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그녀가 좋아하던 메밀 소바
삼색이가 내 종아리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얼굴을 박치기하듯 정강이에 부딪히다가 놀란 듯 슬쩍 물러난다.
그러다가 이내 다시 얼굴을 부닥쳐 온다.
흔적을 남기듯 볼을 다리에 부벼 온다.
그르릉그르릉.
녀석에게서 기분 좋은 울림이 들려온다.
열대야로 뜨거운 여름밤.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체온에 몸은 달아오르지만, 그래도 녀석과의 교감이 좋다.
그깟 더위 때문에 녀석과 소통할 수 있는 이 시간을 포기할 수는 없다.
“삼색아. 오늘 하루도 잘 있었어?”
“에옹. 에옹.”
삼색이는 마치 내 질문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소리를 낸다.
소리가 흘러 나올 때마다 녀석의 작은 몸이 통째로 움찔거린다.
나와 대화를 하기 위해 녀석은 온 힘을 다하고 있는 거다.
그런 녀석이 한없이 귀엽다.
녀석의 턱을 만지고, 녀석의 볼에 손가락을 비빈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그리고, 비장의 무기.
녀석의 엉덩이를 팡팡 때려 준다.
일명 ‘궁디팡팡’.
삼색이의 가르릉거리는 소리가 더 커진다.
그리고, 녀석이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 찾아온다.
바로 츄르 타임.
인간들이 기다란 포에 든 홍삼을 매일 하나씩 짜 먹는 것처럼 삼색이도 기다란 포에 든 츄르를 매일 하나씩 짜 먹는다.
물론, 스스로 짜 먹는 건 어려우니까…… 성실한 인간 집사에게 짜달라고 시킨다.
난 기꺼운 마음으로 츄르의 포를 벗긴다.
짭짭짭.
츄르를 받아먹는 녀석의 입에서 정말 맛있는 소리가 들린다.
나도 한 입 먹어 보고 싶을 정도로 그 소리가 생생하다.
물론, 먹어 본 적이 있다.
냄새로만 보면 한없이 비릴 것 같은 그 츄르에서는 정녕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이게 이렇게 맛있다고?
아무런 간도 안 된 이 액체가?
배불리 츄르를 해치운 녀석이 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눕는다.
마치 취할 걸 다 취했다는 듯 녀석은 나에게 줬던 관심을 완전히 회수했다.
모름지기 고양이는 이래야 맛이다.
어떨 때는 한없이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또 어떨 때는 완전히 남 같다.
그 매력에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이 인간 ‘츄르 따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녀석의 관심이 사라지자 힘이 빠진 나는 평상에 벌러덩 누웠다.
그제야 하루의 피로감이 덜컥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용하게 잠깐 누워 있자, 오래된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고양이를 사랑했던 전 부인과의 기억이.
사실 전 부인도 아니다.
난 지금 새로운 삶을 살고 있고, 여기서는 한 번도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부인과의 기억은 여전하니…… 어쨌든 그 사람을 전 부인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결혼하자마자 그녀가 내게 요구한 건 바로 아이를 갖는 거였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특히 생명은 그저 얻으려고 하면 얻어지는 그런 자판기의 캔 음료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 당시의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아이가 없는 것에 대한 허전함 때문인지 아내는 어느 순간 고양이를 기르기 시작했다.
전생에서만 해도 나는 동물과는 전혀 인연이 없었다.
그러니, 아내가 그렇게 동물을 아끼는 것에 대해서도 지지를 하지 못했고, 공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반대를 하지 않았을 뿐.
아니, 그 말도 옳지 않다.
너무 바빠서 관심을 두지 못했다는 말이 맞겠지.
서로 간의 관심이 떨어진 관계는 당연히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어느 순간 휙- 하고 뒤돌아 보니 나와 아내 사이에는 폭이 1킬로미터는 넘어 보이는 넓은 강이 자리하고 있었다.
손을 내밀어도 닿을 수 없고, 불러도 대답할 수 없는 먼 거리.
어쩌면 서로의 얼굴조차도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거리.
그 건너편에서 아내는 여러 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텅 빈 눈으로.
- 우리…… 여기까지인 거겠지?
- …아마도?
그게 우리의 마지막 대화였다.
이혼을 하고 난 후에도 바뀐 건 없었다.
