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식사 끝났으니 내 집무실에 차를 준비해 둬라.”
“예, 폐하.”
시종은 불필요한 언행 없이 공손히 인사하고 나갔다. 이제 차가 식기 전에 집무실로 이동하려면 쓸데없는 진실 공방일랑 관두고 그만 일어나야 할 터였다.
*
“요즘 차를 너무 많이 드시는 것 같은데요.”
“중독되는 것도 아닌데 뭐.”
넌지시 건넨 라피난의 잔소리에 해시트가 무슨 문제 있냐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식당에서 나와 집무실로 가던 길이다. 라피난은 뒤따라오는 시종들을 한차례 곁눈질하고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만요.”
“일 얘기나 하지. 크샨 왕국에 두고 온 섭정들의 향후 거취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다고?”
“예, 우선 연락원들을 우리 쪽 사람으로 전부 바꿔 놓은 상태입니다.”
잠시 해시트에게 머물렀던 라피난의 시선이 이내 물러가 서류에 가 박혔다. 멀어지며 깜빡이는 눈초리에서 묘한 석연찮음을 감지했을 땐 마침 집무실 앞이었다.
쟁반을 든 차 시종이 집무실 안에서 해시트를 기다리다가 허겁지겁 허리를 숙였다. 허둥대는 행동에서 성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입 티가 났다.
무릇 황제의 차 시중이라면 숙련된 전문가여야 마땅했으나, 어릴 때부터 월경 주기를 조절하느라 헤라꽃 차를 물처럼 들이켜야 했던 해시트는 웬만한 전문가보다 제 솜씨가 나을 거라며 신입 시종을 고집했다.
아무렴 차를 마실 때만큼은 다과상 예절을 운운하는 황실 문화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심보를 숨기지도 않았다.
“놓고 나가거라.”
“예? 제가 곁에서 따라 드려야…….”
“나가라고.”
“예! 그,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폐하.”
얼른 쟁반을 내려놓은 차 시종이 깨금발로 뒷걸음질 쳐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탁, 방문이 닫히자 해시트는 직접 찻주전자를 기울여 찻물을 잔에 따랐다.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루비색 액체 위로 헤라꽃 향기가 어른거렸다. 금세 집무실 가득 퍼져 나간 꽃향기 가운데서 라피난이 말했다.
“최근 들어 안색이 나빠지셨습니다.”
해시트는 피식 선웃음을 흘렸다.
“좀 피곤하군. 너도 알다시피 쉴 틈이 없었잖아.”
“심각해지기 전에 의사를 부르시죠. 이레이 말고도 제국에 의사는 많습니다.”
그동안 해시트의 진찰은 이레이가 도맡아 왔더랬다. 굳이 라피난이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이유를 모르지 않는 해시트는 찻잔만 이리저리 휘젓다가 한 모금을 넘긴 뒤에야 고개를 저었다.
“됐어. 보나 마나 울화가 쌓였다고 할걸. 문제가 해결되면 자연히 나을 거다.”
최근 화병 날 일이 좀 많았어야지. 라피난도 어느 정도는 수긍하는지 삼키듯 한숨을 쉬었다.
“결혼은 계속 밀어붙이실 겁니까?”
“뭐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지금 상황에선 마땅히 없습니다. 이레이를 멀리 출정 보낸다고 해서 그가 순순히 떠나 줄 리 없고, 이미 세 사람이나 죽은 와중에 새로운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면 더는 사고사로 위장하기도 어렵고요. 그렇다고 폐하께서 혼인하셔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레이에게 잘 설명하고 이해시키기엔…….”
“불가능하지.”
“예. 싫은 말은 끝까지 듣지도 않을 놈이니까요.”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라피난.”
불현듯 해시트가 화제를 돌렸다.
“말씀하십시오.”
흔쾌한 승낙이 돌아왔음에도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며 손가락으로 찻잔 표면을 훑었다. 뽀얗게 피어오르는 증기 너머 망설이는 표정이 역력했다. 라피난은 독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해시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너와 이레이, 둘이 언제부터 친구가 됐지?”
자칫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릴 법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기저에 깔아 둔 혼란을 라피난이 들여다보지 못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이 혼란을 외면한다면, 그건 그가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글쎄요.”
“…….”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별로 기억에 남을 만한 사건이 아니라서요.”
그리고 라피난은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렇군.”
갑자기 혀가 굳어 버린 기분이다. 해시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손짓으로 라피난을 내보낸 뒤엔 향기도 모르는 채 꾸역꾸역 찻물을 들이켰다. 독약이라도 마신 것처럼 입 안이 썼다.
혼자 남은 방 안에서 그녀는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전후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이레이는 분명히 경고했다. 앞으로의 후회는 전부 그녀의 몫이라고.
그래서 벌써 후회하느냐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해시트는 침통한 표정으로 책상 서랍을 당겼다. 열린 서랍 속에 두꺼운 고서적이 존재감을 뽐낸다.
<카이렌의 날개 달린 짐승들>
제법 익숙해진 제목 아래, 아주 작은 글씨로 새겨진 저자의 성명은 아직 낯설었다.
<린 한>
저자의 이름이나 표기법으로 추측하건대 번역서인 듯했다. 해시트는 한참이나 표지를 노려보다가 느지막이 책장을 펼쳤다. 린. 짧은 음절이 주는 위화감은 애써 무시했다.
