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39화 (38/104)

39화.

작년, 라피난의 처소에서 이레이가 빌려 갔던 서책. 그냥 빌려 간 것도 아니고 무척 희귀해 보이는 보석을 답례로 두고 가던 모습까지 기억난다.

“보답이다. 예전에 수집가에게 팔고 남겨 두었던 거야. 꼭 네 머리색 같지 않나?”

맞아. 그런 말도 했었지.

“글쎄……. 아마 우리가 친구라서?”

해시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책이 뭐길래 이레이의 입에서 ‘친구’ 같은 단어가 흘러나왔단 말인가. 라피난도 그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듣고도 전혀 마뜩잖아하지 않았었다. 아무려면 그럴 놈들이 아니거늘……. 불쑥 치민 의구심에 바로 책장을 펼쳐 보려 했지만, 서책을 꿰뚫은 단검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낑낑대기를 한참, 그녀는 마침내 쿵 엉덩방아를 찧으며 깊숙이 꽂혀 있던 칼날을 뽑아내는 데 성공했다. 쿵. 누군가 본다면 자칫 체통이 위험해질 만큼 우스꽝스러운 몸짓이었다. 머쓱하게 자세를 고쳐 앉은 해시트가 공연히 투덜거렸다.

“하여간에 무식하게 힘만 센 놈…… 응? 잠깐만.”

책에서 뽑아낸 단검의 칼날에 익숙한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예로부터 황실에 무기를 납품해 온 쥬달 가문의 표식, 그것을 알아본 해시트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황가의 검이 어째서 일개 백인 소대장의 처소에 있단 말인가? 검체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던 그녀가 별안간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그때…….”

무심코 벌어진 입술이 잠시 그 자리에 머물러서 바르르 떨렸다.

이레이가 탑층 감옥에 갇힌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사슴 대신 선황의 말을 사냥한 죄로 투옥되었던 사례가 존재했다. 이 단검은, 당시 해시트가 그의 탈옥을 종용하며 그에게 직접 쥐여 주었던 물건이다. 그녀 손으로 직접 감옥 창살 틈으로 이 단검을 밀어 넣었었다.

기념품으로 삼겠다던 말이 진심이었나.

해시트는 돌연 아득한 기분에 빠져 단검을 툭 떨궈 버렸다. 설마하니 그 미친놈이 밥 먹듯 탈옥하는 취미가 들 줄 예상했다면 절대로 그런 당부는 안 했을 거라고. 못내 신경 쓰이는 마음을 뒤로한 채 냅다 책장을 펼쳤다. 그래 봐야 시선은 이미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들을 훑기 시작했다. 상념이 주절주절 꼬리를 문다.

그러고 보니.

저 촛대도 언젠가 해시트가 집어 던진 거였고, 저기 양탄자로 사용 중인 물건은 한때 해시트가 하사해 준 망토고―추위를 안 타서 필요 없다면서도 굳이 가져가길래 귀엽게 봐줬더니만 이 건방진 놈이 기어코 황제의 하사품을 바닥에 깔아 두고 밟고 다녔구나―또 저기 잔뜩 쌓인 기름 램프는 이따금 이레이가 밤 산책을 하자며 해시트의 방에 찾아왔다가 산책 후 그녀를 방에 데려다 두고 돌아갈 적에 야금야금 하나씩 훔쳐 낸 것들로 보였다. 당연히 해시트는 이레이가 그동안 램프를 저만큼이나 훔쳐 갔을 줄 몰랐다.

이 쳐 죽일 놈을 대체 어쩌면 좋지. 끝내 해시트는 분노에 차 얼굴을 이지러뜨렸다. 아무튼 예전이나 지금이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사람 혼을 쏙 빼놓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는 무뢰한이다. 이제 그녀는 습관처럼 중얼거렸다.

“진작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그러나 지키지 못할 위악임을 누구보다 해시트가 가장 잘 알았다.

