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장: 대놓고 망신을 당하다.
맨 처음 모사한 것은 미불의 <죽전괴후첩(竹前槐後帖)>이었다.
미불이 누구인고 하면, 그는 중국 역사상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서예가이며 두변이 왕희지보다 더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미불의 작품을 다 쓴 두변은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다른 책상 위에 놓인 선지에 남북조 시기에 비석에 세기던 위비(魏碑) 서체의 글을 써 내려갔다.
술을 다시 한 모금 들이킨 두변은 다른 책상에 가서 세 번째 작품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먹을 흩뿌리듯이 거침없이 붓을 휘두르며 쓰기 시작했다. 이번에 두변이 모사한 작품은 장욱의 광초 작품인 <보허사(步虛詞)>였다.
두변이 장욱 광초의 서예를 그대로 모사하니, 현장의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장욱의 광초는 엄청난 힘을 가진 작품으로, 두변은 일부러 이 세계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한무제와 왕모(王母)의 고사와 제나라 경공(景公)의 고사가 포함된 <보허사>를 고른 것이다.
두변은 어제 꿈속 세계에서 <난정집서>를 배웠음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 다른 서예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했었다.
두변은 연습을 통해 장욱의 광초 등을 8할 정도는 모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단독으로 내놓았을 때 걸작이란 칭호를 받기에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난정집서>를 선보인 후에 이 작품들을 내놓는다면, 더욱이 순식간에 이 작품들을 써내려 나간다면 그 충격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광초의 <보허사>를 완성한 후 두변은 마지막으로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푸!”
두변은 <보허사>가 쓰인 종이 위로 술을 내뿜으면서, 취한 척 제멋대로 말을 내뱉었다.
“낙 순무, 이 정도면 내 <난정집서>가 모사품이 아니라는 걸 인정할 수 있습니까?”
이 광경을 본 현장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두변은 기풍이 서로 다른 네 작품을 선보였음에도 각 작품에 자기 자신의 정신을 담아냈다. 게다가 네 작품의 수준은 제각각이었으나 각자 독특한 기풍을 지니고 있었다.
만약 <난정집서>가 우연히 발견한 서첩(書帖)이라면, 나머지 세 작품도 우연히 발견했고 그걸 모사한 것이란 말인가?
두변이 제멋대로 써 내려간 작품들 모두가 하나같이 걸작인데, 한 번에 이렇게 많은 작품을 발견한다는 우연이 있을까?
두변이 이렇게 쉽게 발견하는 것을 왜 다른 사람들은 발견하지 못한 것인가?
더욱이 대대로 전해 내려왔던 작품이라면 어찌 한 폭만 존재할 수 있으며, 몇백 년간 회자되었을 작품인데도 자신들은 왜 한 번도 보지 못할 수가 있단 말인가?
결국 이러한 이유를 종합해보면, 두변은 천재라는 결론을 얻을 뿐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기풍을 찾기 위해 거듭해서 다양한 종류의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증거일 뿐이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난정집서>의 기풍을 선택했고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더 정교하게 다듬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두변의 서예 실력이 조금은 부족하더라도, 재능에서나 작품에 있어서나 두말할 필요 없이 최부를 큰 차이로 압도한 것이 틀림없었다.
두변은 술기운을 빌린 척 계속 큰소리로 외쳤다.
“순무 대인, 이 정도면 인정해주시겠습니까? 아직 부족하다면 더 보여드리지요!”
장양명은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그만하면 됐다. 이 일은 더 논할 필요도 없겠군. 점수를 매기도록 하지. 낙 순무부터 먼저 시작하시게.”
공개적으로 두변에게 개망신을 당한 낙문이 지금 느꼈을 분노는 어떤 말로도 형용하기 어려웠다.
낙문은 오늘 일어난 일들이 광서 전역, 심지어 남방 전체에 퍼져나가서 평생 짊어져야 할 오점으로 남게 될 것임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기품이 넘치던 봉강 대리가 환관에게 학문으로 창피를 당하다니!
두변은 뒷배가 있다는 게 얼마나 짜릿한 일인지, 다시 한 번 통쾌해했다.
크으, 속 시원해 죽겠다!
만약 다른 사람이 순무 대인을 망신 주려고 했다면, 바로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변의 뒤에는 이문회가 있고 엄당이 있기에, 낙문이 순무라고 하더라도 두변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낙문이 말했다.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새파랗게 어린 두변이 이런 걸작들을 써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최부의 작품과 비교해 봤을 때도 최부의 작품이 더 정교하며 깊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두변의 <난정집서>에는 93점을, 최부의 <무산첩(巫山帖)>에는 97점을 주겠습니다.”
