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그 말을 듣자 바로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해시트는 침통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첫 출정 때였나.”
“……맞아요.”
쥰이 놀란 듯 눈썹을 슬쩍 들었다 놓았다. 해시트의 입가에 쓴웃음이 어렸다.
열네 살이 되자마자 지휘관으로 참여했던 전쟁의 결과는 승리였으나 그 이면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유례없는 사상자 숫자가 여전히 깨지지 않았다. 그조차 라피난이 없었다면 치욕스러운 패배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귀향길 내내 찔끔찔끔 눈물을 닦아 내는 해시트에게 라피난은 위로의 말 한마디 해 주지 않았더랬다. 다만 영원히 그녀를 따라다닐 냉정한 조언을 건넸다.
“전쟁은 이런 겁니다. 왜 전술을 익혀야 하는지 이제 아시겠지요.”
해시트는 총명했으나 전쟁 감각을 타고난 인재는 아니었다. 성으로 돌아오자마자 타고나지 않은 감각을 익히기 위해 도서관에 틀어박혀 지략서를 수도 없이 읽어야 했다. 싸움을 글로 외울 만큼 어린 시절이었다.
“그때 제 눈에 비친 폐하께서는 아무리 봐도 전쟁 지휘관을 맡을 나이가 아니었어요. 실제로 폐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었죠. 지휘관이 어리고 부족한 탓에 부하를 죽게 했다면서, 우리 부모님을 위로하시고는 오빠의 유품을 놓고 가셨습니다.”
“…….”
“제가 조각해 준 부적이었어요.”
쥰은 어쩐지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하기야 죽은 형제에 대한 추억을 누구 앞에서 읊을 수 있었겠는가. 자식을 앞서 보낸 부모에겐 더더욱 불가능했을 터다.
“그땐 저도 지금보다 더 어렸고 또 어설퍼서 조각 실력이 정말 형편없었죠. 그렇게 못생긴 걸 죽을 때까지 품고 있었다니, 오빠에게 좀 미안해지더라고요.”
네 오빠에겐 아주 소중했을 거야. 해시트는 그렇게 말해 주지 못했다. 얼굴도 모르는 이의 마음을 멋대로 추측할 만큼 오만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언젠가 보았을 쥰의 형제를 기억해 내려 애를 썼으나 실패했다.
분명 스쳐 가며 한 번쯤은 얼굴을 보았을 텐데, 하다못해 시체라도 지나쳤을 텐데…… 그러다가 깨달았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어 버려서 이제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잊어버린 것이다. 하마터면 정말로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릴 뻔했다는 것까지.
“그래서…… 그 뒤로 돌아오지 않는 오빠가 아닌 폐하를 위해 조각을 연습했습니다. 제 실력이 좋아질수록 부적에 효험이 생길 것 같아서요.”
오늘 쥰을 만나지 못했다면, 해시트는 지금껏 그녀가 건너온 길이 시체의 산이자 핏물의 강임을 차츰 잊고 말았을 터였다. 영영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을 때야 알아차리고 뼈저리게 후회했겠지.
“…….”
그녀는 보이지 않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무어라 입을 떼고 싶었는데 좀체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쥰은 입술만 뻐끔거리는 해시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순간 어린아이처럼 눈꼬리를 접었다.
“전 또, 제 부적이 효과가 있어서 폐하께서 승리하시는 줄 알았지 뭐예요. 입대 후에 이레이 대장님을 보고 나서야 제 착각이란 걸 알았어요. 그런 괴물, 아, 아니. 수호신 같은 분이 폐하의 곁을 지키고 있는데 누가 감히 설치겠어요?”
“아니야.”
드디어 입이 떨어졌다.
“네 덕분이야.”
해시트는 바로 덧붙였다.
“네 덕분이다. 쥰 데이티니스 경.”
“정말요?”
“응.”
쥰의 고개가 푹 고꾸라졌다. 시나브로 내려앉은 노을에 뺨을 적신 채였다. 쑥스러워하는 사람을 굳이 놀릴 마음이 없는 해시트는 곧장 하늘로 시선을 옮기며 투덜댔다.
