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고기 반찬 도시락 (2)
오늘도 ‘지옥’에서의 일과를 마치고, 김민철은 터벅터벅 집을 향해 걷고 있었다.
해가 진 지 꽤 됐지만, 여전히 찜통 같은 한여름의 공기를 느끼며.
지옥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내일이면 다시 그곳으로 출근을 해야 한다는 절망감을 동시에 느끼며.
그런 그의 몸과 마음이 결코 가벼울 리 없었다.
어깨는 축 처져 있었고, 고개는 푹 꺼져 있었다.
눈은 썩은 동태 눈깔처럼 텅 비어 있었고, 머리로는 어떤 긍정적인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뜨거운 열대야는 그런 그를 더 축축 처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영진시장을 통과하던 그의 코가 갑자기 벌름거렸다.
‘이 냄새는…….’
김치찌개 냄새였다.
오래간만에 맡은 찌개의 냄새에 김민철의 몸이 움찔- 하고 반응했다.
마치 죽어 있던 모든 세포가 갑자기 확 살아난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찌개라는 걸 먹어 본 지 오래된 것 같다.
혼자 서울에 올라와 자취를 하는 그에게는 집밥이라는 개념 같은 건 없었다.
삼시 세끼를 밖에서 해결하고 있었으니까.
그나마 동료들이랑 점심을 먹을 때는 이런저런 데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음식들을 먹어 왔다.
하지만, 요즘에는…….
요즘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까 다시 마음 깊은 곳에서 커다란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 * *
바쁜 날에는 장사 도중 밥을 제대로 못 챙겨 먹는 날이 있다.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루였다.
그런 날에는 브레이크 타임도 큰 의미가 없다.
장사에는 원칙을 지켜야 하는 것이 맞지만, 뙤약볕에도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손님을 외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쉬는 시간에도 하나둘씩 손님을 들이게 되고, 그러다 보면 휴식 시간 같은 건 날아가 버린다.
물론, 속으로 다짐했다.
여름만 지나면…… 이렇게 휴식시간을 희생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이건 나 혼자만 좀 힘들고 말면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못 쉬면 다른 분들도 못 쉬니까.
손님도 손님이지만, 가게의 직원도 그 못지않게 소중하니까.
모든 걸 정리하고 혼자 남아 식사를 한다.
오늘의 메뉴는 돼지고기 김치찌개.
하필이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 중 하나였다.
하루 종일 먹지도 못하면서 그 냄새를 맡고 있자니 도저히 이걸 먹지 않고는 잠을 못 이룰 것 같았다.
밖은 열대야지만,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먹는 뜨끈한 김치찌개는 그야말로 최고였다.
그렇게 혼자만의 식사를 즐기고 있는데, 문 바깥으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누구였더라…….”
분명히 낯이 익는데…… 누군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 사람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하늘을 보며 뭔가를 떠올리는 듯하다가 갑자기 큰 한숨을 쉬었다.
어찌나 한숨을 크게 쉬는지 문으로 막힌 이 공간 안에서도 그 숨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전생에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음…… 저런 인물은 기억나는 인물이 없다.
문 밖의 사람은 전형적인 회사원의 얼굴과 회사원의 차림새를 하고 있는 삼십 대 남자였다.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굳세어 보이는 턱선과 강인한 콧날이었다.
심지가 굳고, 의지가 강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왠지 모를 신뢰감이 들게 만드는 얼굴.
하지만,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얼굴, 그리고…… 걱정이 많아 보이는 눈빛.
“아!”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는 도중 불현듯 그의 ‘정체(?)’가 생각났다.
그는 특이한 부류의 단골 손님.
바로, 매일 아침마다 도시락을 사 가는 남자였다.
희선이를 제외하고는 매일 아침 도시락을 사 가는 몇 안 되는 도시락 단골.
인사나 할 겸 문밖을 나섰다.
“안녕하세요.”
남자가 흠칫하고 놀란다.
“아…… 안녕하세요.”
“음…… 혹시 식사를 하러 오신 건가요?”
말을 마치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열 시 반.
확실히 식사를 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긴 했다.
“그런 건 아닌데…….”
머뭇거리던 남자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술도 파시나요?”
