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27화 (27/648)

제27장: 의부에게 후회란 없다.

다음 날 아침이 밝기도 전에 두평아는 두변을 침상에서 끌어 내려 같이 거리를 거닐며 물건을 샀다. 온종일 그녀를 따라다니면서 몇 번이나 희롱을 당했고 또 몇 번이나 꼬집혔는지 모르겠다.

칠석날이 지나고 평아는 오주부로 돌아가야 했다.

그녀는 힘껏 두변을 껴안고 그의 체취를 맡으면서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그녀는 두변의 두 눈을 보며 말했다.

“나쁜 놈, 나를 보러 꼭 오주부로 와야 돼! 네가 무능해서 내가 이렇게 멀리 시집간 거니까.”

내일이면 이문회는 3대 학부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인원들을 거느리고 남해 도장으로 가야 했다. 일전에 환관 학원에서 대회를 개최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남해 도장에서 개최할 차례고 다음번이 이강 서원이었다.

이번 대회에 당엄이 참가하는 것이 확실시되면서, 이문회는 승리를 다짐했다. 꼴찌를 면하는 것뿐 아니라 학전 1,500묘를 되찾아 오겠다는 각오였다.

이번 대회는 학전 1,500묘뿐만 아니라 이문회의 앞날도 걸려있는 너무나 중요한 시합이었기 때문에, 이문회는 차마 두변에게 경험을 쌓으라며 출전을 권할 수가 없었다.

바로 이때, 밖에서 환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산장, 광동의 왕굉 공공께서 뵙고자 하십니다.”

왕굉은 광동 환관 학원의 산장으로 올해 쉰다섯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둘 다 산장이었고 광동 환관 학원이 더 세력이 컸지만, 왕굉은 동창의 만호를 겸직하지 않은 데다가 나이가 이미 쉰다섯이 되었기 때문에 그저 연배가 높을 뿐 엄당 내부에서의 지위는 이문회보다 낮았다.

하지만 결국 왕굉의 나이가 열 살 더 많기에, 이문회는 얼른 나가 왕굉을 맞이했다.

“왕 공을 뵙습니다. 며칠 전에 제가 광주에 갔을 때 남경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아쉬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왕 공께서 내밀어 주신 구원의 손길에 저 이문회 오늘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이번에 광동 환관 학원이 당엄을 광서로 전학시키는 과정에서 왕굉이 이문회를 많이 도와줬으니 이문회의 출세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셈이었다.

“문회, 이럴 필요 없네. 우리 모두 하나의 당에 속하지 않았는가. 서로를 도와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

왕굉이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며 말을 이었다.

“나를 보러 광주에 온 건 알고 있네. 그래서 나도 서둘렀지만, 시간에 맞춰 광주에 도착하지 못했어. 그래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계림부로 달려왔네.”

“왕 공께서 무슨 일로 이 먼 길을 오셨습니까? 제 힘이 닿는 일이면 물심양면으로 돕겠습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니 자네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일 걸세.”

“말씀하시지요.”

“당엄이라는 아이가 정말 괜찮지. 우리 엄당에서 정말 보기 드문 인재야. 우리 엄당의 미래가 그의 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걸세.”

“당엄은 정말 보기 드문 인재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당엄을 의자로 삼는 게 어떻겠는가?”

왕굉은 말을 하면서 웃음을 지었지만, 눈빛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이문회는 그 말에 얼굴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건 간단히 누구를 의자로 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당엄을 이문회의 후계자로 삼기를 원하는 의도였으니, 매우 신중히 처리해야 했다.

당엄은 엄당에서 공인하는 차세대 수장이지만 엄당 고위층 내부에서는 아직 의견이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 일례로 이문회가 이끄는 세력은 당엄이 엄당의 수장을 맡는 것에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당엄이 문관 세력에서 넘어온 자이기에 적절한 출신배경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문회의 의부는 향후 당엄이 궁정에 들어올 수는 있지만, 동창과 어마사를 장악하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되며 병권(兵權)과 무권(武權)도 그에게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고 명확히 했었다.

이문회는 동창 대도독의 가장 유력한 후보인 만큼, 당엄이 이문회의 의자가 되기만 하면 큰 어려움 없이 동창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이건 일종의 거래이자 강요였다.

만약 이문회가 이 조건을 받아들이면 이문회의 모든 자원은 모두 당엄이 계승하게 되므로 두변이 설 자리는 없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문회가 당엄을 양자로 삼지 않는다면, 현재 닥친 난관도 극복하기 힘들 테니 이문회 자신의 미래가 굉장히 암울해진다. 이번 3대 학부 대회에서 지게 되더라도 이문회가 곧장 타격을 받는 건 아니지만, 그는 평생을 광서 환관 학원에서 갇혀 살게 될 것이며, 지금 자리에서 더 나아가 동창을 장악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게 된다.

