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장: 비장의 무기
드디어 오늘의 결승전이 시작됐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두변이 결승전에 진출해서는 국수인 장혁기 앞에 앉아 있었다.
모든 사람이 숨을 죽이고 대국을 지켜보는 가운데, 역시나 둘은 우열을 가리기 힘든 대국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예상치 못한 장면이 다시 한번 펼쳐졌다.
두변은 지금껏 그래왔듯이 별로 생각하지도 않고 초 단위 바둑을 두었고, 장혁기도 이에 흔들리지 않고 차근차근 대국을 풀어나갔으나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 다섯 시간이 지나자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두변은 계속해서 고민의 흔적도 없이 빠르게 바둑을 두고 있었지만, 대국은 점차 장혁기에게 불리하게 흘러갔고, 구양담과 축무애는 등골이 싸늘해지면서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오늘의 대국도 어젯밤의 예행 연습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예상대로 흘러갔다.
여섯 시간이 흘렀다.
장혁기는 손에 들고 있는 바둑알을 쉽게 내려놓지 못했다. 하지만 몇 수 앞을 내다본 결과, 더는 승산이 없었다.
“내가 졌습니다.”
장혁기가 한숨을 내쉬고는 바둑알에서 손을 떼며 패배를 인정했다.
고요했던 현장이 갑자기 시끌벅적해지더니 사람들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들을 지었다.
수년간 불패를 지켜왔던 기왕이 드디어 패배를 했으니, 실로 위대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조금은 진지해야 정상이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두변의 모습을 보니 사람들도 엄숙한 분위기를 만들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뒤이어진 장혁기의 행동은 두변의 예상 밖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두변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두 형, 제게 패배를 가르쳐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대국에서 쾌감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두변은 즉시 거만한 자세를 거두며 마찬가지로 장혁기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장 형.”
3대 학부 대회의 두 번째 날이 이렇게 끝났다.
두변은 환관 학원을 대표해서 또 한 번의 큰 승리를 얻어냈다.
아직 시합이 끝난 것도 아니지만, 학원의 무사들이 두변을 들어 올리더니 헹가래를 치기 시작했다.
기분 정말 끝내주는구나!
여기에 온 무사들은 매번 참가자들을 3대 학부 대회까지 호위를 해왔지만, 그때마다 졌기 때문에 사람들의 조롱으로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비록 최후의 승리까지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았지만 기를 펴기에는 충분한 결과였다.
남해 도장의 밀실 내부.
축무애와 구양담 외에도 밀실 내부에는 다른 두 명의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관서 순무 낙문과 전 태자 소부 계동앙이었다.
구양담이 단호하게 말했다.
“내일 어떤 일이 있어도 두변이 이겨서는 안 되네. 이문회의 진급을 막는 게 우리 두 당파의 공동목표가 아닌가.
두 대인은 덕망이 높고 명예를 목숨보다 중시하시는 분들이니 내일 있을 서예 경연에서 공정하게 심사하시겠죠. 하지만 개인의 명예보다 당파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만약 장야죽이 동창으로 들어가 엄당을 집권한다면 양쪽이 의기투합할 수 있을 것이고 공동의 이익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냉철한 살인귀 이문회가 그 자리에 오르면 우리들의 앞날은 그야말로 끝입니다. 이문회는 폐하에 절대복종하는 맹견으로, 냉혹하고 무정하기에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아이고,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낙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지 않는 게 좋았을 것을. 보아하니 말년에 명예를 잃게 생겼군요.”
전 태자 소부 계동앙의 말에 구양담이 말했다.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최부는 서예와 국화에 매우 뛰어나기도 하고, 두변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전 과목에 천재일 수는 없겠죠. 금 연주와 바둑 실력이 뛰어날지라도 서예와 회화에서까지 뛰어나기란 정말 힘들지 않겠습니까.”
“비록 조카 최부의 승리가 확실하지만 만전을 기해야 하니, 두 대인에게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축무애의 말이 끝나고 그와 구양담이 같이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좋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습니다. 내일 두변은 절대 이길 수 없을 겁니다.”
계동앙이 대답했다.
같은 시각, 이문회도 장양명과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아무런 기대도 하고 있지 않다가 승리가 눈앞에 점점 다가오자 이문회는 이미 놀라움을 지나 긴장한 상태였다. 이길 가능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던 승부지만, 막상 승리가 코앞에 다가왔으니 어찌 긴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양명이 화를 내며 말했다.
