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장: 대종사와 제국의 공주
두변이 환관 학원에 돌아왔을 때 이문회는 편지 한 통을 들고 멍하니 있었다. 그는 심경이 복잡해 보였으나 무슨 일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산장, 무슨 일 있습니까? 혹시 진급에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두변이 물었다.
“아니다. 회남과 회북 쪽에 있는 우리 엄당 염전 몇 개를 문관, 무관 집단에 할양하라는구나. 매년 몇십만 냥의 수익이 나는 곳인데 말이다.”
“이유가 뭡니까?”
“영설 공주의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긴 하지.”
영설 공주의 이름을 듣자 두변의 머리 깊은 곳에 있던 기억이 슬금슬금 떠올랐다.
그녀는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공주로 무공도 상당하고 의협심이 있으며 매우 아름다운 인물이었다. 경성에서는 두변의 정혼녀인 방청의를 비롯하여 어느 여인도 영설 공주의 미모를 따라갈 수 없었다.
영설 공주는 미모도 미모였지만 더 눈에 띄는 것은 바로 그녀의 정의감과 의협심이었다.
3년 전, 동몽고의 왕자가 대녕 제국과 동맹을 체결하기 위해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대녕은 부탁하는 처지라 이 몽고 왕자의 횡포를 손 놓고 볼 수밖에 없었다. 손님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휘하에 있던 무사들은 경성에서 부녀자들을 겁탈하고 재물을 빼앗는 행위를 일삼았고, 그들의 손에 죽은 부녀자들만 자그마치 수십 명이었다.
물론 다른 대신들은 이 일을 쉬쉬하며 그저 와단 가한(汗 : 칸)과 동맹을 체결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영설 공주는 이를 반대하며 몽고 왕자와 무예를 겨루는 내기를 제안했다. 만약 그녀가 이기면 왕자가 데리고 있던 무고한 부녀자들을 풀어주는 게 그 조건이었다.
몽고 왕자는 자신의 무공이 상당한 수준이었고, 영설 공주도 탐이 났던 터라 즉시 조건에 응했다.
단지 몇 합 만에 왕자는 영설 공주에게 패배했다. 하지만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화를 못 이겨 잡아 온 부녀자들을 모두 죽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몇십 명의 고수들을 시켜 영설 공주를 포위 공격하려고 했다.
이에 분노한 영설 공주는 몽고 왕자와 몇십 명의 고수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그렇게 대녕 왕조와 동몽고의 동맹 체결은 물거품이 되었고 영설 공주는 죄인이 되었다. 황제가 그녀를 가장 총애하기는 했으나 외부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국 그녀를 외진 곳으로 보내 3년 동안 유배했다.
이 사건이 있고 나서 영설 공주는 천하 만민의 우상이 되었다.
이문회의 말을 들어보니, 마침내 영설 공주가 마침내 자유를 되찾는 모양이었다.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지. 제국의 자랑인 영설 공주가 자유의 몸이 되는 건 봉황이 다시 태어나는 정도의 대단한 일이다.”
이문회가 신중하게 말했다.
두변은 갑자기 이 대단한 공주에게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이문회는 이어서 두씨 가문의 일을 물었다.
“그래. 어찌 되었느냐? 두가 사람들과는 얘기를 잘 끝마쳤느냐?”
“그저 그랬습니다. 선의를 가지고 엄당에 들어올 것을 권유하며 거세를 해줬는데 저한테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화를 내며 떠나더군요.”
이문회가 두변의 머리를 가볍게 치며 말했다.
“냉혹하고 매정하기는.
두회, 그자는 재물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권력에 대한 욕심이 대단한 자다. 2년 전 병부 시랑을 맡기 위해 건로(建虜)와 먼저 결탁했고 그 후에는 북방 군단과 결탁하며 변관에서 일촉즉발의 긴장된 분위기를 조성한 적도 있었지. 그때 하필 운남과 광서의 토사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진남공이 반란을 평정하던 중요한 시기였는데 이때 두회가 나서서 곧 터질 것만 같았던 전쟁을 막아내는 혁혁한 공을 세워 병부 시랑으로 진급하게 되었다.”
“그런 짓을 했는데도 폐하께서는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짓을 한 게 두회 한 사람만이 아니니까. 북방 군단의 수령들, 산서성의 재력가 등등 어느 하나 몽고나 건로와 결탁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황제를 위협하는 게 문관, 무장 집단의 기본 전략이다.”