책을 관통한 칼날이 몹시 예리했던 덕분에 책장의 훼손이 그나마 적은 편이었다. 모든 글자를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전체적인 문장의 흐름으로 내용을 파악할 정도는 되었다. 이윽고 그녀는 며칠 전 귀퉁이를 접어 두었던 부분을 찾아 펼쳤다.
“……드래곤은.”
눈으로 읽는 것만으론 도무지 믿을 수 없어 소리 내어 입술을 달싹였다.
“드래곤은 신의 피조물 중에서 신과 가장 비슷한 존재다.”
제목에 나온 ‘날개 달린 짐승들’은 역시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까, 드래곤이라는 환상 속 종족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이 부분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었던지 해시트는 문장을 거의 달달 외울 지경이었다.
드래곤. 어느 지역에선 ‘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단다.
“기분에 따라 눈과 비를 내릴 수 있고, 살육을 저지름에 있어 아무런 죄책감이 없다.”
인간의 마지막 땅을 떠나 남쪽으로 칠십 일을 항해하면 멀찍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붉은 섬, 카이렌에 사는 괴이한 생명체. 놀랍게도 과거에 이레이가 이야기해 주었던 재미없는 전설과 딱 들어맞았다. 섬을 일컫는 호칭만은 조금 달랐던 것 같지만.
“그들은 이따금 인간으로 둔갑해 인간 세상에 관여하기도 한다. 그저 대단치 않은 유흥의 일환으로써, 대체로 무소불위의 권력자 곁에 붙어 마음대로 세상을 주무르기를 즐긴다. 스스로 인간 위에 군림하지 않고 허수아비를 찾는 이유는 실수로 인간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으려는 나름의 규칙이라 볼 수 있다. 그토록 오만한 생명체이다.”
솔직히 전설이라는 표현은 너무 거창하다. 어디에서나 들을 법한 허무맹랑한 괴담이라면 모를까. 그런데도 해시트는 며칠째 틈날 때마다 이 책을 들춰 보고 있었다. 그때마다 도무지 무시하기 힘든 찜찜함이 발목을 끈적하게 붙잡기에.
“인간으로 둔갑한 드래곤은 외양상 이십 대 중반에 들어서면 노화가 멈춰 버리기 때문에, 보통 유희를 즐긴 뒤엔 죽음으로 위장하고 인간 세상에서 사라진다. 인간으로 둔갑하였을 때 그들의 나이를 가늠하게 해 주는 것은 오직 늙어 갈수록 옅어지는 머리색뿐.”
하나부터 열까지 흘려 넘길 수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머리가 하얗게 센 아름다운 젊은이를 알고 있다면 당장 도망쳐라. 언젠간 그가 당신을 죽일지도 모른다.”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혹시 사랑하는 연인이 드래곤임을 고백해 온다면 더더욱 도망쳐야 한다. 그들은 너무나 냉정해 사랑을 알지 못한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예외는 없다. 물론 드물게 반례가 있긴 하지만, 그건…….”
하필 이 뒷장이 칼날에 찢겨 나가서 다음 내용 확인이 불가능했다. 해시트는 침통한 한숨과 함께 동떨어진 단락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새롭게 시작하는 문장은 비교적 희망적인 내용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신과 가까운 종족이라 할지라도 분명 약점은 있다. 그마저도 신의 고귀함을 닮으려던 나머지 스스로 발을 묶어 버린 것에 가깝다. 요컨대 드래곤들이란 거짓말을 싫어하고.”
꿀꺽, 마른침을 삼킨 그녀가 재차 입을 열었다.
“한 번 친구의 맹세를 진 자를 해치지 못한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기 때문에 드래곤을 죽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그와 친구가 되는 것뿐이라고, 저자는 묘하게 황당한 결론으로 해당 문단을 끝맺었다. 책장 끄트머리를 붙잡은 채 망설이던 해시트는 결국 뒷장을 넘기지 못하고 책을 덮어 버렸다. 머리가 아파서 더는 읽을 수 없었다.
친구.
본의 아니게 엿듣고 말았던 이레이와 라피난의 대화가 머릿속에 두둥실 떠다닌다.
“간다. 나는 참고로 이 책 반납 안 할 거야. 혹시 또 읽고 싶어지거든 날 찾아와라.”
“이유는.”
“글쎄……. 아마 우리가 친구라서?”
그 대화가 정말 우연이었을까?
갑자기 바싹 갈증이 일었다. 해시트는 찻물로 입술을 축이려 했지만, 이미 한참 전에 바닥을 보인 찻잔에는 둥그렇게 말라붙은 자국만이 선명했다. 또다시 한숨을 내쉰 그녀가 책상 위의 차임벨을 울렸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벌써 교대 시간이 지났는지 방 안에 들어온 차 시종은 종전과 다른 얼굴이었다. 그런 사소한 문제야 굳이 짚고 넘어갈 필요 없다. 해시트는 빈 주전자가 담긴 쟁반을 멀리 밀어 내며 말했다.
“새 차를 우려 오거라.”
“예. 폐하.”
잠시 후, 시종이 새롭게 내어 온 찻물은 맑은 옥빛이었다. 꽃향기 대신 풀 내음 가득한 찻물로 입술을 적실 적에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이레이와 라피난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했다.
*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그들 중 하나가 인간이 아니라고 가정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