“나는 두변에게 매우 불만이 많네. 바둑 실력이 그렇게 뛰어나면서 어째서 어제 나와 대국할 때 거짓으로 져준 게지? 내 인간 됨됨이를 못 믿는다는 뜻인가?”
이문회가 급히 허리를 숙였다.
“두변이 아직 어려서 그러니 양명 공께서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물론 두변의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래도 내일 심사는 공정하게 할 것이네. 만에 하나 누가 사사로이 이익을 취하기 위해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자가 있으면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야.”
이문회가 다시 허리 숙여 절했다.
“감사합니다. 양명 공.”
이때 두변은 축하를 즐길 시간도 없이 얼른 잠자리에 들어 꿈의 세계로 들어갔다.
두변의 서예 실력은 광서의 제일가는 인재 최부보다 못할 게 당연하니, 내일 있을 서예 경연은 이기기 매우 힘들어 보였다.
그래서 두변이 이기려면 반드시 <광릉산>이 천 년의 시간을 깨고 세상에 나온 절세의 명작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어 그의 서예 실력이 최부보다 떨어진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 작품으로 승부를 봐야 했다.
그럼 중국의 몇천 년의 문화 속에서 어떤 서예 작품이 가장 큰 충격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어떤 작품이 세계 제일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을까?
물론,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집서(蘭亭集序)>가 바로 그것으로, 이 작품은 서예계에서 완전히 핵폭탄급으로 숭배를 받는 엄청난 작품이다.
지금 이 세계에는 진(晉)나라가 없으니 왕희지도 없고, 당연히 <난정집서>도 없다. 그러니 두변은 이 서예 작품을 그대로 옮겨 적기만 하면 된다. 작품의 강렬함이 <광릉산>보다 훨씬 뛰어나기 때문에, 누군가 <난정집서>를 부정하면 그 사람은 즉시 문인 집단에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서예 경연이 어렵긴 해도 그래서 가장 안정적인 종목이기도 했다.
두변은 <난정집서>를 미친 듯이 모사하면 되는 것이다. 열 배 뇌 사용량을 활용해 천 번, 만 번을 모사하고 결국 원본과 똑같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비슷하게 쓸 수 있게 되면, 승리는 두변의 것이 된다.
게다가 이번 서예 경연에서 이기면 마지막 날에 있을, 두변이 가장 취약한 회화 시합은 할 필요도 없게 된다.
회화 시합에서는 정판교(鄭板橋: 청나라의 유명 화가이자 서예가)의 ‘송죽(松竹)’이든 제백석(齊白石: 중국 근대의 유명 화가. 새우 그림의 대가)의 새우든 모두 승리를 장담하긴 어려웠다.
중국 고대 역사에서 회화 작품 중 가장 영향력이 있는 작품은 바로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북송의 한림학사 장택단이 그린 그림. 청명절의 도성 내외의 번화한 정경을 사실적이면서도 정교하게 묘사함)>이지만 이 작품은 너무 어려웠기에 하룻밤 만에 서예처럼 비슷하게 모사해 내기란 불가능했다.
그리고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이 있으니, 바로 두변이 이 그림을 모사해낸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청명상하도>는 송나라 때의 변량(汴梁)이 배경인데, 변량은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실존하지 않는 것을 그린다면 그 효과는 반감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내일 서예 경연에서 반드시 이겨야 했고, 이 <난정집서>는 현장을 압도하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꿈속에서 <난정집서>의 진품이 나타나면서 흰옷의 노인도 같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뜻밖에도 노인의 외관은 왕희지로 변한 것처럼 보였다.
꿈의 세계에서 두변은 흰옷을 입은 노인의 지도를 받으며 한 번, 또 한 번 <난정집서>를 모사하기 시작했다.
열 번, 백 번, 이백 번…….
두변은 연습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비슷하게 모사하는 건 쉽지만 미세한 차이까지 잡아내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난정집서>의 외관은 그대로 모사할 만했으나, 그의 정신까지 담아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두변도 꿈속 세계에서 뇌의 사용량이 열 배나 증가하고 흰옷 노인이 왕희지로 빙의해 직접 지도해 주었기에 모사라는 게 가능했지, 일반인이라면 아마 엄두도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매번 설명을 들을 때마다 두변은 많은 깨달음을 얻으면서, 다시 모사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꿈속 세계에서 시간은 그렇게 흐르고 또 흘러갔다.
두변은 오백 번, 팔백 번, 천 번을 모사했다.
두변은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가 모사한 <난정집서>는 점점 더 원본과 비슷해졌다.
