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9화.
바로 눈앞에서 요란한 빨강이 반짝이고 있었다. 본디 수면 위를 비쳤어야 할 햇볕을 모조리 낚아채기라도 한 듯 너무나 새뜻하고 강렬했다.
해시트의 얼굴만 한 짙푸른 눈동자는 분명 카렌의 그것과 같은 색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그 안에 밤하늘의 은하수가 흐르기라도 하는 양 넋을 놓게 만들었다. 천천히 깜빡이는 붉은 눈꺼풀 아래 흑수정 같은 속눈썹이 촘촘했다. 어느 예인이 유수의 세월을 견뎌 하루하루 깎아 내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었다.
[해스.]
“…….”
이레이는 불러도 대답 없는 해시트를 기다리면서 대여섯 번 정도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조금 작아진 음성으로 말했다.
[놀랐나 보군.]
시무룩, 아니, 씁쓸했다. 해시트가 퍼뜩 눈을 부릅떴다.
“아닌데? 안 놀랐는데?”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너무 멋있어서 잠깐 정신을 못 차렸을 뿐이야. 그렇게 말했다간 향후 삼백 년 동안 놀림받을 것이다. 그녀는 시치미를 뚝 뗐다.
다행히 이레이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던 모양이다. 겁내는 게 아니라면 됐다, 그가 연하게 웃었다. 인간의 이목구비와 상이한 얼굴에서 미소를 발견해 내다니 그저 경이롭기만 했다. 해시트는 억지로 놀란 마음을 달랬다.
“카렌보다 큰데.”
[음, 살짝? 우리 아버지께서 날 워낙 잘 먹이셨거든.]
말이 ‘살짝’이지 최소 두 배는 될 덩치였다. 아무리 날개를 펼친 상태래도 몸집부터가 확연하게 달랐다.
자세히 보면 생김새도 군데군데 차이가 있었다. 온몸에 보석으로 꿴 갑옷처럼 빼곡한 비늘을 뒤집어쓴 건 마찬가지였지만, 이레이의 몸선이 전체적으로 더 날렵한 느낌을 줬다.
몸집은 컸지만 꼬리는 비교적 가늘었고 정수리부터 척추를 타고 내려가는 선을 따라 유난히 검붉은 비늘들이 큼직했다. 길쭉하게 뻗은 하관 아래에는 카렌과 달리 너울거리는 타래도 없었다. 그 타래는 나이가 들어야 생기는 것일까? 절대 호들갑 떨지 않겠다고 다짐했거늘 자꾸만 호기심이 꼬리를 물어 댔다.
넌지시 해시트가 질문했다.
“저기, 혹시 이 모습을 본 인간이 나 말고 또 있나?”
[왜. 질투 나?]
이레이는 늘 그렇듯 대답이 아닌 반문으로 능청을 떨었다. 긴장의 끈이 다른 곳에 머물러 있던 해시트는 평소대로 냉담하지 못하고 진심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조금.”
[…….]
아차. 이레이의 눈동자가 끔뻑 확장된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다. 그녀는 부랴부랴 양손을 내저었다.
“잘못 얘기했어.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짜증 나.]
“뭐야?”
감히 뭐라고? 해시트가 대번 인상을 찌푸렸다. 괘씸하게도 이레이는 변명 대신 분노를 거듭했다.
[짜증 난다고.]
“내가 제나펠 교수와 편지만 주고받아도 심기 불편해하는 놈이, 뭐가 어쩌고 저째?”
[답답해 죽겠군. 이 상태론 힘 조절 해 본 적이 없어.]
“응……?”
그제야 볼 어귀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검은 발톱이 눈에 들어왔다. 짜증의 이유가 이거였나 싶다. 그는 이 순간 해시트의 얼굴을 만지지 못해 아쉬워하고 있었다. 결국 해시트는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뺨으로 손을 뻗어 올렸다. 단단할 줄 알았던 비늘이 생각보다 따뜻했다. 그것을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음 놓고 다녀와라. 기다리고 있을 테니.”
[빨리 갔다 올게.]
“시간 많으니까 천천히 와.”
[오해했군. 내가 급해서 그러는데.]
데구룩, 굴러간 눈동자가 제 뺨에 맞닿은 해시트의 손바닥을 곁눈질했다. 역시나 인간의 표정 따위 아니었지만 능글맞음을 과히 드러냈다. 떨떠름해진 해시트가 황급히 손을 떼어 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선 서로 정서적인 교감을 나누는 데 집중하지 않나?”