이문회가 즉시 웃음을 거두며 말했다.

“어찌 왕 공은 이 조건을 미리 말해주지 않고 하필 지금에서야 말씀하시는 겁니까? 당장 내일이 바로 저희가 남해 도장으로 떠나야 하는 날인데요.”

왕굉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목숨 걸고 달려오느라 그나마 오늘 밤에라도 알게 된 것이 아닌가?”

아무리 바보라도 왕굉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을 것이다. 저들이 지금에서야 이 조건을 제시한 것은 미리 계획된 것이며, 이문회를 벼랑 끝으로 내몰 의도이지 않겠는가.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내일 당장 출발해야 하니, 지금 와서 대체할 인원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이문회는 내키지 않겠지만 그래도 조건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자신의 앞날을 포기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문회는 생사의 갈림길에 선 것이다.

이번 대회에서 지고 동창 대도독의 자리도 포기하든지, 두변을 깔끔히 포기하고 당엄을 제대로 밀어주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현재 상황으로 보자면 당엄이 두변보다 훨씬 뛰어나고 이름도 널리 알려져 있는 데다, 두변은 이제 막 존재감을 알리는 시점이라 앞으로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을 쏟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잘 성장한다는 보장도 없으니, 조금이라도 계산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망설임 없이 왕굉의 조건에 응할 것이다.

게다가 당엄을 의자로 삼으면 이문회의 앞길도 탄탄대로가 되니 이문회에게도 큰 도움이 되어 서로 상부상조할 수 있지 않겠는가. 반대로 두변은 적어도 향후 몇 년간 이문회의 보호가 필요하므로 당장 그에게 뭔가를 바라긴 힘들었다.

두변을 선택한다면 이문회는 향후 몇 년간은 두변을 키우기 위해 다른 것들을 포기하고 오롯이 그에게만 집중해야 할 것인데…….

왕굉이 말했다.

“문회, 별로 어려운 문제도 아닌데 뭘 그렇게 오래 생각하나?”

확실히 다른 사람들에게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매우 간단한 문제였다. 하지만 이문회는 고개를 들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그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왕굉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이문회를 쳐다보며 놀라 소리쳤다.

“문회, 제정신인가? 이 조건을 거절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게야?”

“제가 거절하면 이번 대회에서 질 뿐만 아니라 동창에서의 일도 완전히 물 건너간다고 봐야겠죠.”

“그걸 아는데도?”

“아시다시피 제가 고집이 세서 타협할 줄을 모릅니다.”

“그렇게 아집을 부리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 줄 모르나? 정치는 타협과 거래가 생명이야.”

“어떤 일들은 그 어떤 타협도, 거래도 불가능합니다. 만약 오늘 제가 이 자리에서 타협을 한다면, 훗날 제가 동창 대도독의 자리에 앉았을 때도 문관 집단과 타협을 해야 한다는 뜻 아닙니까? 그리고 무장 집단과도 타협을 해야겠지요. 그리고 어쩌면, 제국의 이익을 해칠 수도 있는 거래를 해야 한다는 뜻이지 않겠습니까?”

왕굉은 멍하니 두변을 바라보더니 날카롭게 웃었다.

“자네는 엄당일 뿐 명예를 쫓는 학자가 아닐세. 엄당에게 그런 기개는 사치거든. 아랫도리도 없으면서 그런 기개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아랫도리가 잘려 나갔기에 살길이 막막해지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기개조차 잘려나간 자들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기개가 없는 엄당은 몇 번을 환생해도 노비나 남들의 앞잡이 노릇이나 할 뿐입니다. 그런 자들이 어찌 제국의 강력한 힘이 될 수 있겠습니까? 긴 얘기가 필요 없을 거 같습니다. 차나 드시지요!”

이문회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는 긴말하지 않고 차를 대접한 후 왕굉을 배웅하려 했다.

왕굉이 크게 웃음을 터트린 뒤, 싸늘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좋네. 방금의 대화는 윗분들께 그대로 전해주도록 하지. 자넨 앞으로 평생 황릉이나 지키며 그곳 혼귀들과 고독함을 나누게나.”

이문회는 더 말하기 싫다는 듯 눈을 감았다.

왕굉이 떠나자, 표정이 굳어 있던 이문회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의자에 지친 몸을 맡겼다.

이위가 곧바로 들어왔으나 혼신의 힘을 다 쓴 듯한 이문회를 보고 말문이 턱 막혔다.

