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75화 (74/104)

75화.

“그렇게 자세히 설명 안 해도 알아들었어. 마음만 먹으면 한밤중에 몰래 잠입해서 성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거지.”

“예. 일전에 이레이 린이 폐하의 남편감들을 살해해 나갈 때처럼요.”

“야, 넌 예를 들어도 꼭…….”

“문제 있습니까?”

“됐다……. 망할, 그 자식은 차라리 내 목을 베는 게 빠르다는 걸 아직도 모르는가 봐. 안 그런가?”

라피난은 곧장 꼬투리를 잡는 대신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하신 질문에 대한 대답은 뭐라고 말하든 역모로 몰리지 않을 수 없겠는데요.”

“그럼 대답하지 마.”

“감사합니다.”

이후 근위병을 늘릴까요 말까요, 그딴 거 다 쓸모없다는 거 아는 녀석이 왜 그러느니 저러느니, 평범한 몇 마디가 더 오갔다. 불현듯 해시트는 무언가를 결심한 얼굴로 하늘을 향해 긴 숨을 흘려보냈다.

“라피난.”

“예.”

“질문 두 개를 하겠다. 첫 번째는 반드시 대답해야 하고 두 번째는 너 내키는 대로 해.”

“알겠습니다.”

왠지 라피난은 그녀가 무얼 물어볼지 알 것만 같았다. 그래서 가만히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이레이가 따로 남긴 말은 없나?”

“없습니다.”

결국 첫 번째부터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사실 각오했던 그대로라서 따로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전혀?”

해시트의 추궁도 예상했던 바이다. 그는 침착하게 준비한 말을 꺼냈다.

“저더러 친구라고 부르긴 하더군요. 아직까지는.”

“친구…….”

그러자 돌연 그녀의 시선이 내려갔다. 생각지 못한 단어에 퍽 당황했다는 듯이. 덕분인지 이어진 두 번째 질문은 묘하게 어색한 느낌이었다.

“너 왜 네 거짓말에 여태 속는 척해 줬냐고, 왜 나한테 안 물어보냐.”

뭐……. 이것도 이럴 줄 알았고말고.

이상하게도 라피난은 최근 몇 년 간 안개처럼 뿌옇던 그녀의 마음이 다시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았다. 아마도 해시트가 그 몰래 소중하게 간직해 온, 아니 간직해 왔지만 이제는 눈물에 녹아 사라진 물건의 정체를 알고 난 이후부터겠다.

그는 보일락 말락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폐하. 한동안 쥰 경을 제게 빌려주시겠습니까?”

기실 대답이라기엔 그저 말을 돌린 것이었으나, 처음부터 내키는 대로 하라 이른 건 해시트였으니 문제 삼을 수 없었을 터다.

“네가 쥰을 왜.”

“긴히 써먹을 데가 있습니다.”

해시트는 그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이상하군. 방금 전까진 근위대를 늘리겠다더니, 이제 와선 갑자기 근위대장을 빼 가겠다고?”

“있으나 마나 소용없다고 말씀하신 건 폐하시잖습니까. 사실 잘 데리고 다니시지도 않으시고요.”

“그거야 뭐……. 그래서 어디에 써먹으려고.”

“쥰 경에게 군사 훈련을 맡길까 합니다. 아무래도 한때 이레이를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던 인물이니 그의 전술을 잘 파악하고 있을 것 같아서요.”

“뭔 소리야. 그 자식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다 까먹었을 녀석한테서 뭘 어째?”

이번엔 별 황당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레이가 떠난 뒤 그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는 사람은 해시트와 라피난, 제국에 단둘뿐이었다. 아니, 둘뿐일 것이다. 도대체 무슨 조화인지는 몰라도 그날 이후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두 번 다시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으니 그저 짐작할 따름이었다.

만약 사람들의 기억을 지워 버린 게 정말로 그의 능력이라면, 어째서 두 사람의 기억만은 남겨 두었는지 그것도 의문이었다. 처음엔 그의 아량이라 생각하기도 했으나 엊그제 전투에서 그와 검을 맞대었던 지금은 역시 복수를 위한 초석이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또한 순전히 해시트 혼자만의 추측이었다. 라피난의 의견은 제대로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해시트는 고민하다가 다시 질문했다.

“짚이는 구석이라도 있나? 너는 ‘그 책’을 끝까지 읽어 봤을 거 아니야.”

그 책.

예전에 라피난이 해시트 앞에서 불태웠던 고서적 이야기였다. 라피난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내용은 안 적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르죠. 쥰의 머리에선 그가 지워졌을지언정 몸은 기억하고 있을지도요. 둘이 제법 막역한 편이었으니 아주 성과가 없진 않을 겁니다.”

“그래서 얼마나 데리고 있으려고.”

“기간은……, 글쎄요…….”

그는 잠시 허공에 시선을 두고 헤아리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석 달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고민은 시늉뿐이었다.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내 경고를 무시했다간 석 달 뒤엔 네 손으로 직접 쥰의 목숨 줄을 끊고 있을 거다. 네 주군이 보는 앞에서.”

이게 과연 올바른 대책인지는 그도 확신하기 힘들었다. 그런데도 열흘 내내 고민해 내린 결론이 이것뿐이라서. 또 이제 겨우 두 달 하고도 삼 주 남짓한 시간만이 남아 있는 상태라서.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해시트는 여전히 라피난의 말이라면 쉽게 수긍하는 사람이었다.