다른 지구의 역사에선 명나라 황제가 비록 문무관의 세력에 견제를 받긴 하지만 그래도 지고지상의 권력을 가진 군주이기 때문에 사람 하나 처벌하는 정도야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이곳에선 문관과 무관 집단이 힘을 합치면서 그 힘이 더욱 거대해졌기에 황제가 누군가를 처벌하기는 더욱 어려워졌고, 군주의 권력은 이미 바닥으로 떨어져 수많은 견제를 받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환관들이 공공연하게 당을 이룰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이문회가 말했다.
“두회는 간악하고 수법이 악랄하니 결코 그를 쉽게 생각해선 안 된다.”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대종사를 만나러 갈 테니, 이만 가서 준비하거라.”
다음 날 아침, 이문회는 두변과 학원을 출발해서 그 기묘하다는 대종사를 만나기 위해 오주(梧州)의 계왕부를 찾아갔다.
대종사가 계왕부에 있는 이유는 계왕이 그의 제자이기 때문이며, 이곳에서 남다른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는 이유로 계속 계왕부에서 살기를 고집해왔기 때문이다.
계왕은 조정의 번왕(藩王)으로 신분은 더할 나위 없이 높았지만, 정사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자신의 봉토를 떠나지 않았다.
두변이 물었다.
“산장, 지금 만나러 가는 대종사도 엄당입니까?”
이문회가 답했다.
“그도 한때는 환관이었지만 무공에 조예가 높아 대녕 왕조의 무도 종사가 되었고 이미 엄당의 신분을 벗어나서 종사로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문관 집단이든 무장 집단이든, 조정 대신이든 훈귀든 모두 그에게 존경을 표하지. 그는 잠시 황제의 스승으로 지냈던 기간도 있으니, 이제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감이 오느냐?”
“산장은 그분과 왕래가 있으십니까?”
“한 사흘 정도 그분께 검법을 지도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를 제자로 인정해주지 않는 걸 보니 내가 많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 말씀은 대종사가 제게 무도를 가르쳐주기로 확정된 게 아니라는 말씀이네요.”
“그분은 무도뿐만 아니라 국학, 기마술, 연단학, 산술, 이 모든 것에 능통하신 진정한 천재이시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분에게서 너를 제자로 거둬주시겠다는 확답을 받지는 못했다. 내 체면을 따로 세워주지 않는 분이시지. 하지만 나는 네가 그분의 마음을 충분히 움직일 만한 천재라고 믿고, 그분도 달갑게 너를 제자로 맞이해 주실 거라는 확신이 있다.”
“그렇게 대단하신 분입니까?”
“그분은 진정한 종사라고 할 수 있다. 무도든 연단학이든 그분의 가르침을 한 달만 받게 되면 다른 선생 밑에서 1년을 배운 학생보다 더 뛰어날 게다. 몇 년 전 나도 그분의 가르침을 사흘간 받고 나서 2품 무도를 돌파할 수 있었다.”
두변은 경악했다.
“정말 대단하신 분이군요.”
“그는 한때 황제의 스승이었을 뿐만 아니라, 영설 공주의 그 뛰어난 무공 실력도 다 그분께서 가르친 것이다.”
계림에서 오주부까지 대략 600리 정도의 거리로, 이문회와 두변은 이틀 밤낮의 여정 끝에 마침내 도착할 수 있었다.
비록 오주부가 계왕부가 주둔하고 있는 곳이지만, 계림성이나 남녕성보다는 규모가 상당히 작아서, 계림성의 2/3가 안 되는 크기였고 성 안의 인구도 20만 명 정도뿐이었다.
공교롭게도 두평아의 시댁도 이곳 오주부에서 조금 아래쪽에 위치한 몽산현에 있었다.
계왕부는 오주의 성 안이 아닌, 성 북쪽으로 3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곳이 계왕부인가?
두변은 앞에 있는 거대한 관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계왕부의 부지는 거의 천 묘에 달했고, 높은 정자와 다리 밑으로 흐르는 물 등 웅장하면서 화려한 경관을 자랑했다. 왕부의 입구에 있는 시위들은 탄탄한 갑옷에 위풍당당한 모습이었고, 주홍색 높은 담장이 왕부의 내부와 잘 어우러져 범접할 수 없는 위압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아버님!”