이문회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 사람들은 엄당에 뚝심과 기개가 없다면 누구의 인정도 받지 못한다는 걸 왜 모를까 싶다. 거세당한 가엾은 우리가 존엄을 지키고, 누군가의 존경을 받으려면 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걸 왜 모르냔 말이다.”

“모든 사람이 다 산장처럼 원대한 뜻을 지닌 건 아닙니다.”

이문회는 속이 시커멓고, 기개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엄당 내부 사람들에게 종종 실망하곤 했다.

이문회가 웃으며 말했다.

“두변이 3대 학부 대회에 참가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이참에 가서 구경 좀 해보라고 하지.”

“설마, 이대로 포기하시려는 겁니까?”

“뜻대로 풀리는 게 하나도 없군. 하지만 내가 내린 결정이니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두변이 천재이긴 하지만 아직 너무 여립니다. 아직은 산장 대인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내가 자리에 있는 반년 동안이라도 전력을 다해 두변을 키워 동창에 들여보내야겠다. 그런 다음 이옥당(李玉唐)에게 두변을 의자로 삼아달라고 하고, 다 같이 협심하여 이옥당이 무탈하게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보좌하는 방법밖에.”

이옥당은 운남성의 어마사 만호로, 경성의 어마감(禦馬監) 소속이었다.

동창이 엄당의 가장 막강한 세력이라면, 어마감은 그 두 번째였다. 하지만 어마감이 장악하고 있는 금군(禁軍) 몇만 명은 황제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이를 관리하는 대환관은 사실상 병권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옥당은 이문회와 같은 파벌에 속하며 같은 의부를 모셨다. 이옥당도 대의를 위해 힘썼지만, 속이 좁은 면이 있어서 이문회와의 경쟁에서 밀린 뒤 화를 내며 동창을 떠나 어마사로 갔었다.

만약 이문회가 무너진다면 파벌은 이옥당을 지지해줄 수밖에 없겠지만, 그의 성격적 결함 때문에 양주의 장약죽 등의 인물과 경쟁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이위가 웃으며 말했다.

“산장께서 이토록 아끼시는 걸 보니, 두변은 참 복이 많은 놈입니다.”

“내가 얼마나 인재를 갈구해왔는지, 그리고 엄당에서 유능한 수장이 나와 기울어져 가는 제국을 바로잡기를 얼마나 바라왔는지 자네는 모를 거네. 최근 몇 년 동안 북쪽에서의 전쟁은 연패를 거듭하고 있고 남쪽의 안남 왕국은 내전을 치르고 있는데도 우리는 도움이 될 만한 군대를 파견해주지도 못하고 있지. 심지어 진남공은 의자와 의녀를 시켜 불법적인 방법으로 군량미를 마련하고 있어.”

이문회는 말을 하다 화가 치밀어 올라 잔을 바닥에 세게 내팽개쳤다.

“그런데 우리는? 문관 집단과 무장 집단은 서로 당쟁밖에 모르고 제국의 기반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지. 권력을 앞세워 이익을 취하려는 우리 엄당도 다를 게 없어. 대녕 제국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이위는 문관 집단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북방의 변군(邊軍)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장군들이 모두 악착같이 돈을 긁어모아 사병(私兵)을 양성했으나, 제국의 군대는 봉록의 절반도 제때 받지 못한 채로 제국을 위해 소처럼 열심히 일해야 했다.

이뿐 아니라 무장 집단들은 군부의 세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면서 황제조차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거대한 이익집단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화풀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짓이긴 했다.

홧김에 잔을 집어 던졌던 이문회는 웅크려 앉아서 바닥 위의 깨진 잔 조각들을 하나하나 주웠다.

“은자 1냥이나 하는 좋은 잔을 내가 못 쓰게 만들었구나.”

이문회는 이렇게 자조한 후 고개를 들어 말했다.

“가서 두변이 돌아왔는지 확인해 봐라.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면 두변의 집으로 찾아가 남해 도장으로 같이 가서 3대 학부 대회에 참가해야 하니 내일 아침 일찍 학원으로 오라고 일러주거라.”

“알겠습니다.”

이위가 답했다.

이문회는 두변에게 시야를 넓힐 좋은 경험을 쌓게 해주고 싶어했을 뿐, 이번 대회는 완전히 포기했다. 그리고 그는 경성에서 곧 보내올, 자신을 질책할 공문을 기다리기로 했다.

큰 변수가 없는 한, 대회에서 지게 될 테니 대회가 끝나는 대로 동창 만호라는 직위가 해제될 것이며, 아무런 권력과 권세도 없는 학원의 산장 직위만 남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문회는 절대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허리가 뻣뻣해서 몸을 구부릴 수 없고, 목이 뻣뻣해서 고개를 숙일 수 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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