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장: 체면을 잃은 진무사
줄곧 자신에게 공손하게 대해오던 이문회가 갑자기 반기를 든다는 사실에 더욱 화가 난 왕인은 결국 자신이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내던지려 했다.
하지만 찻잔을 막 내던지려는 순간, 그는 재빨리 다시 손을 거두었다.
이문회는 감히 태도를 바꾸었지만, 정작 왕인 본인이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전까지 왕인이 막강한 위세를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이문회가 자신에게 존경을 표하며 자기 본분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모두 알다시피 광서 동창 진무사 자리는 이문회를 위해 준비된 자리였고, 왕인은 그저 이문회의 시기가 될 때까지 이 자리에서 몇 년 더 버티는 꼭두각시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이번 3대 학부 대회에서 이문회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엄당의 존엄을 세우고 많은 이익을 가져왔다.
표면적으로는 왕인이 광서 엄당의 최고 수령이지만 실세는 이문회였고, 동창의 천호나 무사들도 강단이 있는 이문회의 지휘에만 복종했다. 이문회는 집단 간의 기 싸움을 차치하고 대의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칼을 뽑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일단 서로 반목하게 되면 수습하기 어려워지는 쪽은 이문회가 아니라 왕인이었다.
왕인이 무엇보다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매와 이리처럼 살기를 가득 품고 자신을 쳐다보는 이문회의 눈빛이었다. 이문회가 끝장을 보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면 상대방을 완전히 파멸시켜 죽여버린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당당한 동창 진무사이자 광서 동창의 제일 장관인 왕인도 그가 무서웠다.
왕인은 최근 몇 년 동안 최소 은자 몇십만 냥을 횡령해 사리사욕을 채웠다. 하지만 이문회는 그 누구보다 청렴하며 그의 배후에는 엄당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갖춘 계파가 버티고 있었다.
왕인이 감히 이 잔을 두변을 향해 던지는 순간, 이문회가 반드시 자신을 죽이려 들 것임을 알기에 재빨리 잔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잔을 들어 차를 마시는 시늉을 했다.
왕인은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하며 끓어오는 부아를 가라앉혔다.
두변은 마음속으로 냉소했다.
인내심이 아주 대단한데?
절대적인 실력이 없으면 허세를 부려선 안 되지!
이문회가 두변을 향해 정색하며 말했다.
“두변, 너는 염세 등과 화해하고 싶지 않은 것이냐?”
“그렇습니다, 산장.”
두변이 대답했다.
“그럼 어떻게 하고 싶으냐? 나도 일을 크게 벌이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 네가 저들로 하여금 네 발을 씻기게 하고 스스로 따귀를 때리게 할 줄은 몰랐구나. 너도 혼이 좀 나야겠다.”
“염세가 저와 졸업시험을 두고 경쟁했으면 합니다. 제가 염세를 이긴다면 과거에 저를 괴롭혔던 염세와 저 여섯 명 모두를 똥오줌 비우는 임무에 배정해주셨으면 합니다. 저들이 점수를 얼마나 받았는지와는 상관없이 말입니다. 만약 제가 염세에게 진다면 제 성적이 얼마를 받았건 상관없이 똑같이 똥오줌을 비우는 임무를 배정받겠습니다.”
이문회가 낭정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낭정은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진무사 대인과 산장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이문회가 왕인에게 절을 하며 물었다.
“진무사 대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왕인의 얼굴이 가늘게 떨리는 걸 보니 금방이라도 화를 내고 싶은 것처럼 보였으나, 그는 가까스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공정한 경쟁이라고 보이는군. 좋네.”
“그럼 그렇게 정하기로 하고, 너희들은 계약서에 서명과 날인을 하거라.”
이문회의 말에 문직 환관이 빠르게 계약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 졸업시험에서 두변이 염세보다 높은 점수를 받는다면 염세를 포함한 환관 일곱 명은 가장 낮은 임무인 똥오줌을 비우는 직책에 배정될 것이다.
반대로 염세가 높은 점수를 받는다면 두변이 이 직책에 배정된다.
두변을 포함한 여덟 명 모두가 이에 서명하고 지장을 찍었다.
이문회가 말했다.
“이렇게 마무리를 지읍시다. 결과는 다섯 달 뒤의 졸업시험에서 알 수 있겠지요.”
이미 구겨진 체면 때문에 이곳에 계속 머무르고 싶지 않았던 왕인은 굳은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먼저 들어가겠네.”
이문회와 낭정은 즉시 허리를 숙였다.