이미 망신이란 망신을 다 당한 낙문은 이렇게 된 김에 공개적으로 두변의 작품을 폄훼하기 시작했다.
점수를 들은 관중들은 낙문을 향해 한바탕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눈만 멀지 않았다면 누구든 정확히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돌아가는 상황은 매우 명확했다. 작품으로만 보면 새로운 기풍을 만들어낸 두변의 작품이 훨씬 뛰어났음에도, 최부는 선현들의 작품을 잘 배우고 모방했다는 이유로 두변과의 점수 차이를 벌린 것이다.
광서 순무 낙문은 자신의 기준으로 점수를 매기며 공개적으로 최부를 감쌌다.
다음 차례는 전 태자 소부 계동앙.
그는 어렵사리 은퇴까지 잘 버텨와 놓고 마지막에 이렇게 자신의 절개를 저버릴 상황에 처하게 되자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을 크게 후회했다.
하지만 당리당락을 최우선으로 하는 계동앙도 최부를 감쌀 수밖에 없었다. 계동앙은 태자 소부를 지냈고, 심지어 잠시 내각에 입정한 적도 있었지만, 실권을 잡았던 적은 없었다. 그에게 권력은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기에, 태자 소부로서 은퇴하기 전에 많은 이득을 챙기려고 했을 뿐이었다.
자신의 노년은 물론 가족과 일족 모두 문관 집단의 보살핌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에 계동앙도 정색하며 말했다.
“노부는 매우 깨끗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당파나 기풍에 상관없이 오로지 서예에 대한 조예가 얼마나 깊은가만을 봤습니다. 노부가 보기에 최부의 서예에 대한 조예가 두변보다 더 깊었기에 최부에게 97점, 그리고 두변에게 93점을 주겠습니다.”
광서 순무 낙문과 같은 점수였다.
순식간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명성이 높던 계동앙이 이렇게 편협되고 진실을 외면하며 흑백을 전도하는 헛소리를 해대고 있구나!
다음은 봉오후 유무환의 차례.
“이문회 대인, 7년 전 광서의 동창 만호소에서 내 아들을 잡아가고 내게 은자 이만 냥을 갈취해 가서 그 돈으로 동창의 주머니를 두둑이 채운 적이 있지. 그래서 난 엄당에 좋은 감정이 전혀 없소이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문관 집단, 무장 집단과 모두 사돈 관계를 맺어서 한 가족이나 다름없지.”
이 말을 듣자 현장에 있는 수많은 사람의 안색이 변했다.
유무환은 말을 이었다.
“난 부귀를 누리는 한량이라오. 조상의 비호에 의지해서 호화롭고 부귀한 생활을 하고 있소. 덕분에 매일같이 취생몽사하지만 조그마한 권력이라곤 반푼도 없으니 다들 나를 대단하게 여기지도 않더군. 하지만 본후는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말할 수 있소. 누군가는 지금 본질을 호도하고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을 거요. 최부 90점, 두변 99점 이게 내 점수요. 만점을 주지 못한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마당신이 자만하는 걸 보기 싫어서인 거 같소이다.”
유무환이 점수를 공개하자 축무애와 구양담의 얼굴빛이 그 어느 때보다 굳어졌다.
어제 배후 세력들이 계동앙과 낙문 이 둘만을 찾아가 말을 맞추었지만 유무환에게는 가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유무환과 문관 집단, 무장 집단은 모두 사돈 관계이며, 엄당과는 원수지간이니 굳이 두변의 편을 들 것이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유무환은 구양담과 축무애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부류라서 자기 의견을 강력하게 피력하리라고도 생각지 못했다. 그런 자가 오늘 갑자기 이리 배반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장양명이 점수를 매길 차례가 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심사가 내게는 마지막이 되겠지. 앞으로 나는 은둔자의 삶을 살 테니, 무슨 일이 있어도 이제 다시 나를 찾아오지 않기 바라네. 다들 내가 위패나 되어서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았으면 하니, 그에 응해야지. 하지만 오늘은 이 말을 마쳐야겠군. 나는 봉오후와 마찬가지로 이번 서예 경연에서 최부에게 90점, 그리고 두변에게 99점을 주겠네.”