기껏 펼쳐 든 책장은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멍하니 시야만 흩트리는 중이었다. 불시에 투박한 인사말이 그녀의 귓전을 때렸다.

“뭐야. 면회 한 번 안 오고 뺑뺑이 돌리더니, 이제야 달래 주러 왔나?”

감히 그녀 앞에서 이토록 방만하게 떠들어 댈 이는 단연코 한 사람뿐이다. 아직 라피난에게 이레이의 석방을 명한 지 반나절도 지나기 전이었건만, 하필 라피난이 남들의 배 이상으로 일 처리가 빨라 생긴 문제다.

고개를 들어 출입문을 확인했다. 다행히 이레이는 딸린 이 없이 혼자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내 방문에 기대며 약간은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해시트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모처럼 얼굴 보니 좋군.”

“…….”

“진심이야.”

해시트는 홀린 듯 바라보기만 했다. 남자의 다부진 입술이 다시 한번 달싹이는 모습을.

“그래도 그 책은 읽지 마라. 내려놔.”

흘긋, 모처럼 만나서 기쁘다던 남자의 눈은 금세 해시트의 얼굴에서 떨어져 나가 그녀의 손에 들린 낡은 서책으로 내려앉았다. 해시트는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줬다.

“이 책이 뭔데?”

멍하던 그녀의 눈에 날카로운 이채가 돌았다. 어느새 성큼 다가온 이레이가 서책을 빼앗을 듯 손을 뻗기 무섭게 벌떡 일어나 뒷걸음을 쳤다. 이레이는 감흥 없는 새파란 눈빛으로 그녀를 좇을 뿐이었다.

“해스. 묻지 말고 그냥 내려놔.”

“그러니까 왜.”

“내려놔. 널 위해서 하는 말이다.”

숫제 경고하는 말투다. 해시트가 코웃음을 쳤다.

“네놈에겐 아직도 짐을 기만할 방법이 남아 있나 보군?”

“기만은 네가 나한테 한 짓이고, 난 네가 충격받을까 봐 걱정해 주는 건데.”

이레이가 담담하게 반박했다. 그러나 비스듬히 팔짱을 끼우는 표정은 종전에 비해 한없이 탐탁지 않았다. 해시트도 어이가 없었다.

“걱정 같은 소리 하네. 눈 뜨자마자 잘린 모가지 보는 건 안 충격적일 것 같아?”

“그래서 몸통은 빼고 뒀잖아.”

“이 자식이 이젠 아예 발뺌도 안 하는군. 왜? 네가 한 짓이라고 사방팔방 떠들고 다니지! 아예 사람들 죄다 모아 놓고 어떻게 탈옥했는지 강연이라도 해! 그럼 아무리 물증이 없대도 다들 네가 범인이라는 걸 믿어 줄 거다.”

“뭐래. 바보 같은 소리 그만하고 그 책이나 이리 줘.”

휙, 또다시 손바닥이 다가왔다.

그가 귀찮다는 듯 굴기에 일순 해시트는 설명하기 힘든 억울함에 휩싸였다. 눈 내리던 밤 그의 품에 안겨 울었던 일이 바로 엊그제처럼 생생한 동시에 수치스러운 상상 속에서만 벌어진 사고 같기도 했다.

차라리 상상이었으면 나았을 것이다. 그럼 혼자만 알고 끝낼 수 있었을 텐데. 문득 오기에 찬 그녀가 서책을 세게 움켜쥐었다.

“싫어.”

“앞으로 내가 주는 걱정은 전부 무시할 셈인가?”

이레이의 목소리가 돌연 딱딱해졌다. 해시트는 대답 대신 그의 옆으로 몸을 틀었다.

“감히 네가 이 몸의 성의를 팽개친 것만 하려고.”

붙잡힐까 봐 움츠린 어깨를 들키지 않으려 한쪽 바닥에 깔린 양탄자를 곁눈질했다. 발자국 남은 망토는 이제 본래 이름으로 불릴 수 없었다.

