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
대답이 돌아올 때까지 버틸 심산이었다. 하지만 침묵이 얼마만큼 이어지기 무섭게 창밖에서 느닷없이 군악대의 연주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단순한 훈련이라 치부하지 못할 만큼 우렁찼다. 해시트는 곧장 침대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게 무슨……!”
군악대뿐만이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제국군의 행렬에 놀란 그녀가 창문에 손을 대었을 때 라피난이 말했다.
“폐하께서 출정 명령만 내려 주시면 됩니다.”
군장을 짊어진 병사들이 드넓은 광장을 빈틈 하나 보이지 않게 메우고 있었다. 새카만 제복과 대비되는 하얀 옷을 입은 사제들이 병사 한 명 한 명의 이마에 성수를 찍어 주는 중이다. 황태자 시절 해시트가 숱하게 보았던 광경, 말 그대로 출정 직전의 순간이다. 다들 해시트의 등장을 기다리는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망연히 입술을 달싹였다.
“안 돼, 전쟁은.”
“피할 수 없습니다.”
“없으면 찾아야지! 어떻게 먼저 쳐들어갈 생각부터 하나!”
“우리 영토에서 싸우게 되면 백성들이 휘말릴 테니까요.”
“병사들은 개죽음당하게 내버려 둬도 괜찮다고?”
“개죽음 안 당합니다. 숫자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우리 군이 월등합니다.”
“라피난!”
“압니다. 벌써 모든 동맹국에 협조를 구해 두었습니다. 물자 보급과 후방 병력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침 다들 베누스에 쌓인 게 많더군요. 이레이가 정체를 드러내는 한이 있더라도 온 대륙이 함께 싸우면 승산은 있습니다.”
고작 며칠 사이에 이토록 철저하게 준비를 마쳤다니 기함할 노릇이다. 해시트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진정시켰다.
“언제부터 전쟁을 원했지?”
“원한 적 없습니다.”
“네가 대신들을 설득한 거야.”
“그럴 리가요. 저도 막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왜 못 막았어!”
결국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벌게진 눈으로 올려다본 라피난의 얼굴에는 오직 해시트만이 알아볼 수 있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이레이 린이 병사들을 유인해 폐하께서 납치당하시는 장면을 목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뭐?”
해시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라피난은 높낮이 없이 부연했다.
“목격자가 너무 많아 다 죽일 수 없었고, 그들을 죽인다고 해 봤자 이미 봉화가 피어오른 뒤였습니다. 솔직히 폐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자고 설득한 것만으로도 제 힘에 부쳤습니다.”
“……그가……, 전쟁을 원했다고?”
“예.”
혼잣말 같은 그녀의 반문은 쉽게 맥을 잃었다. 해시트가 꾹 입술을 다물어 버리자 라피난의 차례로 돌아갔다.
“그래서 숲을 부수고 폐하를 데려갔겠죠. 짐작하지 못하셨습니까?”
그는 더 이상 동요하지 않았다.
“지금 세간에 무슨 소문이 떠도는지 아십니까? 대신들이 뭐라고 떠들어 대는지는 들어 보셨습니까. 폐하의 마음이 너무나 심약하여 이토록 전쟁을 두려워하니 평생 성 안에 갇혀 보기 좋은 것들만 보고 싶어 하신다고요. 혹은 폐하께서 신전을 배척하셔서 나라에 천벌이 내리는 것이라고요.”
“아냐, 나는…….”
해시트가 떨리는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변함없는 창밖 풍경에 덜컥 말문이 막힌다.
“나는…….”
말소리가 점점 작아지다가 결국 끝맺지 못하고 가물어졌다. 흔들리던 황금색 눈동자가 차츰 겨울바람처럼 차가워졌다. 그녀는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라피난.”
“예.”
해시트는 창밖을, 라피난은 해시트만 바라보고 있었다.
실낱같은 기대를 붙잡고 있는 쪽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확인하고 싶었다.