구양담, 축무애, 낙문, 계동앙의 얼굴이 순식간에 파랗게 질렸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 3일 차 서예 경연 대회는 이대로 끝났으며, 두변의 우승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게다가 그들도 자신들이 먼저 규칙을 깼기 때문에 유무환과 장양명을 원망할 수도 없었고, 모두가 지켜보는 상황에서 이 둘을 비난할 수도 없었다.
“3대 학부 대회의 3일차 경연에서 환관 학원의 두변이 우승했음을 선포합니다!”
“만세!”
현장에 있던 대부분의 엄당 일원들은 목청을 높여 소리 질렀다.
대회에는 총 네 종목의 경연이 있는데 두변이 일당백의 실력으로 세 경기를 연달아 이겼기 때문에 마지막 경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4판에서 3승을 먼저 거뒀으니 상대방이 누구더라도 이 국면을 절대 반전시킬 수가 없었다.
환관 학원에서 미리 승리를 자축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장양명이 말했다.
“이어서 회화 경연을 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보기엔 불필요해 보이는데? 만약 시합에 참여할 생각이 없다면 환관 학원이 이번 3대 학부 대회에서 최종 승리를 거뒀다고 선언하겠네.”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이문회 대인께서 받아들일지는 모르지만 제가 제안 하나 하고 싶습니다.”
구양담이 몸을 일으키며 이문회에게 말했다.
“들어보지요.”
“제 생각에 3대 학부 대회는 이번을 마지막으로 더 개최되긴 힘들어 보입니다.”
문관과 무장 집단이 이미 큰 망신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시합에서도 졌고 공정성 또한 의심을 받고 있으니, 이제 대회 시합을 개최할 이유가 사라졌고 계속 유지되기도 힘들어 보였다.
이강 서원 산장 구양담이 말을 이었다.
“4판 3승제가 아니라, 차라리 점수로 총 순위를 매깁시다. 각자 네 번의 시합에서 얻은 최고점수를 합해서 최고 득점을 기록한 쪽이 우승을 하는 겁니다.”
옆에서 있고만 있던 사람들도 듣기 거북해지기 시작했다.
4판 3승의 규칙을 바꿔 점수제로 하자니 정말 염치없는 제안이 아닌가. 이렇게 되면 두변이 앞선 세 경기를 모두 이겼다 하더라도 마지막 회화 경연에서 낮은 점수를 받게 된다면 최종적으로 꼴찌를 기록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이문회가 말했다.
“어제 바둑의 경우 승패만 있을 뿐인데 어떻게 점수를 매기려는 겁니까?”
“그건 네 분의 심사위원들께 맡기면 됩니다.”
장양명 등 네 명의 심사위원들은 심사숙고 끝에 어제 바둑 경기에 대한 점수를 매겼다.
환관 학원의 두변은 98점, 남해 도장의 장혁기는 95점, 이강 서원의 영우는 88점. 장혁기가 지기는 했지만 두변과의 실력 차가 매우 적었기 때문에 비교적 공정하다고 판단되는 점수였다.
오늘 남해 도장을 대표해 서예 경연에 참석한 소별리의 점수는 90점이었다. 소별리의 잠재력도 엄청났기 때문에 어느 시대에서나 빛을 발했을 테지만 두변의 걸작인 <난정집서>를 상대했기 때문에 그의 <검첩(劍帖)>은 병풍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점수를 종합해 보니 환관 학원의 두변은 세 경기에서 획득한 점수가 각각 99.13점, 98점, 96점으로 총점이 293.13이었고, 문관 집단의 이강 서원 점수는 각각 99점, 98점, 93.5점으로 총점이 280.5점, 무장 집단의 남해 도장 점수는 각각 94.5점, 95점, 90점으로 총점이 279.5점이었다.
누계점수 방식에 따르면 환관 학원의 두변은 2등과 13점 정도의 차이를 벌리고 있지만, 이 13점은 내일 있을 회화 경연에서 좁혀질 여지가 충분한 숫자였다. 그렇게 되면 두변은 승리는커녕 패배를 맛보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러니 환관 학원에서 이러한 조건을 순순히 들어줄 리가 있겠는가.
구양담이 말했다.
“누계점수 방식을 채택하게 된다면 내일 회화 경연은 계속 진행할 겁니다. 만약 환관 학원이 이기게 된다면 학전 1,500묘뿐만 아니라 원래 환관 학원의 학전이었던 6,000묘도 전부 반환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조건을 내걸었으니 이문회는 놀랐고 장내도 술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