남자를 자리에 앉히고 주방으로 들어왔다.
원래라면 사실 미안하다고 하고, 남자를 돌려보내는 게 맞다.
아무리 다시 돌아온 젊음이 좋다지만, 나의 육체 능력에도 한계라는 게 있으니까.
그런데…… 술을 파냐는 말을 하면서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그 눈빛에는 뭐랄까…… 깊은 외로움이 담겨 있었다.
마치 한 수백 년은 혼자 동굴 속에서 살아온 것만 같은 외로움.
그런 눈을 보자 문득 전생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들이 떠올랐다.
모든 걸 다 이루고 난 뒤,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후 느꼈던 외로움.
지금껏 아등바등하며 이뤄 낸 모든 성과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그 허무함.
이 남자는 무엇 때문에 이런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걸까.
아무리 봐도 성실하고, 일 잘하는 착실한 회사원일 것 같은 느낌의 남자.
그의 사연이 더욱더 궁금해졌다.
그리고 마침…… 새콤한 김치찌개에 곁들일 소주 한 잔이 생각나는 시간이기도 했고.
어쨌든…… 일단 먹고 보자.
술까지 마시는데 김치찌개 하나로는 뭔가 좀 아쉽다.
내가 생각하는 김치찌개의 최고의 짝꿍은 바로 계란말이.
새콤한 김치찌개를 먹고, 고소하면서도 풍미가 좋은 커다란 계란말이를 하나 집어 먹으면 그야말로 모든 맛이 충족되는 기분이 드니까.
거거익선(巨巨益善).
크면 클수록 좋다는 말.
TV도 크면 클수록 좋고, 집도 넓으면 넓을수록 좋다.
당연히 계란말이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계란 10개를 꺼내어 볼에 푼다.
양파, 대파, 파프리카, 청양고추 등의 채소를 잘게 다져 계란물에 넣는다.
채소와 계란물을 골고루 섞어 준다.
왕계란말이는 반복 노동과 같다.
중약불에 기름을 두르고, 얇게 부쳐질 만큼 계란물을 붓는다.
계란이 모양이 잡힐 정도로 익으면 둘둘 말아 준다.
둘둘 말아 준 계란말이의 끝에 다시 한번 계란물을 부어 준다.
계란물이 익으면, 또다시 둘둘 말아 준다.
처음부터 예쁜 모양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기초공사 중이니까.
그저 기반을 튼튼히 다진다고 생각하고, 계속해서 말고, 붓고, 다져 준다.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계란물은 두툼한 벽돌 모양으로 뭉쳐지게 된다.
잘 만들어진 계란말이의 겉면을 한번씩 다시 보기 좋게 익혀 준다.
노르스름하면서도 점점이 박혀 있는 채소들의 색깔이 재미있는 왕계란말이 완성.
케첩과 머스타드는 취향껏 찍어 먹을 수 있도록 작은 그릇에 담아 낸다.
“자, 안주 나왔습니다.”
테이블 위에는 라면 사리까지 추가된 김치찌개와 왕계란말이가 놓였다.
방금 냉장고에서 꺼내 와 살짝 서리가 낀 소주까지.
짤깍.
소주병의 뚜껑을 열고, 남자에게 잔을 내밀었다.
또로로로록.
술병에서 흘러내리는 술 소리가 청아하게 느껴졌다.
잔을 받아든 김민철은 소주보다도 우선 뜨끈한 냄새에 취해 있었다.
방금 푼 따뜻한 밥 냄새.
보글보글 끓고 있는 찌개 냄새.
벽돌 크기만 한 계란말이에서 폭발적으로 퍼져 나오고 있는 고소한 냄새.
생각해 보니 이렇게 밥상 위에서 따뜻한 밥을 먹어 본 지 오래였다.
‘그 일’이 있은 후, 회사에서는 누구와 함께 밥을 먹어 본 적이 없었고, 어디에서 혼자 밥을 먹을 만큼 넉살이 좋은 편도 아니었다.
아니,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어 본 일이 거의 손에 꼽힐 정도였던 그였다.
오늘은 김치찌개 냄새에 홀린 건지, 간절하게 술 생각이 나서였는지 영업이 끝난 가게에 이렇게 용감하게 들어와 있지만.
