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47화 (47/648)

제47장: 제대로 된 놈은 하나도 없으면서

이 대종사의 이름은 영종오(寧宗吾)로, 경성에서 지내다가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계왕부로 피신하듯 들어오게 되었다. 대녕 왕조에서는 관리나 장성들이 번왕과 사사로이 왕래해서는 안 된다는 규율이 있었기 때문에 영종오는 계왕부 내에서는 안락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계왕부에 숨어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다시 예전처럼 끊이질 않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연화산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이문회가 말했다.

“그럼 내가 두변을 데리고 연화산으로 가야겠다. 너는 이만 들어가 보아라.”

이릉이 아쉬움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저희 셋이 같이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릉은 이문회와 오랜만에 만나는 터라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네 임무가 있을 것인데 어찌 사사로운 일 때문에 직무를 이탈하려 하느냐?”

“알겠습니다.”

이문회가 꾸짖자, 이릉은 즉시 허리를 숙이며 사죄했다.

“이렇게 하자꾸나. 계림부로 돌아가기 전에 다시 너를 찾아올 테니 그때 부자간에 같이 식사나 하자꾸나.”

“알겠습니다.”

이릉이 매우 기뻐하며 대답했다

연화산은 계왕부에서 100리나 넘게 떨어진 곳으로, 두변과 이문회는 다시 말을 타고 길을 재촉했다.

“네 형이 총명하고 무공도 뛰어나지만 마음이 너무 여려 안타까울 뿐이다. 두변, 내가 늙거든 네가 저 형을 잘 보호해주길 바란다.”

이문회가 말했다.

“친형제처럼 서로 돌봐주고 의지하는 사이가 되겠습니다.”

두변의 말에 이문회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독한 면이 있긴 하지만 가족이나 자기 사람들한테는 순수한 마음으로 대하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는 이릉과 비슷하구나. 일전에 네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유모를 구하러 갔을 때 네가 참 괜찮은 아이라고 생각했었다.”

두변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니, 저 멀리 까치발을 한 채 이문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릉의 모습이 보였다. 이릉도 뒤돌아보는 두변을 발견하고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운명이란 참으로 기묘했다. 이렇게 잠깐 사이에 그에게 형이 한 명 더 생겼다.

연화산은 높지는 않지만 충분히 외진 곳이었다. 영종오 대종사와 그의 제자들은 연화산에 있는 연화사에서 은거했다.

두변은 밖에서 기다렸고 이문회는 사찰 문 앞으로 다가갔다.

“불초 후배 이문회가 대종사를 뵈러 왔습니다.”

사찰 문 앞에서 이문회가 공손하게 절을 했다. 그러나 문은 굳게 잠긴 채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이문회가 다시 한번 공손하게 절을 했다.

“불초 후배 이문회가 대종사를 뵈러 왔습니다.”

하지만 연화사 안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이문회는 이에 전혀 굴하지 않고 허리를 굽히며 계속 서 있었고 1분 간격으로 인사를 올렸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꼬박 반나절이 지나도록 이문회는 몇백 번이나 허리를 굽히며 절을 하고 또 했다.

결국 문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에는 못마땅하고 불편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만날 생각이 없으니 어서 돌아가게. 내가 이곳으로 숨어들어온 걸 알면서 굳이 찾아오는 이유가 무언가? 지나치지 않은가? 날 좀 내버려 두게.”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대종사 영종오로 일찍이 황제의 선생이기도 했고, 국학, 무도, 연단, 기마술 등등 어느 것 하나 정통하지 못한 것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의 위상은 장양명보다도 훨씬 높았다. 이 세계에서는 무도가 중요하기 때문에 학술의 대가일 뿐 무공은 없는 장양명보다 위상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이문회가 말했다.

“제가 절세의 옥석을 가져왔습니다. 대종사께서 한번 잘 다듬어 주셨으면 합니다. 대종사도 한때 저희 엄당에 몸담은 적이 있으시니, 저희 엄당에서 인재를 배출하는 데 일조를 해주시는 것도 보람찬 일 아니겠습니까?”

“어서 돌아가게. 계속 고집부린다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네.”

대종사는 성격이 급하고 감정적인 사람인 모양이었다.

이문회가 말했다.

“대종사, 제 의자는 정말 백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귀재입니다.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너무 아쉽지 않겠습니까?”