나는 미친 듯이 일을 했고, 무언가가 비어 있다는 느낌조차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면 어떤 문장 같은 것이 내 안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 난 정말 최선을 다한 걸까?
그런 의문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최선을 다했던 걸까.
아내가 키우는 고양이들에게 단 한 번의 관심이라도 가졌던 걸까.
아내의 말에 제대로 귀를 기울인 적이 있긴 했던 걸까.
그 모든 의문은 결국 ‘후회’로 남았다.
물론, 그게 후회라는 걸 안 것도 꽤 나중의 일이지만.
저기 흐드러지게 누워 잠을 청하고 있는 삼색이에게 내가 유독 애정을 쏟는 건, 그런 후회 때문인지도 몰랐다.
물론, 지금은 모든 걸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감정이 다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아니, 어쩌면 이 후회라는 감정을 연료로 삼고 이번에는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걸 테니까.
에잇.
전 부인이 생각난 김에 그녀가 좋아하던 음식이나 만들어 먹어야겠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으려는 생각에 갑자기 무거웠던 기분이 완전히 가벼워졌다.
그녀의 또 다른 최애 음식은 다행히 이런 계절에 딱 맞는 음식이다.
* * *
메밀 소바.
아내는 다소 까다로운 편이었다.
여름철이면 그 까다로움은 입맛 없음으로 인해 더 심해졌다.
그런 아내가 삼시 세끼, 하루 종일, 일주일 내내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음식이 바로 이 메밀 소바였다.
메밀 소바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맛간장을 만들어야 한다.
냄비에 진간장, 멸치액젓, 물, 설탕, 맛술, 생강, 다시마를 넣고 중불로 끓여 준다.
간장이 바르르 끓어올라 넘치려고 하면 불을 끄고, 미리 준비해 둔 가쓰오부시를 넣어 준다.
그 상태에서 맛이 우러나도록 5분 정도 방치해 둔다.
맛을 우려내는 작업이 끝나면, 간장을 체에 걸러 실온에 식힌 후, 냉장 보관해 준다.
물론, 이미 냉장고에 시원하게 보관해 둔 맛간장이 이미 있다.
오늘은 그걸 쓰면 된다.
메밀 면은 4분 정도 삶으면 적당하다.
물이 끓어올라 넘치려 할 때마다 대접에 미리 담아 둔 찬물을 부어준다.
면이 끓는 동안은 간단한 고명을 준비할 시간이다.
김은 채 썰 듯 가위로 얇게 잘라 주고, 대파는 파란 부분만 역시 채 썰 듯 얇게 저며서 준비해 둔다.
김이나 대파도 중요하지만, 메밀 소바의 핵심은 바로 이 간 무, ‘오로시’이다.
강판에 간 무를 물에 헹궈서 체에 거른 후 꾹꾹 짜서 물기를 제거한다.
물기가 제거된 간 무를 동그랗게 뭉쳐 준다.
동그랗게 뭉쳐진 무의 모양이 꼭 눈덩이 같다.
눈싸움할 때 단단히 뭉쳐서 만드는 그런 눈덩이.
그사이 잘 익은 면을 건져 내어 찬물에 씻어 준다.
팍팍 치대어 찰기를 더해 주고, 온기가 사라진 면은 물기를 꽉 짠 후, 그릇에 옮겨 담아 준다.
오늘은 그릇도 약간 일본식으로 준비한다.
자기로 만든 그릇에 하늘색 무늬가 불규칙하게 그려져 있는 딱 일본풍의 그릇.
면을 담은 그릇에 맛간장을 부어 주고, 찬물을 부어 준다.
국물의 농도는 개인 취향에 맞추면 된다.
싱거운 느낌을 좋아하는 나는 물을 충분히 부어 준다.
참, 아내는 짠맛을 좋아했었는데…….
그렇다고 내 미식 취향까지 바꿀 수는 없다.
아내가 생각나서 만들긴 했지만, 그래도 내 메밀 소바는 소중하니까.
미리 만들어 둔 김, 대파, 간 무를 올려 주고, 와사비를 그릇의 안쪽에 살짝 묻혀 준다.
여름밤의 별미인 메밀 소바 완성.
꿀꺽.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돌기 시작한다.
간 무와 와사비를 국물에 사사삭 풀어낸다.