이레이는 그녀가 완전히 그를 스쳐 지나갈 때까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어쩌면 해시트의 두려움을 눈치챘을 수도 있다. 그 때문에 서운해할 그를 생각하니 조금은 미안해져서, 해시트는 문 앞에 다다라 잠깐 그를 돌아보았다. 그때 이레이가 말했다. 해스.

“난 분명히 경고했다.”

아주 싸늘하게, 미동 없던 뒷모습이 천천히 그녀를 향한다. 새파란 눈동자가 단숨에 그녀를 찾아냈다.

“지금부터 후회는 전부 네 몫이야.”

“…….”

결국 해시트는 침묵한 채 문턱을 넘어서야 했다. 그를 무시하는 척, 그저 겁이 나 도망치는 자신을 알면서도.

*

이레이는 비교적 빨리 대장직에 복귀했다. 그리고 그의 복귀와 동시에 그가 속한 백인 소대로 이번 연쇄 살인 사건의 진범을 수사하라는 명령이 내려갔다. 해당 명령의 배후에 라피난이 있다는 건 굳이 캐묻지 않아도 알 만했다.

해시트는 그 문제에 대해서 정말로 캐묻거나 다그칠 마음이 없었는데, 어쩐지 라피난이 지레 찔려서 죽겠는지 아침 식사 도중 갑자기 운을 뗐다.

“헛수고라도 시켜야 하니까요. 일 단위로 자필 보고서를 올리라고 했으니 지금쯤 펜대 몇 개쯤은 우습게 부러뜨렸을 겁니다.”

하기야 예전부터 보고서, 경위서, 시말서 등 잉크를 사용해야 하는 문서 작업에 치를 떠는 인물이었다. 그따위 집중력으로 의술은 어떻게 공부했을지 당최 모를 일이었지만 그건 차치해 두고, 깃펜을 입에 물고 끙끙거리다 우지끈 부러뜨리는 무뢰한을 상상해 보았더니 해시트는 무심코 그 모습에 어울리는 단어가 생각났다.

“그런 게 바로 ‘뺑뺑이 돈다’는 거지?”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라피난의 눈썹이 즉각 위아래로 들썩였다. 해시트는 며칠 전 이레이에게 들었던 비속어의 알맞은 용례를 알았다는 기쁨을 숨기고 황급히 얼버무렸다.

“쥰……. 그게 아마 쥰이었지 싶은데…….”

그러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설펐다. 쥰처럼 바르고 고운 말만 골라 쓰는 아이를 핑계 삼다니 아무래도 못 할 짓이다.

다행히 라피난은 대충 속아 넘어가 주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그런가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더니 잠시 후 덧붙였다.

“그렇다면 이레이 린 대장에게 책임을 물어야겠군요.”

“응? 갑자기?”

그냥 넘어가 주려던 게 아니었나? 웬걸, 눈을 동그랗게 뜬 해시트를 응시하는 라피난의 눈빛에 융통성이라고는 없었다.

“원래 부하 관리는 상사의 몫이니까요.”

“으음…….”

융통성은커녕 앞으로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하루에 한 번씩 이레이를 엿 먹이겠다는 투지가 활활 불타고 있었다. 참으로 입맛 떨어지는 광경이어라. 해시트는 떨떠름하게 포크를 내려놓았다.

“너 그 자식에게 어지간히 화났구나?”

“꼭 폐하께서는 아닌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그럴 리가.”

“…….”

“이봐, 짐도 화났다니까?”

해시트가 한 번 더 강조했다. 물끄러미 닿아 오는 라피난의 눈빛이 유독 추궁처럼 느껴진 탓이다. 그건 아마 해시트의 마음 한구석에 켕기는 사안이 있어서 그럴 테지. 해시트는 모르는 척 시선을 돌렸다.

나도 화났지. 화났고말고…….

동요하는 감정을 감추고자 겸사겸사 차임벨을 울렸다. 노크와 함께 들어온 시종에게 해시트가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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