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시공간을 초월하다.
서기 8년, 왕망(王莽)이 왕위를 찬탈하고 신(新) 왕조를 세워 서한(西漢)을 멸망시켰다.
서기 23년, 곤양(昆陽)에서 전투가 발발하여 신 왕조 왕망의 43만 대군이 2만의 녹림군(綠林軍: 한나라 군대)과 격돌했다.
이일(李軼)과 유수(劉秀) 등의 장군이 이끄는 한나라 군대는 일당백의 기세로 왕망의 40여만 대군을 물리쳤고 이로 인해 왕망의 군사력은 매우 쇠약해졌다.
같은 해, 한나라의 군대가 장안에 입성했고 신 왕조의 황제가 전사해 나라는 몰락한다.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이 장안에 들어와 현한(玄漢)을 세운다.
서기 25년, 적미군(赤眉軍)과 유수의 대군은 현한을 협공했고 경시제 유현은 투항하지만 죽게 된다. 같은 해, 유수가 황제로 즉위해 연호를 건무(建武)로 바꾸고 동한(東漢)의 시대를 연다.
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곤양 전투가 바로 변곡점이다.
2만의 군대로 43만을 물리친 전투는 역사상 가장 불가사의한 사건이 되었고, 이를 계기로 신 왕조는 몰락의 길을 걸으며 동한 왕조 수립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 전투에서 운석이 쏟아지는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후대의 수많은 전설과 문학 작품에서는 이 운석우(隕石雨)를 비중 있게 다루지만, 당시 광경은 세계의 종말을 알리는 듯했다. 운석우가 신 왕조의 군대를 몰살시키면서 한나라 군대가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곤양 전투가 끝나고 중국의 역사는 원래의 흐름대로 흘러갔다.
그러나 곤양 전투에서 운석우가 내리던 찰나, 서로 다른 차원의 천구(天球)가 어지럽게 교차하면서, 이계(異界)의 기운이 운석과 함께 지구로 쏟아졌다.
그 순간, 지구의 역사는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하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으로, 동한 이후 위진남북조, 수당(隋唐), 송원(宋元), 명청(明清)을 거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계의 기운이 쏟아진 새로운 지구이다.
바로 여기서 역사는 새로 쓰이기 시작한다.
우리의 이야기는 기이한 세계에서 펼쳐지는 곤양 전투 1600년 후의 내용이다.
* * *
시끄러운 구호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어난 두변은 극심한 숙취에 머리가 아파왔다.
“나 하나 거세하면, 온 가족이 행복해진다! 환관 학원을 졸업하면 모두에게 배급과 일자리, 그리고 좋은 복지가 제공된다!”
“문관은 글만 알고, 무관은 무예밖에 모르지만, 환관 학원 출신의 인재들은 문무를 겸비한다!”
“엄당(閹黨: 환관과 그 동조자들로 이루어진 도당徒黨)은 대녕 왕조의 마지막 양심이며, 황제 폐하를 수호하는 마지막 영웅이다!”
잠에서 깬 두변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지만, 아직 꿈속인 것마냥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는 한 기업의 영업 담당 이사로, 어제는 거래처 사람들과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신 후, 우아한 자태의 여인과 같은 방에 들어가 뜨거운 밤을 보내고서는 인사불성이 된 상태로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평소처럼 깨어났을 뿐인데, 그의 눈에 너무도 낯선 주위의 환경이 하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디지? 지하 감옥인데? 내 옆에 놓인 탁자, 등잔 그리고 바깥의 수위까지 모두 고대 사극에나 나올 법한 것들인데?
두변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이 입은 옷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이상하고 옛것 같은 옷은 그렇다 치더라도, 가슴에 죄인이라는 글씨는 왜 새겨져 있어?
밖에서는 무슨 대녕 왕조니 환관 학원이니 하는 외침이 들리는데, 언제부터 환관이 저렇게 당당하게 자신을 환관이라고 떠벌리게 된 거야? 자기네가 대녕 왕조의 마지막 양심이라고? 심지어 학원도 개설했어? 위충현(魏忠賢: 중국 명나라 시대의 환관 겸 정치가)이 정권을 잡았을 때도 엄당이 이렇게 활개 치지는 않았을 텐데?
설마, 내가 시공간을 초월한 건가?
말, 말도 안 돼!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얘긴데, 그런 터무니 없는 일이 내게 일어날 리 없어!
혹시 누가 나를 놀리려는 건 아닐까? 아니면 촬영중인가? 여긴 도대체 어디야?
아니면, 나랑 하룻밤을 보낸 그 여자의 남편이 어제 일을 알고 나를 감옥에 가두어 괴롭히려는 건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두변은 불안이 엄습했다. 그는 영업을 위해 불법적인 일을 다수 해왔던지라 일반인은 절대로 알 수 없는 암흑세계의 비밀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만약 정말 감금된 것이라면, 남은 생은 정말 지옥보다도 못할 정도로,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끔찍할 텐데!