[두 교감을 동시에 더 깊이 나눌 방법이 있는데 왜 굳이?]
“잔말 말고 꺼져라.”
이레이가 눈꺼풀을 반쯤 내려 웃음 짓더니 더 지체하지 않고 날갯짓을 시작했다.
[그럼 이따 봐.]
거센 바람이 불더니, 몇 번 펄럭이기도 전에 벌써 배를 드리우고 있던 그림자가 멀찍이 비껴 나 있었다. 볕으로 반짝이는 바다 위에 붉은빛의 잔상이 흩어져 내린다. 그의 날개가 퍼덕일 때마다 곱게 깨뜨린 루비가 바다에 흩뿌려지는 것 같았다.
해시트는 직전까지 뚱했던 얼굴이 무색하도록 그 광경을 몽롱하게 지켜보다가, 이윽고 붉은 섬 안쪽으로 붉은빛이 안착해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부러 중얼거렸다.
“이따 보긴 뭘 이따 봐. 난 잘 거야.”
*
아직 아침에 가까운 시각이었지만 여행길이 고되었던 고로 더 자려면 얼마든지 늘어질 자격이 충분했다. 쪼르르 선박 객실로 달려간 그녀는 출입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잊지 않고 취침 중 팻말까지 내걸었다.
이대로 푹 잠들어서 다음 날 느지막이 깨어나야지 하는 마음이 반, 도대체 뭐가 이렇게 민망하고 뻐근하다고 이렇게까지 내빼게 되는지 모를 마음이 반이었다. 그녀 말마따나 볼꼴 못 볼꼴 다 본 사이인데도.
기껏 잠옷까지 갈아입었건만 뒤척이느라 잠들지 못했다. 이불 속에서 쉼 없이 다리만 배배 꼬아 대다 끝내 결국엔 이불을 홱 걷어 내고 말았다. 질끈 감은 눈 아래로 한숨 같은 한탄이 흘러나왔다.
“망할, 이게 다 그 새끼가 쓸데없이 멋있어서…….”
“네 눈에 멋있으면 쓸데 있는 거 아냐?”
“악! 깜짝이야!”
해시트의 손이 반사적으로 베개를 집어 던졌다.
퍽! 침대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이레이는 엄청난 속도로 달려든 베개에 얼굴을 정면으로 맞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심지어 베개가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고이 낚아채 해시트의 무릎 위에 올려 주기까지 했다.
“취침 중이라고 걸려 있길래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지. 인사는 덕분에 잘하고 왔어.”
네가 여기 왜 있냐고 물으려던 해시트의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입술만 뻐끔 달싹였다.
“깨울까 봐 조용히 들어왔는데 아무리 봐도 안 자는 것 같아서 잠깐 구경하고 있었고.”
분명 문 잠가 뒀는데? 열리는 소리 안 났는데? 그런 추궁을 떠올리기 무섭게 또 선수를 빼앗기니 몹시 난감했다.
“음, 그럼…… 잘 자라. 아침이지만.”
이제 남은 선택지는 ‘알겠으니까 나가.’뿐이었는데, 또 어떻게 알았는지 이레이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신의 존재를 인정한 날을 기념 삼아 신이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면 이럴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해시트의 염원대로 흘러가는 중이었지만 이상하게 탐탁지 않았다. 왜인지 말도 안 되는 청개구리 심보가 발동하려 했다. 그리고 발동해 버렸다.
“잠깐만! 이게 끝이야?”
“응?”
이레이는 새삼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죽이고 싶다……. 헉, 내가 무슨 생각을. 해시트가 손등으로 입술을 가리자 이레이가 기다렸다는 듯 씩 웃으며 다시 침대 앞에 쪼그렸다.
“뭐가 더 있으면 좋겠나?”
와, 진짜 죽이고 싶게.
해시트의 눈에 피어오른 살의를 뻔히 보았을 텐데도 이레이는 양손으로 턱까지 받친 채 싱글싱글 웃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안 싫다는 건가?”