“너 혹시, 나에게 더 숨기는 거 있나?”
“…….”
“있다면 지금 말해라. 너를 출정시켜도 좋을지 결정해야겠다.”
“없습니다.”
요지부동이던 그의 시선이 천천히 비껴갔다. 이내 라피난이 창밖을 바라봄으로써 두 사람의 시선은 같은 곳을 향하게 되었다. 함께 백만 대군을 바라보면서 지겨운 맹세를 주고받는 것도 언제나와 같았다.
“정말이냐?”
“네. 없습니다, 이제.”
짧은 사이 라피난의 대답은 더욱 단호해져 있었다. 거짓으로 세운 맹세에 후회 따위 하지 않는다고. 자고로 모래성을 쌓을 때 천년만년 굳건하리라 믿는 이는 없는 법이다.
단지, 한때 친구였다가 지금은 적이 된 남자의 저주만이 귓가에 생생했다.
“더 이상 거짓말에서 도망치지 못하게 될 거다. 지금껏 덮어 왔던 모든 진실이 의심이 되어 네게 쏟아질 테고, 심지어 그중에는 정말 네가 저지르지 않은 짓도 포함되어 있을 거다.”
그가 맞았다. 의심은 이미 시작되었다.
라피난 카일은 전쟁을 원하지도, 무엇보다 제릴 디어를 죽이지도 않았다.
추운 지방으로 유배당한 소년을 딱히 여기는 해시트를 볼 때마다, 어머니 잃은 소녀에게 죄책감을 느끼던 자신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제릴의 처우에 한해서 라피난은 해시트 몰래 그 어떤 짓도 행하지 않았다.
“그 억울함을 감당할 수 있겠나?”
어쩌겠나. 감당하지 못한다면 파괴당할밖에. 혹은 스스로 산화해 상대방을 파괴하는 방법도 있었다.
‘너야말로 감당할 수 있겠나. 이레이.’
라피난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여전히 후회는 없었다. 모래성의 완성이 코앞이었다. 그리고 모래성을 완성한 이가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이 세계의 원칙이다.
*
이레이는 모처럼 여유를 부리며 걸었다. 말 한 필 빌리지 않고 느긋하게 걸음을 옮긴 탓에 수도를 빠져나가는 데만 일주일이 걸렸다.
수도를 지나고, 또 수도와 밀접해 있는 도시마저 벗어나자 거리에는 확연하게 사람의 밀도가 줄어들었다. 드디어 탁 트인 하늘 아래다. 그는 시골길의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뻐근한 뒷목을 주물렀다. 그의 움직임에 로브가 흘러내리면서 이질적인 붉은 머리가 밖으로 드러났다. 지나가던 누군가가 소리쳤다.
“저놈의 빨간 머리를 내가 확!”
오, 머리색으로 시비가 걸린 건 아주 오랜만이다.
이레이는 모처럼을 기념 삼아 그를 죽여 버리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우뚝 굳어 버렸다.
“옐! 내가 저 빨간 머리랑 놀지 말라고 했지?”
백발의 노인이 공놀이하는 아이들을 모아 놓고 잔소리 중이었다. 허공에 지팡이까지 휘둘러 가며 열변을 토하는 그의 행동에, 무리 중 머리색이 붉은 어린아이 한 명이 고개를 푹 숙이고 땅바닥에 신발코를 찧어 댔다.
그때 ‘옐’이라고 불린 아이가 입술을 비죽이며 받아쳤다.
“에이, 할아버지는 만날 이상한 말만 해. 왜 친구랑 놀지 말래요?”
“왜긴 왜야! 다 너 걱정돼서 하는 말이지! 우리 제국에 빨간 머리가 어디 있어? 어디서 왔는지 모를 떠돌이에게 마음 주는 거 아니다.”
“제 친구 이름 있거든요. 할아버지는 사람들이 할아버지한테 하얀 머리라고 부르면 좋겠어요? 그리고 선생님이 사람 차별하는 거 아니랬어요. 그런 거 아주 부끄러운 짓이래요.”