간 무는 눈꽃처럼 흩어지고, 연한 녹색의 와사비가 간장 국물에 풀어져 국물 색깔은 진한 고동색이 된다.
메밀면을 한 젓가락 집어 그대로 입에 밀어 넣는다.
호로록.
입 속에 면이 들어가는 소리부터가 시원하다.
면과 함께 달려온 시원한 국물이 짭쪼름하게 입맛을 돋운다.
중간중간 느껴지는 간 무와 김의 맛이 재미를 더한다.
와사비의 알싸한 맛은 국물에 중화되어 딱 기분 좋을 만큼의 자극만을 전한다.
가끔씩 씹히는 대파의 소리가 청량하게 느껴진다.
딸깍- 쏴아아-
이런 음식에 캔맥주가 빠지면 아쉽지.
이상하게 소주는 혼자 마시면 처량한데, 맥주는 혼자 마실 때가 제일 맛있다.
크으.
맥주의 강한 탄산에 아저씨처럼 소리를 내뱉는데 어느새 눈을 뜨고 있는 삼색이가 빤히 나를 쳐다본다.
녀석은 왠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 집사. 너는 지금 혼자가 아니다냥.
그래, 삼색아.
네가 있었구나.
고맙다.
근데 말이다.
나는 지금 혼자 있는 시간도 너무 좋다.
혼자서 맛있는 음식을 해 먹으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이 시간이.
삼색이 네가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는 것처럼.
“에옹. 에옹.”
내 말을 이해했다는 듯, 한 차례 목소리를 낸 삼색이가 다시 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눕는다.
평화로운 옥상에서의 시간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다.
* * *
팔각정 앞 공터.
한여름의 야밤에 한 여자의 거친 숨소리가 이곳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오십일…… 오십이…… 오십……사…… 암……. 후우. 후우. 후우.”
“오십삼 개. 아직 두 개 모자란데?”
“후우…… 무리야. 지금은…… 이게…… 최선…….”
거친 숨을 몰아쉬는 윤희선.
난 희선이의 무릎을 잡아주던 손을 놓았다.
희선이는 그대로 팔각정 마룻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수고했어. 고맙고.”
“뭘…… 어차피 나도 운동하러 나온 건데.”
희선이는 낮에는 필기시험 준비, 밤에는 체력시험 준비로 하루를 꽉 채워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혼자서 낑낑대며 윗몸일으키기를 하고 있던 녀석을 도와준 계기로, 난 녀석의 훈련 파트너가 되었다.
뭐, 대단한 건 아니었다.
윗몸일으키기를 할 때 무릎을 잡아 주고, 팔굽혀펴기를 할 때는 자세를 봐주고, 달리기 연습을 할 때는 같이 뛰어 주는 정도.
‘로키’라는 영화에서 본 트레이너 선생의 흉내를 내는 것도 나름 재미가 있었다.
- 야, 좀만 더. 좀만 더.
- 자세 무너지잖아!
- 마지막 스퍼트!
- 마무리 한 개! 하나 더!
녀석을 도와주는 게 더 재미있는 이유는 녀석이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열심히 하기 때문이다.
운동을 하는 희선이의 눈에서는 불꽃이 일었고, 한여름이라 땀으로 흠뻑 젖은 희선이의 몸에서는 펄펄 열기가 끓어올랐다.
녀석이 일반적인 사람보다 체력이 약하다는 걸 알기에 그런 노력이 더 멋져 보였다.
그런 에너지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큰 자극이 되고, 힘이 되었으니까
사람은 끊임없이 서로 간의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
자신의 꿈을 향해 순수한 열정을 쏟아 내는 희선이가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내가 희선이를 도와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나 역시도 희선이에게 많은 에너지를 받고 있는 거다.
물론, 그게 눈에 보이지는 않겠지만.
운동을 끝내고 쓰러져 있는 희선이에게 이온 음료를 건넨다.
“이거 마셔. 한여름에 그러다가 너 진짜 쓰러진다.”
“어, 아…… 고마워.”
희선이는 내가 건넨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크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이제 좀 정신이 드냐?”
“응. 휴우…….”
이온 음료를 마신 뒤 다시 벌러덩 드러누운 희선이에게 묻는다.
“야, 근데 너 내일 뭐 먹고 싶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