한 번은 열이 나길래 봐줬고, 두 번은 펭귄 때문에 퇴짜를 맞았고, 세 번째는 보는 눈이 있을까 봐 싫댔다. 요컨대 저 딴엔 참을 만큼 참았으니 기회가 왔을 때 실컷 놀려 먹겠다는 심보가 뻔했다. 해시트는 고민했다. 어떻게 전세를 역전시켜야 할지…….
별안간 그녀가 제 무릎 위에 있던 베개를 슬쩍 치우며 옆자리를 두드렸다. 팡팡.
“올라올래?”
이레이는 1초도 못 이기는 척 뜸 들이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밝은 데선 곧잘 빼는 해시트를 위해 손가락을 튕겨 커튼까지 쳐 주었다. 동시에 스르륵 들춰진 이불 밑으로 단단한 무릎이 기어들어 온다. 협박인지 어깃장인지 모를 속삭임이 해시트의 귓가에 낮게 으르렁거렸다.
“중간에 무르기만 해 봐.”
“뭐……. 어디 한번 해보시든가.”
해시트는 반쯤은 찡그리고 반쯤은 재미있어하는 낯으로 그의 그림자를 쫓았다. 당장 입술부터 부딪힐 줄 알았더니 웬일로 눈두덩에 길게 머물렀다. 볼을 깨물 것처럼 굴더니 손가락으로 입술을 벌리고 안쪽을 헤집다가 조심스레 혀를 밀어 넣었다.
용케 잠옷 단추를 쥐어뜯지 않고 하나하나 손수 끌러 내기에 칭찬 대신 그의 목덜미에 양팔을 둘러 주었다. 그 즉시 이레이가 해시트의 한 손을 더듬어 목덜미 어디론가 끌고 갔다. 단단하고 매끄러운 피부 아래 선연한 맥박이 느껴진다.
와중에 피부와 이질적인 단단한 감촉이 손가락에 걸리자 해시트는 눈 감은 채로 빙긋 웃었다. 역린은 왜, 장난처럼 꺼낸 질문은 물씬 다가온 숨결에 목덜미를 깨물리면서 짧은 비명으로 돌아갔다. 아얏.
“너도 보이는 데 있으면 좋겠다.”
이레이가 해시트의 목덜미를 깨문 자국 위에 이마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몇 번이나. 너도 보이는 데 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감정이…….
이 정신 사나운 놈을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해시트는 한숨에 신음을 숨기며 그의 어깻죽지에 손톱을 박았다. 그래, 나도 연모한다. 됐냐? 그런 말은 이런 때에나 쉽게 나온다.
*
이불로 온몸을 칭칭 감고 갑판에 나란히 앉아서 달콤한 차를 나눠 마셨다. 해시트는 심각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름을 어떻게 해야 할까? 두 번째 이름은 빼 버린다고 해도 미케나 성씨를 계속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니……. 역시 어마마마 성을 가져와야 하나.”
“진지하게 대답하자면 지금 네 옆에 있는 남자한테도 어엿한 성씨가 있거든?”
“아아, 즉석에서 그럴듯한 이름을 지으려니 가짜 족보 사는 기분이야.”
“싫다 이거지. 그래. 너 알아서 해라.”
이레이는 그럴 거면 왜 물어봤냐는 핀잔 대신 해시트의 손에서 머그잔을 빼앗아 바다에 내던졌다. 풍덩! 잔잔하던 수면이 일순 요동치다가 또 금방 가라앉았다.
해시트의 입술이 뾰족해졌다.
“나 덜 마셨는데.”
“이제 차 그만 마시고 밥 먹자.”
“추워서 입맛 없어.”
“안아 줄까?”
“아니. 그것보단 방금 집어 던진 컵을 되찾아 와 주면 고맙겠는데.”
“꼭 그래야 해?”
“…….”
“갔다 올게.”
이레이가 시무룩하게 몸을 일으켰다. 해시트는 일부러 그가 난간을 쥘 때까지 기다렸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됐고, 차나 새로 타다 줘. 따뜻한 거 마셔야 머리가 돌아갈 것 같아.”
돌고 돌아 다시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이제는 새 이름을 고민해 볼 차례였다. 그녀는 뭐가 됐든지 간에 먼 훗날 저 남자가 그녀 이름으로 책만 안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 맞다. 해스.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뭔데?”
“티플리스 2세의 업적이 어땠기에 네 마음에 들었다는 거야?”
“응, 역사책에 나와 있어.”
“…….”
왜냐하면 그런 건 너무 창피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