그마저도 이렇게 가게 주인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얼른 드세요.”
“아, 네. 네.”
김민철은 생각을 멈추고 밥상으로 눈을 돌렸다.
그래.
지금 이 순간만큼이라도 복잡한 생각은 다 잊자.
우선, 이 따뜻한 밥에 집중하자.
김민철의 젓가락은 아직도 보글보글 끓고 있는 김치찌개로 향했다.
그는 꼬들꼬들하게 익은 라면 사리를 한 움큼 집어 들었다.
호로록.
면과 함께 입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칼칼하고 새콤한 찌개의 국물.
라면 면발이 품고 있던 그 국물의 맛이 온전히 느껴진다.
“으음.”
자연스럽게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그사이에 맞은편에 앉아 있는 주인장이 김민철의 그릇에 찌개 건더기를 잔뜩 퍼다 준다.
새콤하면서도 묵은지 특유의 쿰쿰한 맛이 살아 있는 김치.
비계와 살코기가 적당히 어우러져 있어 진하고 깊은 맛을 내는 돼지고기.
거기에 이 모든 건더기의 진액을 그대로 담고 있는 듯 새콤하면서도 진하고, 칼칼하면서도 시원한 국물.
그야말로 완벽한 김치찌개였다.
새콤한 김치찌개를 한참 먹다 보니,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왕계란말이로 향했다.
“와…….”
계란말이의 크기를 보니, 역시 자연스럽게 탄성이 터져 나온다.
마치 겹겹으로 쌓아져 있는 과자처럼 가로로 썰려져 있는 단면이 겹겹의 층을 이루고 있었다.
그 층 사이 사이에 빨갛게, 하얗게, 그리고 초록색으로 박혀 있는 채소들.
그 채소들의 알록달록한 예쁜 색이 식욕을 더 돋운다.
노란 머스터드를 듬뿍 찍은 계란말이를 그대로 입에 가져간다.
입안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축제란 무엇인가.
일상을 잊는 것이다.
지리멸렬하고 매일 똑같은 일상도 축제에 오면 다 잊을 수 있다.
그 축제의 순간에 나는 다른 사람이 된다.
지금 김민철도 그랬다.
이 순간만큼은 생각하면 머리가 깨질 것만 같은 회사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계란말이에서 터져나오는 풍부하고 고소한 맛이 그의 입 안을 가득 채우고, 그의 몸을 가득 채웠다.
복잡한 생각은 맛있는 음식이 주는 절대적인 쾌감 앞에서 무력해졌다.
* * *
앞에 있는 남자는 그야말로 걸신들린 듯이 밥을 먹고 있었다.
음…… 뭔가 굶주려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의 인상과 그의 차림새를 보면 뭘 못 먹고 못 살 것 같은 그런 느낌은 결코 느껴지지 않았다.
근데 먹는 걸 보면…… 이건 완전히 유혜승 뺨치고 있었다.
물론, 양으로만 따진다면 혜승이의 새 발의 피도 안 되는 수준이지만.
“맛있게 드셨어요?”
“네? 아, 아아…… 이것 참…… 실례했습니다. 술잔을 두고, 같이 한잔 기울이지도 못했네요. 제가 원래 이런 사람은 아닌데…….”
“아닙니다. 맛있게 드셨으면 된 거죠. 그나저나…… 배가 많이 고프셨던 모양입니다.”
우리는 뒤늦게서야 짠- 하고 술잔을 부딪쳤다.
크으.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술을 잘 못 하시는군요?”
“아…… 사실은…… 그렇습니다. 한 잔도 제대로 마시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이 왜 술을 찾았을까,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의문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무언가 사정이 있었을 거다.
갑자기 술을 마시고 싶었던.
그리고, 그런 사정이 있을 때는 반드시 누군가와 얘기를 하고 싶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말은 곧…… 내가 묻지 않아도 남자는 스스로 이야기를 시작할 거라는 거다.
짠-
한 번의 건배를 더 하고, 역시나 크게 인상을 찌푸린 남자가 입을 열었다.
소주 두 잔에 벌써 빨개진 얼굴을 하고.
“혹시…… 괴로움 없이 죽는 법 같은 거 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