“뭐, 뭐야?”
“그렇지, 얘들아? 안 그래? 히멜!”
옐이 보란 듯이 뒤편의 아이들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새를 못 참고 슬금슬금 땅따먹기를 하던 아이들이 다시 우르르 모여 한꺼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맞아. 할아버지가 나빠요.”
“죄송한데 할아버지, 저희 공놀이해야 하거든요.”
“우리 히멜이 얼마나 공을 잘 차는데요!”
“히멜! 가자!”
“어? 어어……. 응! 가자.”
빨간 머리 여자아이, 아니 히멜이 얼떨떨했다가 활짝 웃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아이들은 노인을 내버려 두고 달려가서 공을 차기 시작했다. 노인이 기가 찬 듯 한참이나 제자리에서 지팡이를 휘둘러 댔지만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말세야. 말세. 이러다 나라가 망하려고!”
노인의 역정에 대꾸해 준 이는 마침 산책길에 나온 중년 한 명뿐이었다.
“어르신. 그냥 내버려 두세요. 애들 재밌게 노는데요, 뭘.”
“자네는 저 꼴이 이상해 보이지도 않는가?”
“글쎄요. 이상해 보이는 건 아직 어색하기 때문 아닐까요? 어색한 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이렇게 세상이 바뀌어 가나 보죠.”
“끄응……. 늙으면 죽어야지, 죽어야 해!”
“하하. 뭘 또 그렇게까지.”
이레이는 말없이 시선을 거뒀다. 그러자 모든 게 귀찮아졌다. 그냥 떠나 버려야지. 마음을 고쳐먹고 걸음을 떼었을 때 발목께에 바람 빠진 공이 부딪혔다. 톡.
“헉! 죄송합니다!”
아이 하나가 큰 소리로 사과하며 달려오고 있었다. 이레이는 반사적으로 로브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아이에게 공을 걷어차 준 뒤 가던 길을 갔다. 공을 건네받은 아이가 힘껏 소리쳤다.
“아저씨! 감사합니다!”
“…….”
“감사해요!”
왜인지 이레이는 지금은 태워 버린 편지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머리가 붉고 눈이 새파란 남자를 떠돌이라고 부르지 않는 세상.’
답장을 쓴 적도 있었지만, 그것도 같이 태워 버린 지 오래였다.
‘그런 세상이 오면 당신도 조금은 더 행복해질까?’
왜냐하면 그런 세상이 올 거라 기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단지 그러길 바랄 뿐.’
한낱 인간인 당신이 바란다고 해서 세상이 그리 쉽게 변하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수백 년을 지켜봐 온 그에게도 사실은 전혀 녹록지가 않아서.
갑자기 목덜미가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서 그는 손바닥으로 그 위를 덮었다.
*
지금껏 베누스의 전쟁 패턴을 고려한다면 무리한 출정으로 수도에 빈틈을 만들어선 안 됐다. 차라리 불마차를 타고 절벽으로 뛰어내리는 게 낫지. 게다가 해시트의 부상이 아직 실밥도 풀기 전이었으므로, 다방면으로 고심해 본들 역시 답은 하나였다.
“네가 지휘해. 나는 유사시에 후방을 맡겠다.”
“문제 안 생기도록 하지요.”
“그러든지.”
해시트는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제릴의 죽음에 대해 라피난이 무언으로 자백한 이후, 라피난을 대하는 그녀의 행동은 눈에 띄게 냉랭해졌다. 어째서 죽였느냐 묻지도 않았다. 뻔한 대답을 들어 봤자 원망만 더해지리란 판단이었다. 라피난도 그런 해시트의 의중을 이해한다는 듯 되도록 말을 삼갔다.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결국 출정 당일 새벽, 해시트는 여러 준비로 바쁜 라피난의 방에 찾아와 넌지시 질문했다.
“대체 쥰은 왜 죽이려고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