사실을 확인해보기 위해, 두변은 앞으로 걸어가 감옥의 철창살을 붙잡고 문 앞의 수위에게 아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잘생긴 형님, 가서 사장님한테 말해줘요. 어제는 내가 취했어요.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부인과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요!”
수위가 돌아보며 소리쳤다.
“곧 죽을 놈이 계속 헛소리만 지껄이네. 넌 글렀어.”
두변이 애걸했다.
“사장님한테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말해줘요. 제가 다 말씀드릴게요. 나가면 잘생긴 형님께 진 이 빚, 꼭 갚을게요!”
“시끄러!”
수위가 화를 내며 허공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알 수 없는 강력한 힘이 날아왔고, 두변은 그 힘에 튕겨서 감옥의 딱딱한 벽에 등을 세게 부딪힌 후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더니 눈에 불꽃이 튀면서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기절하기 직전, 두변은 불현듯 깨달았다.
여기는 그가 살던 그곳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이 시공간을 초월한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그가 살던 그곳에는 이런 ‘대단한’ 무공이랄 게 없을 테니까!
두변이 다시 깨어났을 때, 날은 이미 어두컴컴해졌고 밖에서는 또다시 구호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내가 엄당을 자랑스러워하지만, 내일은 엄당이 나를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우리에게 집은 바로 황궁 단 한 곳뿐! 우리에겐 황제 폐하뿐이다!”
“몸과 마음을 바쳐 죽을 때까지 황상께 충성을 맹세하고 백성을 위해 살아간다!”
내가 정말 시공간을 초월한 게 맞아?
한번 기절을 했음에도 두변은 여전히 이 상황이 황당하기만 했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 기절해 있으면서 이제 현실을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두변에게 시공간 초월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있던 그곳에서 그는 아무런 친지 관계도, 삶에 대한 미련도 없었다. 고아원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신의 부모가 누군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는 워낙 머리가 좋아서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잘했지만, 변덕이 심했다. 어릴 때는 과학을, 중고등학교 때는 문학을 좋아했다가, 나중에는 철학에 심취해서 명문대학의 철학과에 입학했다.
보통 철학과 학생은 졸업과 동시에 실업자가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능력이 남달랐던 그는 대학교에 남을 수 있었고, 석사를 마치고는 대학 강사가 되었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박사 과정까지 꾸준히 준비했고, 그대로라면 10년 이내에 철학과 교수가 될 수 있었다.
그의 여자친구는 철학과 주임의 딸이자 같은 대학의 음대 교수였다. 비록 넘쳐나는 부를 누리면서 살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대로만 순조롭게만 흘러갔다면 그의 인생은 매우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변은 용모는 출중했지만 무척이나 변덕스러운 성격의 소유자이며, 교활하기도, 천진난만하기도 한 눈동자로 여자들에게 치명적인 매력을 흘리고 다녔다. 그리고 그 또한 많은 여자에게 매력을 느꼈고 항상 새롭고 신선한 것에 대한 열망이 들끓었다.
그의 여자친구는 예쁘고 또 재능도 있었다. 하지만 결혼 2개월 전, 두변은 새로운 것에 대한 유혹을 이기지 못해 바람을 피웠다.
결벽증이 심했던 여자친구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정도의 충격을 받아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할 정도였다.
여자친구와 헤어진 두변은 대학교 일자리를 그만두고 철저하게 자신을 방종시켰다. 철학과 출신으로 일자리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지만, 용모가 준수하고 박학다식한 그는 지식인들부터 노숙인까지 누구와도 거리낌 없이 친해질 수 있었다. 겉모습은 학자지만 사실 저속한 인간이고, 또 그렇게 보여도 학자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이런 재능과 말솜씨를 어찌 낭비할까. 게다가 보통 잘생긴 게 아니다 보니, 두변은 조금은 수상쩍은 기업의 영업 사원이 되어 자신의 역량을 십분 발휘했다. 하는 일마다 술술 잘 풀리던 그는 성과급을 쓸어가다시피 챙겼으며, 몇 년 만에 큰 집을 마련했고 포르셰를 구입했다. 그는 그곳에서 아름다운 여인들, 눈부신 권력과 부 사이를 표류하고 있었다.
퇴폐적인 생활에 빠진 그는 매일 아침 눈을 뜨고 가장 먼저 하는 생각이, ‘제길, 이 여자는 또 누구야?’였다.
그런 생활이 즐겁기는 했지만, 행복하기는커녕 공허하기만 했다.
그러니, 시공간을 초월한 덕분에 더 알차고 더 재미난 인생을 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위로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더 이상 피폐하고 무의미하게 살지 말자. 술에 절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의 방향도, 목표도 없는 삶은 그만하자.
곧이어 그는 매우 중요한 일이 문득 떠올랐다.
여, 여기가 환관 학원이라면,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환관인 건가?
