에도 건강해 보였고, 커다란 냄비의 바깥까지 튀어나온 두 다리는 오리의 커다란 크기를 실감하게 했다.
나는 튀어나온 커다란 다리 하나를 통째로 뜯어내어 접시에 옮겨 왔다.
와- 하는 탄성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넓적다리 살과 함께 뜯겨져 나온 오리 다리가 그야말로 손바닥만 했었기에.
산채의 두목처럼 큰 다리를 그대로 집어 입에 가득 물었다.
지방질의 비율이 높아 기름맛이 진하게 나는 다릿살의 풍미가 그대로 느껴졌다.
역시 고기는 크게 뜯어야 맛이다.
그래야 이 가득한 풍미를 확 느낄 수 있으니까.
적당히 살점을 씹은 후 젓가락으로 한 움큼 부추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부드러우면서도 질긴 부추 이파리의 질감이 그대로 전해지면서 부추 특유의 향이 입안에 퍼져 나갔다.
오리 살점을 씹으며 느껴졌던 미미한 느끼함마저도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마력의 부추.
정말 백숙과는 환상의 조합이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양옆에 자리한 두 괴물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갑자기 이 두 사람에게 고마워졌다.
이 둘 덕분에 이렇게 많이 시키지 않았더라면 언제 산적 두목처럼 이렇게 풍성하게 오리 다리를 씹을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다리가 아직 하나 더 남았다.
평범한 사람들이랑 왔으면 셋 중에 오리 다리를 누가 먹느냐 하는 문제로 민감해질 수도 있다.
- 동생이니까 네가 먹어.
- 아니야. 난 어제 치킨 먹었어. 형이 먹어.
- 그래도 어떻게 그래. 빨리 네가 먹어.
그렇게 오리 다리는 이 접시 저 접시를 오가다가 다 식어 버린다.
때로 이런 경우까지 있다.
그 맛있는 걸 왠지 누군가 먹기가 그래서 끝까지 다리가 남아 있는 경우.
다들 욕심쟁이로는 보이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말라 비틀어진 그 오리 다리를 보는 건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런 일을 지금은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게 새삼 고마웠던 거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이미 두 사람은 자기 몫의 오리 백숙을 거의 거덜 내고 있었다.
자기들의 냄비를 다 비워 내고 내 테이블로 침공해 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그 안에 최대한 많이 먹어 두어야 한다.
전쟁을 대비해 마트에서 사재기를 해야 하는 사람들처럼.
다음으로 내 손이 간 음식은 바로 해물파전.
해물파전은 정말 흔한 음식이면서도 생각보다 맛있게 만들기가 어려운 음식이기도 하다.
대학가 근처에는 피자 두께처럼 두껍게 반죽옷을 만들어서 부치는 식의 해물파전이 있다.
개인적으로 크게 선호하지는 않는 스타일.
해물파전에서는 밀가루의 맛보다는 쪽파의 맛과 해물의 맛이 더 많이 느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집 해물파전은 그런 점에서 아주 합격이었다.
유명한 일본 작가의 농구 만화 ‘슬램덩크’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 왼손은 그저 거들 뿐.
슛을 쏠 때, 왼손은 오른손을 철저히 보조해 주는 역할만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미.
해물파전에서의 반죽옷도 마찬가지이다.
- 반죽옷은 그저 거들 뿐.
일렬종대로 늘어선 쪽파와 그 위에 푸짐하게 얹어 있는 각종 해물을 흩어지지 않게 거드는 역할이 바로 반죽옷의 역할이 되어야 한다.
길게 늘어선 쪽파를 한 움큼 집어 뜯어낸다.
반죽옷이 얇아서인지 부드럽게 분리되는 쪽파들.
그 위에 오징어, 새우 등의 해물과 청양고추 한 조각을 얹은 후 양념간장을 휘- 뿌린다.
입을 크게 벌려 해물파전을 맞이한다.
기름에 튀겨진 쪽파에서 단맛이 돈다.
중간중간 씹히는 오징어의 쫄깃한 식감에 입안은 한층 즐거워지고, 새우의 진한 감칠맛에 뇌의 어느 한 부분이 찌릿- 하고 울리는 듯하다.
거기에 느끼함을 잡아 주는 청양고추의 매콤한 맛.
마지막으로 간을 잡아 주는 간장의 짭쪼름함.