“왕 공공을 배웅하겠습니다.”
이문회는 왕인을 배웅하는 길 내내 줄곧 허리를 굽혔으니, 예의상 조금도 어긋난 점이 없고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왕인을 배웅한 뒤 이문회는 서재로 돌아왔다.
“나머지는 모두 물러가고, 두변만 남거라.”
당엄과 염세 등은 모두 물러났고 낭정도 뒤이어 나갔다. 이제 서재에는 이문회와 두변 두 사람만 남았다.
“두변, 너는 절대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구나.”
이문회가 웃으며 말하자, 두변이 대답했다.
“어설프게 괴롭히느니 강하게 억누르는 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낭정의 남은 팔도 확실하게 잘라내어 산장께 어떤 위협도 끼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문회가 웃었다.
“내가 네 도움이 필요한 것이냐? 하지만 낭정은 배후에서 사람을 괴롭히는 게 특기다. 네가 이미 낭정의 학생을 죽였고 이제는 그가 가장 아끼는 의자마저 파멸시키려 하니 낭정도 단단히 벼르고 있을 것이다.”
“산장, 낭정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 산장을 음해하는데 왜 그를 죽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이문회는 두변의 머리를 가볍게 치면서 웃어 보였다.
“나이도 어린 것이 어쩌다 이렇게 살성(殺性)을 키웠느냐?”
두변도 웃음을 지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사실 자신이 이곳에 온 이후로 이문회가 죽인 사람만 800명이 족히 넘지 않았나. 두변은 ‘산장의 살성이 더 강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두변, 이건 꼭 기억하거라. 살인은 최대한 피하는 게 좋지만 죽여야 한다면 조금도 지체하지 말아라.”
이문회가 가르치듯 말하고는 말을 이었다.
“이만 돌아가서 쉬어라. 그 숙소에는 이제 가지 말고. 모레, 대종사(大宗師) 한 분을 뵈러 가서 네게 무학을 지도해 달라고 부탁할 테니 준비하고 있어라. 그분께 배우면 분명 실력이 일취월장할 수 있을 게다.
대종사가 오만하기 그지없긴 하지만 네 재능이라면 충분히 대종사를 놀라게 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알겠습니다.”
두변은 대종사에 대한 기대를 품으며 허리 숙여 인사했다.
“운이 좋다면 거기서 많은 기회와 인연을 만날 수 있을 거다. 대종사 밑에 있는 제자들 역시 하나같이 뛰어난 재능들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두변은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이전에 상처를 치료하던 방으로 돌아갔고, 그날 밤은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을 잤다.
다음날 기운차게 일어난 두변은 책을 꺼내 복습을 시작하면서 곧 대종사를 만나 가르침을 받게 될 날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아침을 먹고 반 시진 조금 넘게 책을 보고 있는데 두충이 찾아왔다.
“소주인을 뵙습니다.”
두충이 여전히 예의를 차리며 꿇어앉았다.
두변은 얼른 두충을 일으키며 걱정스레 물었다.
“집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유모는 괜찮고?”
지난번에도 유모가 독에 중독된 일로 두충이 찾아온 적이 있었기에, 두충을 보자마자 긴장이 되긴 했다.
“아, 여랑은 아무 일 없습니다.”
두충은 복잡한 심경으로 말을 이어갔다.
“저기, 사실은 경성의 두씨 가문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그들은 소야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한번 만나보고 싶어 합니다.”
두변의 얼굴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경성의 두씨 가문은 두변을 바다 건너 무인도에 버려 이 세상에 없는 존재로 만들려 했던 가문이다. 그들은 무엇을 하러 찾아왔을까?
다시 가문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건가?
두변은 곧바로 정혼녀인 방청의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천년 역사를 지닌 호족인 방씨 가문의 적녀로, 경성의 4대 미인 중 한 명이었다.
설령 영설 공주가 다른 모든 여인의 아름다움을 퇴색시킬지라도, 방청의만은 자신의 색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을 정도로 눈부시게 빛나는 존재였다.
두변이 말했다.
“먼저 돌아가. 나도 곧 뒤따라갈 테니.”
두변은 우선 산장 이문회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가보거라. 이삼(李三), 이사(李四). 너희들도 같이 가라.”
“알겠습니다.”
이문회의 명에 동창 무사 둘이 대답했다.
이삼과 이사는 평소에 이문회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지만 존재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그가 가장 아끼는 호위무사들이었다.