그는 재빨리 바지 속으로 손을 넣어 ‘물건’을 확인해보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아직 있어. 아직 있어!
하지만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든 두변은 등에 식은땀이 흐르면서 소리 없이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음경은 제대로 있지만, 고환이 없잖아!
이런 빌어먹을 하느님 같으니라고. 아니, 이왕 해주실 거, 왕후장상까진 아니어도, 있을 거 있는 몸의 가난한 청년으로 만들어줬어도 괜찮잖아요! 가난함에 굴하지 않고,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여기면서 갖은 인생의 굴곡을 겪으며 사는 것도 괜찮잖아요!
그런데 시공간까지 초월해서는 기껏 환관으로 만들어 준다고?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데!
이제 내게 희망이나 미래가 있기는 한 거냐고요!
“시끄러우니까 입 닥쳐! 너는 내일 떠날 거니까 조용히 잠이나 쳐 자. 도저히 못 견디겠으면 알아서 죽던지! 괜히 우리 엄당에 먹칠이나 하지 말고!”
수위가 가느다랗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두변은 이제야 이 수위도 목소리가 얇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모두 환관이로구나!
“하늘이시여. 수많은 여자와 놀아난 저를 벌하시려고 환관으로 만드신 겁니까?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습니까!”
두변은 가슴이 찢어질 듯한 슬픔에 목이 메어왔다.
비록 매일 아침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 옆에서 일어나는 것도 공허했지만, 그건 겉으로만 그런 거지, 마음속 깊은 곳에선 우월감에 가득 찼었다.
하지만 이제, 여자 없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그런데 그때, 두변은 자신이 거세당한 상처가 없음을 깨달았다.
이런 걸 고환 정체(睾丸停滯 : 생후에도 고환이 음낭까지 내려가지 않은 상태. 정류 고환停留睾丸이라고도 한다. 정도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다. 복강 안에 정체되어 있어서 외부에서는 만져지지 않는 잠재 고환(복부 고환), 서혜부에 정체되어 있는 서혜 고환, 서혜부와 음낭 사이에서 이동하는 것 등이 있다. 남성 불임이나 악성 종양 발생의 원인이 된다.)라고 한다. 시공간을 초월해서 얻은 이 몸은 고환이 없는 게 아니라 아직 배 안에머물러 있을 뿐이다. 여기는 의학이 발달하지 못해서 고환 정체라는 게 뭔지 모를 테고, 이런 사람들은 선천적인 고자라고 여길 테니 환관 학원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두변은 갑자기 희망이 샘솟았다.
미래가 여전히 불확실하긴 하지만, 만에 하나의 가능성으로 내가 남자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잖아? 그럼 내가 한 번 열심히 살아 볼 가치가 있는 거 아냐?
이렇게 슬픔과 기쁨에 몰입하다 보니, 두변은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가 긴 한숨을 뱉고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포기하긴 아직 이르지. 내겐 희망이 있어!”
그때, 밖의 수위가 차갑게 말했다.
“내일 죽을 놈이 희망은 무슨!”
“왜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요? 내가 왜 감옥에 갇힌 거고, 내가 왜 내일 죽는 건데요?”
“두변, 네놈이 한 짓을 네가 모른다고? 너는 내일 죽는 목숨이고, 이 사실은 절대 바뀌지 않아. 네가 지은 죄로는 아무도 네 목숨을 구할 수 없다고!”
내가 시공간을 초월해서 들어온 이 몸의 이름도 ‘두변’이구나.
“고자인 두변 네놈이 양갓집 부녀자를 희롱해? 더욱이 최씨 가문의 낭자를? 참나, 네놈은 죽어도 여한이 없겠구나!”
내가 양갓집 부녀자를 욕보였다고? 게다가 어떤 유명한 대가문의 낭자를?
두변이란 놈이 대단했던 모양인데? 이놈도 기품과 풍모가 넘쳐나는군. 환관이 돼서도 이런 일을 하다니. 고자지만 의욕은 넘쳤나 보네.
근데 의욕에 비해서 실력은 영 터무니없었나 본데? 그 여자를 뜻대로 얻지도 못하고, 되레 감옥에 갇혀버리다니. 이놈 덕분에 나는 이곳에 오자마자 또 죽을 목숨이 되어버렸잖아!
환관이 된 것도 정말 서러운데, 그것도 모자라서 내일 죽을 운명이라니. 차원도 넘나들었는데, 고작 이틀만 살 수 있다고? 정말 이보다 더한 비극이 어딨어!
두변은 온 신경을 집중해서 몸의 주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회상했다.
이봐, 도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거야?
그러자 갑자기 몸의 주인이 갖고 있던 수많은 기억이 한꺼번에 파도처럼 뇌리에 밀려왔다.
머릿속에 들어온 기억을 빠르게 훑은 두변은 오로지 한 가지 감정밖에 들지 않았다.
너무 억울해! 너무 억울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