그야말로 완벽한 한입이다.
* * *
한방오리백숙 냄비를 거덜 낸 이초희의 시선이 닭도리탕으로 향했다.
오리백숙과 달리 붉은 색깔을 띠는 닭도리탕.
한눈에 보기에도 진하고 칼칼해 보이는 국물.
이미 오리백숙 한 냄비를 다 해치운 뒤인데도 꿀꺽- 하고 침이 삼켜졌다.
이초희는 집에서 챙겨 온 위생장갑을 갈아 끼웠다.
오리백숙에서 종목이 바뀌었으니 위생장갑도 갈아 끼워야 한다.
무지막지한 식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녀의 이 깔끔함의 근원은 바로 엄마였다.
엄마는 늘 이렇게 말씀하신다.
- 초희야. 많이 먹는 건 좋아. 하지만…… 더럽게 먹는 건 아무도 좋아하지 않아.
그녀는 이 말을 이렇게 받아들였다.
깨끗하게만 먹을 수 있다면 아무리 많이 먹어도 좋게 보일 수 있구나, 라고.
물론, 다소 오해의 소지는 있을 수 있다.
엄마는 그렇게까지 많이 먹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었을 테니까.
이초희는 손가락 마디 끝까지 위생장갑을 끼우고, 발골 작업에 들어갔다.
먼저, 다리부터.
토종닭의 다리 크기는 오리와도 비견될 만한 크기였다.
이초희는 볼링핀 모양으로 잘 정육된 다리를 집어들고 뜯기 시작했다.
입은 최대한 크게 벌렸다.
벌건 국물이 입 주위에 묻어 더러워 보이지 않도록.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입 주위를 잘 닦아 주었다.
놀라운 건, 그렇게 닦아 가며 음식을 먹는데도 그 속도가 전혀 느리지 않다는 거였다.
이초희는 세심하게 뼈에 붙어 있는 살들을 모두 발라냈다.
살들을 다 발라낸 후에는 다리 끝에 붙어 있는 연골까지 오도독 씹어 먹었다.
그러자 이초희의 앞에 남은 건 새하얗게 발골된 닭다리 뼈였다.
그야말로 락스로 세척을 한 것처럼 새햐얗다.
저걸 방금 오직 인간의 입으로 해낸 거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의 깔끔함.
완벽한 발골 솜씨였다.
이후에도 그녀의 발골은 계속됐다.
그녀의 입에 들어갔다 나온 닭봉은 짧은 흰 막대가 되어 나왔다.
닭날개는 하나하나 분리되어 얇은 이쑤시개가 되어 나왔고.
가슴뼈 사이사이에 붙어 있던 살은 완벽하게 발라져 앙상해져 있었다.
하지만, 밥을 먹던 나머지 일행조차 그 식사를 멈추고 잠시 지켜봐야 했던 상황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발골된 목뼈였다.
그녀의 입에 들어갔다가 나온 닭목은 살점 하나 없이 그저 뼈의 모양만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박물관에 전시된 동물의 유골처럼.
이초희의 입은 목뼈에 붙어 있던 살아 생전의 닭의 흔적들을 모조리 지워 내 버렸다.
야구 선수의 말도 안 되는 호수비를 본 것처럼 절로 박수가 나오는 장면이었다.
* * *
유혜승도 그녀의 방식대로 ‘계곡의 맛’을 즐기고 있었다.
먹는 양은 비슷하지만, 이초희와 유혜승의 먹는 스타일은 완전히 상반됐다.
이초희가 한 가지 음식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면서 깔끔하게 많이 먹는 스타일이라면…….
유혜승은 여러 가지 음식들을 번갈아 먹으면서 최대한 다양한 맛을 한꺼번에 느끼는 스타일이다.
물론, 계곡에서도 그녀들의 스타일은 변하지 않았다.
유혜승의 시작은 두부김치였다.
두부 세 조각을 앞접시에 덜어 낸 그녀는 이어서 잘 볶아진 김치를 커다랗게 한 젓가락 집어 두부 위에 올렸다.
그리고는 바로 입으로 직행.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볼이 열심히 움직이는 동안 그녀의 젓가락이 향한 곳은 바로 닭도리탕.
커다란 닭다리를 하나 집어든 그녀는 채 두부김치를 다 씹기도 전에 닭다리를 입으로 밀어 넣었다.