이문회가 말에서 내리자 어떤 이가 앞으로 달려오더니 이문회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아들 이릉이 아버지를 뵙습니다.”
이자는 이문회의 의자인 이릉으로, 계왕부의 부총관이었다.
이릉은 스물여덟의 젊은이로 눈매가 부드러우면서도 반듯해서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거나 하는 부류는 아니었다.
그는 환관답지 않게 우울한 느낌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대신 열정적이고 쾌활해 보였다. 이문회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끓어오르는 감동과 환희, 그리고 이문회에 대한 존경심이 넘쳐흘렀다.
두변과 비교해보면 이릉과 이문회가 운명적으로 더 가까운 듯 보였다.
이릉은 불운을 타고난 가엾은 아이였다. 그가 열 살이었을 때 그의 부모가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는데, 이때 이릉은 스스로 거세하고 궁에 들어가 환관이 되어 부모의 복수를 하겠노라고 다짐하게 된다.
그가 깊은 슬픔에 빠져서 비뚤어진 복수심만 가지고 잘못된 길로 가려고 했을 때 이문회를 만나게 되었고, 이문회는 그를 도와 부모의 복수를 갚게 해주었다. 그렇지만 이릉은 이미 거세를 한 상태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남자로 되돌아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문회는 이릉을 자신의 의자로 거두어들였다.
의자라고 부르긴 하지만, 사실 이릉은 이문회가 직접 데리고 키운 친아들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네 아우 두변이다.”
이문회가 보기 드물게 부드러운 눈빛으로 이릉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를 일으킨 후 두변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형님, 처음 뵙겠습니다.”
두변이 예를 갖췄다.
“아우, 반가워.”
이릉은 두변을 향해 친근하게 웃더니, 한참을 자세히 관찰한 다음 말을 이어갔다.
“아버지께서 의자를 거두었다는 말에 놀라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더군. 누군가 아버지를 옆에서 도와줄 이가 생겨서이기도 하고, 이 형이 부족하고 못나서 아버지의 뒤를 잇기에 역부족이었는데 이제 동생이 생겼으니 이 못난 형은 부담 없이 살던 대로 살아갈 수 있겠구나 싶었거든.”
상대방의 말과 안색을 보고 그 의중을 헤아리는 데 능한 두변으로서는 이릉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사실 두변도 선천적으로 친근함을 갖게 하고 호감을 자아내며 상대방이 신뢰하게 만드는 이런 부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동시에 매우 총명하며 무공에 조예도 깊은 이릉이 왜 이문회의 뒤를 잇지 못하는지 마침내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바로 그가 너무 밝고 정의로우며 상냥하기 때문이리라. 그는 선과 악이 공존하며 모진 방법과 수단을 사용하는 두변과 너무 달랐다.
이릉이 계왕부에서 부총관을 맡고 있다고 하니 보기에는 지위가 높아 많은 권력을 휘두를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상 그는 제국의 권세를 완전히 겉돌고 있었다. 계왕은 다른 번왕들이나 마찬가지로, 황실 귀족일 뿐 아무런 권력도 없었고 심지어 자신의 봉지를 떠나는 것조차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계왕부의 부총관인 이릉도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의 권력 기구와 접촉할 기회 또한 매우 적었다.
“아버지, 제가 왕야에게 아버지께서 도착했다는 사실을 고하러 가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이릉은 이문회와 두변을 재빨리 왕부로 안내하려 했다.
“괜찮다. 동창 만호의 신분으로, 아무런 임무나 목적 없이 번왕과 교류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
“알겠습니다. 왕야가 아버님을 많이 그리워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대종사께서도 두 분이 같이 검술을 배웠을 때가 가장 즐거웠던 시절이라고도 하셨고요.”
“그때는 왕야가 아직 세자였기 때문에 허물없이 지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때처럼 지내긴 힘들 것 같구나.
내가 이번에 온 것은 대종사에게 두변을 부탁하기 위해서다. 그러니 네가 대종사에게 가서 이 불초 후배 이문회가 뵙기를 청한다고 전해 드려라.”
“대종사는 왕부에 안 계시고 연화산에서 은거하고 계십니다. 대종사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신분과 지위가 점점 높아지면서 공후 가문의 세자, 왕부의 세자, 내각 대학사의 적장자 등까지 찾아오자 싫증이 나셨는지 연화산으로 들어가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