“너희 대장은 같이 있으면 정신만 사납지, 사실 별 도움 안 돼.”
절반 정도는 진심이다.
이레이는 도움이 안 된다.
툭하면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기나 하고, 소름 끼치게 차가운 손으로 뺨이며 손가락이며 등허리까지 턱턱 움켜쥐어서 사람 놀라게 하는 건 예사고, 어느 안전이라고 명령하듯 굴지를 않나, 언젠가부터는 침실에 기어들어 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현실이 어이없었다.
감히 ‘아름답다’도 아니고 ‘예쁘다’는 말을 황제의 면전에 대고 지껄이는 태도는 또 어떻고. 그래 놓고 제까짓 놈의 마음이 섭섭하다며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깽판을 쳐 대니 수습은 전부 해시트, 아니, 라피난의 몫이었다.
심지어 라피난이 보는 앞에서 시도 때도 없이 입술을 겹쳐 대길래 작정하고 밀어냈더니 어찌나 오기를 부리던지, 결국엔 라피난이 먼저 자리를 떠 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뒤엔 꼭 저 자신이 상처받은 표정으로 씩씩거리곤 했다. 애새끼도 아니고.
차라리 진짜 어린애면 어르고 달래기라도 하게. 이따금 세상 다 산 노인네처럼 구는 이레이를 볼 때면 해시트는 도무지 설명할 길 없는 복잡한 마음에 시달리곤 했다.
왜 저렇게 쓸쓸해 보이지. 아니면서.
사실은 곁에 누가 있든 없든 전혀 상관없으면서. 이역만리 먼 길로 출장 보낼 때조차 딸린 식솔이 귀찮아 혼자 가면 안 되느냐 묻는 놈이.
그런 놈이.
“내가 널 지켜 주는 건 어때?”
왜 처음 만난 해시트에겐 그런 제안을 했지.
저도 모르게 깊은 과거에 빠져들어 있었다. 불현듯 귓가로 쥰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그런데 폐하와 이레이 대장님은 무슨 사…… 허억, 죄송합니다!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
해시트가 멀뚱히 고개를 돌렸다.
이 몸께선 아직 아무 반응도 안 돌려줬다만, 혼자서 아무렇게나 질문하다가 냅다 입을 틀어막는 모양새가 퍽 재미있었다. 매사 이런 식이었다면 이레이가 쥰을 대하던 태도에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그녀는 피식 웃고 말았다.
다시 올려다본 하늘엔 그새 짙어진 노을이 완연했다. 깜깜해지기 전에 돌아가야겠다. 해시트가 먼저 바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돌아서며 나긋한 목소리를 흘렸다.
“황제의 앞에서도 호기심에 거침이 없고, 한데 마땅히 물어야 할 말과 물어선 안 될 말을 가릴 눈치는 있구나. 평소에 라피난이 눈여겨볼 정도면 실력도 있을 테고……. 조각 실력으로 보아 눈썰미는 타고났겠군. 무관이지만 정치에도 문외한은 아니고, 약자를 생각하는 마음도 있다……. 으음, 단점이라면 좀 순진하다는 건데…….”
그건 라피난이 교육시키면 될 일이니까 상관없어. 해시트는 뒷말을 삼켰다. 이미 몇 시간 전에 라피난이 얼마나 끔찍한 상사인지 제 입으로 진탕 늘어놓은 마당에 이런 말을 꺼내려니 상당히 민망했던 탓이다.
“아직 황제 근위대장 자리가 공석이야. 면접 볼 테냐?”
합격한다면 라피난이 쥰의 상사 비슷한 게 될 예정이다.
*
해시트가 성으로 돌아온 시각은 노을은 온데간데없이 밤이 새카맣게 깊었을 때다.
산 모기에 뜯겼는지 팔뚝과 종아리 여기저기가 부어올라 따끔따끔했다. 쥰이 보는 앞에서 내색했다간 당장 엎드려 석고대죄할 것 같아서 해시트는 혼자 남을 때까지 간지러움을 참아야 했다. 마침내 홀몸으로 황제궁에 발을 들이고 나서야 팔뚝을 벅벅 문지르면서 집무실로 향했다.