왼손으로 닭다리를 집고 열심히 입을 놀리는 도중에도 그녀의 다른 손은 쉬지 않았다.
유혜승의 숙련된 젓가락질은 이번엔 해물파전을 공략했다.
커다란 접시에 동그랗게 부쳐져 있던 파전은 그녀의 젓가락질 한 번에 거의 절반 가량이 날라가 버렸다.
그녀는 왼손에 쥐고 있던 닭다리를 뼈만 남긴 채로 내려놓자마자 커다란 전을 입으로 가져갔다.
유혜승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 올랐다.
- 너 식탐 있냐?
그 말은 그녀에게 늘 상처로 다가왔다.
그저 자신의 식성대로 맛있게 먹을 뿐인 그녀에게 사람들은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리고, 그 말과 함께 이어지는 말이 그녀에게는 더 큰 상처였다.
- 그래…… 못 먹고 자랐으니까.
그녀도 잘 알고 있다.
어린 시절 배가 쓰려서 아플 정도로 굶었던 그녀의 기억이 ‘식탐’이라는 형태로 그녀에게 나타났다는 걸.
실제로 그녀는 먹을 걸 보면 잘 참지 못 다.
어렸을 때는 더 심했었고.
하지만…… 그녀가 잘 먹는 건 꼭 식탐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그녀는 그냥 원래부터 잘 먹는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에게 노래를 잘하는 재능이 있는 것처럼 그녀에게는 잘 먹는 재능이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영화에 캐스팅이 된 그날 이후 유혜승은 큰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
배우가 돼서 크게 성공해야겠다는 마음?
뭐, 그런 마음도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그녀를 행복하게 하는 건…….
그저 못 먹고 산 고아 아이의 식탐일 뿐이었던 ‘잘 먹는 재능’이 바로 배우 캐스팅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번의 캐스팅으로 인해 그녀도 자신감을 얻은 것이다.
아. 보잘것없이 느껴졌던…… 때로는 나의 약점으로 여겨졌던 그것이 이렇게 쓸모 있을 때도 있구나.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던 나도…… 뭔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거구나.
이 ‘각성’은 지금의 그녀에게 정말 큰 힘이 되었다.
이렇게 행복하니, 음식이 잘 안 넘어갈 수가 있나.
그녀는 순식간의 자기 상 위에 놓여 있던 음식을 해치워 버렸다.
* * *
따끈한 두부 위에 잘 볶아진 새콤한 김치를 얹고 있던 나는 갑자기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계곡이라 한여름에도 시원하구나, 하는 내 생각을 비웃듯이…… ‘그녀’들이 어느샌가 내 앞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든 채로.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나를 빤히 바라보며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가 먹지 말라고 해도 먹을 애들이다.
어느샌가 상 위에는 불판이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불판 위에는 지글지글 삼겹살이 구워지고 있었다.
오늘 계곡 음식의 마지막 하이라이트인 삼겹살 구이.
나로서는 이미 배가 빵빵하게 부풀어 올라 더 먹을 수도 없을 것 같은데, 앞에 있는 두 사람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
마치 쫄쫄 굶은 상태로 고기가 익기를 기다리는 듯한 저 자세.
나는 다시 한번 나와는 격이 다른 두 존재를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확실히 계곡이라 한여름에도 서늘하구나.
그래.
계곡이라 그런 걸 거야.
순식간에 삼겹살을 해치운 우리는, 사실은 이초희와 유혜승은, 계곡 맛집 투어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움직였다.
한여름, 계곡에 오면 늘 생각나는 그 음식.
시원하게 한입 베어 물면 뜨겁고 습한 여름 기운이 싹 사라지는 것만 같은 그 음식.
아, 먹기 전에 계곡물에 발을 담그는 걸 빼놓으면 안 되는 그 음식.
우리는 큼직하게 잘라 낸 수박을 하모니카처럼 손에 쥐고, 계곡물에 발을 담근 채로 나란히 앉았다.
촤르르 촤르르 매미는 울고, 산 위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는 시원하다.
신나게 떠드는 아이들의 목소리마저 왠지 자연이 내는 소리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맛있는 음식과 시원한 바람, 그것들을 같이 즐길 수 있는 좋은 사람들까지.
우리는 각자 말없이 마지막 계곡의 맛을 한껏 즐겼다.
오늘은 그야말로 피서(避暑).
한여름의 더위를 완벽히 피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