두변은 이삼과 이사, 동창 무사 둘의 호위를 받으며 말을 타고 계림부에 있는 집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대문을 열자 마당에 두충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온몸이 채찍 자국이었고 얼굴도 핏자국으로 가득했다.
두변의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재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가 봤는데 역시나 유모가 무릎을 꿇고 있었고, 얼굴에는 손자국이 찍혀 있었다.
두변은 순간적으로 뜨거운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치면서 폭발할 것만 같았다.
“두변, 이 망할 놈!”
매섭게 호통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객청에 앉아 있던 사내가 손으로 탁자를 내리치면서 매섭게 소리쳤다.
“어서 무릎 꿇지 못할까!”
두변을 향해 호통치는 사내는 서른 중반쯤, 눈빛이 서리처럼 날카롭고 얼굴빛이 하얬으며, 그 옆에는 두씨 가문의 무사가 무려 여덟 명이나 서 있었다.
두변은 재빨리 원래 몸의 주인이었던 자의 기억을 더듬은 후에야 상황 파악을 할 수 있었다.
이자의 이름은 두일명(杜一鳴)으로, 경성의 두씨 가문에서 좀 복잡한 신분을 가진 인물이었다.
두일명의 부친인 두중달은 두씨 가문 노태야의 양자로 두가의 대관사였다. 지금 눈앞에 있는 두일명은 두가의 소관사로, 두변 생부의 심복의 자식이기에, 두변과 그의 형제들은 어렸을 때부터 그를 명 형이라고 불렀다.
두일명은 이에 그치지 않고 두가의 서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해 두가의 사위가 되었다. 덕분에 이 두일명은 두가에서의 지위가 상당히 높았다. 선천적인 고자인 탓에 태어나자마자 불길한 아이라는 취급을 받는 두변보다도 지위가 더 높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두변은 어려서부터 사소한 것 하나까지 두일명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다. 두일명이 소관사였기 때문에 그가 조금이라도 엄격하게 굴면 두변과 유모는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고, 그의 기분이 안 좋은 날에는 두변이 배를 곯는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두변은 어려서부터 쥐가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것처럼 두일명을 두려워했다. 두일명은 마음껏 두변을 때리고 욕을 하면서, 두변보다 더 가주(家主)와 사이가 좋은 사위이자 심복이었다.
“두변, 어서 와서 꿇으라는데, 안 들리냐?”
두일명이 두변을 보며 소리치더니, 이어서 밖을 향해 소리쳤다.
“두충, 이 개XX. 당장 내 앞으로 굴러들어와!”
두충이 즉시 무릎을 꿇은 채 기듯이 두일명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때 내가 너희들한테 뭐라고 했어? 이 재수 옴 붙은 짐승을 무인도로 보내서 살든 죽든 알아서 하게 두라고 했지! 저놈이 가문에 먹칠하지 않도록 말이야. 그런데 지금 어떻게 되었어? 이 녀석을 몰래 키워서 환관 학원에 보내더니 결국 이런 사달을 일으켜?”
두일명은 말하다 말고 스스로 분을 못 이겨 찻잔을 두충을 향해 내리쳤다.
두충은 두일명이 두려워서 차마 피하지 못하고 찻잔에 이마를 맞아 피를 흘렸다.
두일명이 두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망할 놈. 네가 남녕부에서 했던 일 때문에 아버지께서 얼마나 곤란해졌는지 아냐? 네가 벌여놓은 일 때문에 우리 가문이 얼마나 손해를 봤는지 아냐고! 네가 얼마나 대단하길래 엄당을 대표해 이강 서원과 남해 도장을 꺾어? 현재 경성에서는 우리 두씨 가문이 문관 집단을 배신하고 엄당에 붙으려 한다는 말이 나돈단 말이다. 덕분에 셋째 숙부의 순무 직위도 위태로워졌고, 우리 가문도 최소 은자 십만 냥 이상의 손실을 보았다! 이 모든 게 다 네놈이 벌인 일 때문이야, 이 죽일 놈 같으니라고!”
두변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가문에서 자신을 다시 거두어주기 위해 찾아온 줄 알았는데, 그만의 헛된 바람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그저 자신에게 죄를 묻기 위해 사람을 보냈을 뿐이다.
두변은 계림 3대 학부 대회에서 놀라운 성과를 거뒀지만, 가문의 인정을 받기는커녕 말끝마다 놈이니 짐승이니 같은 소리를 듣고 있지 않나.
이렇게 큰 성과를 거두었는데, 왜 가문에서는 자신을 다시 불러들이려는 생각을 하지 못할까? 큰 가문일수록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것이 바로 인재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