95%, 96%…….
결국 99%!
“이만하면 됐다. 원본과 직접 비교하지 않는다면 네가 모사한 <난정집서>는 그 어떤 결함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넌 어떤 상대도 이길 수 있다.”
흰옷 노인은 이렇게 말하고는 바로 사라져 버렸다.
흰옷의 노인은 떠났지만 두변은 여전히 꿈속 세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 이유는 <난정집서>에 조금 수정해야 할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영화 9년, 계축년 음력’을 이 세계의 연호와 시간으로 바꿔야 했고,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일부 수정해야 했다. 하지만 연호와 등장인물 정도만 수정하면 되는 거라서 그렇게 많은 수정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처음부터 내용을 수정하지 않은 이유는 글자 하나하나의 운치와 맛을 음미하기 위함이었고, 그래야만 차후에 내용을 수정하더라도 작품의 느낌을 그대로 옮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만일에 대비하기 위해 두변은 꿈의 세계에서 다른 사람들의 작품도 모사했다. 이를테면, 두변이 가장 좋아하는 미불(米芾: 중국 북송 때의 화가 및 서예가), 장욱(張旭: 당나라 때의 서예가. 서법書法의 선구자. 초서草書에 뛰어나, 초성草聖이라 부른다.)의 광초(狂草: 왕희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아, 옛사람들은 그의 초서를 광초라 불렀다.), 그리고 홍일대사(弘一大師)의 위비(魏碑)까지.
물론 대충 느낌만 잡아 모사한 거라 <난정집서> 모사 수준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으나, 그래도 두변이 꿈에 세계에서 활용가는 뇌 사용량은 현실의 열 배였기 때문에 이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는 것도 매우 빠를 수밖에 없었다. 다만 문제는 그 정신까지는 아직 멀었다는 점이리라.
두변은 꿈의 세계에 빠져 있다가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떠 보니 이미 날이 밝아있었다.
“소주인, 이제 일어나십시오. 경연 시작까지 반 시진도 남지 않았습니다.”
밖에 있던 환관이 조급해하면서도 공손하게 말했다.
이문회가 직접 사람을 시켜 두변을 깨웠다는 것은 시간이 촉박하다는 의미이리라. 문밖에 이문회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한 두변은 다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두변은 곧 세수를 하고 이문회와 같이 아침을 먹었다.
“준비는 잘 되었느냐?”
“십중팔구는 확실합니다.”
이 말을 들은 이문회는 흡족해했다.
3일 차 서예 경연, 시작!
여전히 두 학원 모두 각각 다섯 명의 대표가 출전하고 환관 학원만 두변 혼자 출전했기 때문에 총 열한 명이 서예 경연을 벌이게 되었다.
열한 명이 각각 열한 개 책상 앞에 다가가 섰다. 각각의 책상 위에는 최고급 문방사보가 구비되어 있고, 옆에는 먹을 가는 환관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거의 모든 이의 시선은 앞선 두 경기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이며 순식간에 승리를 거머쥔 두변에게로 향했다.
오늘도 두변이 기적을 만들 수 있을까? 최부는 서예와 회화에 조예가 깊고 그 실력은 영우가 금을 연주하는 수준과 비슷한데, 두변이 광서 제일 인재인 최부를 이길 수 있을까?
환관이 두변을 위해 이미 먹을 다 갈아놓고 뒤로 물러서자, 붓을 든 두변은 눈을 감으며 꿈속 세계에서의 감각을 되새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실의 모든 것을 뒤로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다시 한 번 무아지경에 빠져든 두변의 눈에는 오직 손에 든 붓만 보였다.
두변은 먹을 가득 머금은 붓을 바로 휘두르면서 천고 제일의 서예인 <난정집서>를 선지(宣紙)에 써 내려갔다.
두변이 고작 몇 글자를 써 내려갔을 뿐인데 이를 지켜보던 장양명과 다른 인물들이 거의 숨을 헐떡거리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구양담과 축무애의 안색도 창백하게 변해서는 서로를 쳐다봤다.
전 태자 소부 계동앙과 광서 순무 낙문은 고통스럽다는 듯이 두 눈을 감았다. 그들 모두 서예에 능통했기 때문에 두변이 쓰고 있는 <난정집서>가 얼마나 대단한 작품인지 단번에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천고의 명편(名篇)이며 천 년에 한 번 나올 법한 걸작으로, 이 서예 작품은 이틀 전의 <광릉산>보다 더 파격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