“알겠어. 곱게 데리고 있다가 돌려놔.”

“감사합니다.”

라피난의 고개가 꾸벅 아래로 내려갔다. 곱게……. 맹세할 수 없는 약조 앞에선 그저 얼버무릴 뿐이었다.

참고로 쥰은 한동안 라피난의 뒤를 따라다니라는 명령에 아주 사색이 되었는데, 이미 황제와 재상이 결정했다는데 일개 근위대장에게 거절의 기회 같은 건 주어지지 않았다.

*

국경지대에서의 전투는 야만족들을 몰아내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다. 해시트가 필사적으로 전쟁을 반려한 덕분이었다.

실제로 당장 그들을 추격해 베누스의 해협을 짓밟고 미케나 황제의 발아래 조아리게 해야 마땅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때마다 해시트는 그것이야말로 야만족들이 고대하는 결과라면서 크샨 왕국의 패배를 잊지 말라 당부했다.

크샨을 꺾은 베누스는 어느새 그 미케나마저 수를 읽어야 할 만큼 만만찮은 국가로 거듭나 있었다. 베누스를 징벌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군사를 이동시킨다면 그만큼 수도에 빈 병력이 생길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전투 이후 귀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영토 곳곳에 해적과 산적들이 출몰한다는 소식이 끊이질 않았다.

피해를 입은 대부분은 규모가 작은 농업지대였다. 정체불명의 적들은 다짜고짜 마을에 들이닥쳐 짐승을 죽이고 농작물을 빼앗고 군관들을 마을 초입에 거꾸로 매달아 두곤 했다. 그러면서도 사람은 한 명도 해치지 않아 반항하는 이들은 그저 포박해 둘 뿐이었다.

차라리 죽음으로 입을 막아 버리면 아무도 모를 텐데, 상황이 이렇다 보니 소문은 눈 깜짝할 새 퍼져 매일같이 호소문이 범람했다.

그런 나날이 벌써 한 달째.

속셈이 뻔히 보이는 도발이 이어지던 어느 날, 베누스에서 전령이 찾아들었다.

“베누스의 국왕께서는 대미케나 제국과의 화친을 원하십니다.”

야만족의 심부름꾼을 편전에 들인 것만 해도 충분히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그것도 사절이 여성, 그것도 수행원 없이 혼자 찾아왔다기에 약간의 흥미가 돋았던 덕분이다.

하지만 말 같지도 않은 내용까지 들었으니 이제 그만 되었다. 해시트는 코웃음을 치며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즉각 몰려간 기사들이 사절을 둘러싸고 목에 창을 겨눴다.

해시트가 말했다.

“저 아래에서 웅성거리는 게 하찮아서 그냥 내버려 뒀더니 갈수록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제국이 네까짓 것들이 무서워서 아량을 베푸는 줄 아느냐?”

한껏 경멸에 찬 시선이 계단 밑으로 꽂혔다.

사절은 갈색 피부에 붉은 눈을 가진 여성이었다. 이국적 외모에 걸맞게 탁한 은발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제국 언어에 아주 유창했다. 고개만 조금 까딱여도 창살에 목이 꿰뚫릴 처지면서도 전혀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지당하십니다. 사실 베누스의 국왕께서도 큰 기대는 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저 더 이상의 혼란을 막기 위해 두 분이서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면 어떨까, 생각하실 뿐이지요.”

“낯짝하고는. 먼저 혼란을 야기한 주제에.”

“제안을 거절하시는 겁니까?”

“그뿐이겠나? 네 시체를 너희 왕에게 선물할 생각이다.”

“외람되지만 폐하, 그것만은 다시 생각해 주시길 간청드립니다.”

“이 몸이 어째서.”

“소인의 뱃속에 새 생명이 자라고 있으니까요.”

“…….”

그 말에 해시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루함에 턱을 괴고 있던 팔도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해시트뿐만이 아니라 장내의 모든 이들이 술렁이고 있었다. 이 한겨울에 임신한 몸으로 베누스에서 미케나까지, 최소 석 달은 될 여정을 수행원도 없이 달려왔다니 누군들 믿기 어려웠으리라.

한편 사절은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띤 채 자신의 아랫배를 감싸 안은 모습이었다. 자세히 보니 납작한 듯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하신 대미케나 제국의 황제께서 설마 홑몸이 아닌 아녀자의 목을 치지는 않으시겠지요. 저는 ‘죽어 마땅한 어른’이라지만 이 아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 아이의 아비는…….”

“다물어.”

해시트는 본능적으로 이야기를 끊었다. 그러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상대의 눈을 노려보다가 싸늘하게 명령했다.

“이자를 감옥 탑에 가둬라. 굶기진 말되 한 달 내로 배가 불러 오지 않으면 지하실에 있는 놋쇠 황소를 꺼내서 그 안에 처넣고 달궈 죽여 버려!”

그녀가 이런 식의 잔인한 형벌을 내린 건 처음이었다. 매사 적군 앞에선 냉정하고 가차 없기로 유명했으나 대개 심문을 위해서였거늘, 이번엔 마치 개인적 원한을 좇기라도 하는 듯 눈빛부터 매섭기 그지없었다.

그게 배신감 때문이라는 걸 라피난이 모를 수는 없었다. 그는 해시트가 몸을 돌린 순간 얕게 한숨 쉬며 그녀를 따라나섰다.

예상대로 해시트는 편전을 빠져나오자마자 뒤돌아 소리쳤다.

“제릴! 제릴의 안부를 확인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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