이 시간에 할 일이 있어서는 아니고, 조용히 고민할 공간이 필요했다. 집무실 문을 열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역시 내일 라피난에게 얘기해야…….”
“어딜 다녀오셨습니까.”
아무도 없어야 할 집무실에 라피난이 우뚝 서 있었다. 그러잖아도 그에게 볼일이 있던 해시트는 무심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아, 잘됐다. 라피난, 나 너한테 할 말이,”
“어딜 다녀오셨냐고 물었습니다.”
“있는데…….”
그제야 딱딱하게 굳은 라피난의 얼굴을 발견한 그녀가 스르륵 입을 다물었다. 슬쩍 눈알을 굴려 보니, 아니나 다를까 어디서 많이 보던 찻주전자 하나가 테이블 위에서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었다.
맞다. 해독제. 해시트가 입술을 뻐끔 말아 물었다.
쥰에게 이끌려 충동적인 등산을 다녀왔다고 이실직고했다간 내일은 더 쓰게 달인 약을 먹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쥰의 면접 결과에도 썩 좋은 영향을 끼치진 않을 터. 결국 대충 얼버무리는 게 최선이었다.
“그냥 산책을 좀 멀리…….”
“폐하의 것도 아닌 의복을 입으시고요?”
“…….”
라피난의 눈이 한층 더 가늘어졌다. 왜 굳이 거짓말을 하느냔 추궁이 역력하다. 세상천지에 이토록 충신의 눈치를 보는 황제가 또 있을까. 그에 억울해할 새 없이 성큼 다가온 라피난이 램프를 들어 그녀에게 비췄다.
“실례하겠습니다.”
날카로운 눈초리가 순식간에 해시트를 샅샅이 훑고 지나갔다. 또다시 변명의 기회도 없이 얕은 한숨이 이어졌다.
“산책로에 모기가 많았나 봅니다. 땀 냄새도 나고요. 도대체 누가 폐하를 산까지 모셨습니까? 그것참, 대단한 재주를 가진 자로군요.”
“그게 말이지…….”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쥰 데이티니스.”
라피난의 한쪽 눈썹이 까딱였다.
“이레이 린은 아니라니 다행이군요.”
빈정거리는 말투가 은근하다. 해시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정도는 그냥 넘어가 주면 안 되나? 오늘은 휴가였잖아. 짐이 농땡이를 부린 것도 아니고.”
“예, 그 정도로 소소하게 거짓말하시는 걸 몇 번 눈감아 드렸다가 요즘 팔자에도 없는 해독제를 달이고 있어서요.”
본전도 못 찾을 항변이었다. 시선을 피하는 해시트를 뒤로한 채 라피난이 찻주전자를 기울여 잔을 채웠다.
“다 식었지만 오늘은 그냥 드십시오. 참고로 식으면 더 씁니다.”
“……내놔.”
도무지 이겨 먹지 못할 부하다. 해시트가 공연히 불평하며 잔을 받아 들었다.
“그런데 이건 언제까지 먹어야 하지? 이 약 먹고 나서부터 부쩍 잠이 많아진 것 같아.”
“잠이 많아진 게 아니라 불면증이 사라지는 거겠죠. 이전에 유난히 못 주무셨던 게 오히려 헤라꽃 차의 부작용이었을 겁니다. 약효가 좋은 모양이니 앞으로도 꾸준히 대령해야겠군요.”
“싫다.”
“싫어도 드십시오.”
“야. 이……, 벼락 맞을 놈아.”
“망극합니다.”
제아무리 해시트가 치를 떨지언정, 옳은 말 하는 부하를 이겨 먹어서 이 생에 누릴 덕은 없었다. 결국 찻잔을 빙자한 약사발을 단숨에 들이켜는 것으로 재차 결심을 굳힐 따름이었다. 쓰디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말끔하게 비워 낸 그녀가 행여 마음이 바뀔라 서둘러 입을 열었다. 라피난.
“나 너하고 혼인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