“관심 없으니 썩 꺼지게.”

이문회가 한참을 망설이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대종사, 십여 년 전에 제가 차마 전해 드리지 못한 말이 있습니다. 왕회수라는 아름다운 여인이 저한테 어떤 말을 전해 드리라고 부탁을…….”

“닥쳐! 닥치라고!”

안에서 불같이 화가 난 영종오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갑자기 바람이 일더니 사찰의 문이 열리고, 백발홍안이요 선풍도골이면서 비범한 기운을 풍기는 노인이 걸어 나왔다. 무명옷을 걸친 노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문회, 죽고 싶은 거냐?”

대종사 영종오 역시 선천적인 고자였다. 하지만 그에게도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가 있었는데, 영종오는 이 일을 명예스럽지 못하다고 여겨 금기에 붙였고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했다. 그런데 지금 이문회가 이 이야기를 꺼내며 그를 자극한 것이다.

이문회가 즉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불초 제자 이문회가 대종사를 뵙습니다.”

영종오가 손을 휘저으며 이문회를 말렸다.

“아니, 난 네 사부가 아니다. 난 너 같은 제자를 둔 적이 없어.”

하지만 이문회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두변을 자기 쪽으로 당기며 말했다.

“대종사, 이 아이가 제 의자인 두변입니다. 백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지요. 이 아이를 제자로 거둬주신다면 분명 대종사의 자랑거리가 될 것입니다.”

“천재라, 개중에 진짜 난 놈이 얼마나 된다고. 내 한평생 천재라면 질리도록 봐왔는데 이런 수법이 통할 것 같으냐?

일전에 부탁을 받아 억지로 제자 넷을 떠안았는데 네놈이 여기에 한 명을 더하겠다고? 꿈도 야무지구나.”

이미 영종오에게 제자 넷이 있을 거라 생각을 못 했던 이문회는 눈썹을 찌푸렸다. 분명 이런 부탁을 한 사람은 이문회 본인보다 훨씬 대단한 배경을 지니고 있어 영종오가 거절을 못 한 것이리라.

영종오가 단호하게 말했다.

“돌아가거라. 난 제자를 받을 생각이 없다.

계속 귀찮게 한다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뭔 천재들이 그리도 많으냐? 제대로 된 놈은 하나도 없으면서?”

영종오 대종사에게는 그야말로 어떤 말도 통하지 않았다.

이문회는 허리를 깊게 숙여 절을 한 다음 고개를 들었다.

“대종사, 왕회수라는 여인이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영종오가 싸늘하게 말했다.

“이문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정말 죽고 싶은 거냐?”

하지만 이문회의 표정은 진지했다.

“산서(山西)의 상인연합회가 북달(北韃), 건로와 소금, 철, 무기, 갑옷들을 밀매하며 불법 교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불법 교역이 발각되면서 왕회수의 시댁이 희생양이 되어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집안의 재산이 모두 몰수당하고 참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왕회수와 그녀의 아이들도 화를 피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영종오가 진지하게 생각해보니, 이번 일은 동창에서 모함한 것이 아니라 문관 집단과 상인 집단 사이의 갈등으로 빚어진 결과였다. 지금 왕회수의 가족을 구하려면 틀림없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그럴 능력이 있고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건 오직 엄당뿐이었다.

영종오가 영향력이 막강하고 심지어 황제의 선생이기도 했다지만, 왕회수는 그의 옛사랑이면서 다시 들춰보기 싫은 기억인 터라 엄당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부탁할 수 없었다.

“문회, 내가 왕회수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깊지 않다.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을 구할 수 있으면 구하고, 그럴 수 없다면 그냥 내버려 둬라. 운명에 맡길 수밖에.”

이문회가 허리를 굽히며 절했다.

“대종사, 짧은 기간이었지만 대종사는 제 스승이셨고 왕회수는 그런 대종사와 인연이 있는 분이니, 그녀는 제가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꼭 구하겠습니다. 오늘 제 부탁을 거절하신다 해도 저는 그녀를 구할 것입니다. 대종사, 제 옆에 있는 이 아이는 정말 보기 드문 천재입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말을 마친 이문회는 계속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천재? 천재들을 수없이 봐왔지만 죄다 똑같은 놈들이었다. 소위 천재라는 놈들은 죄다 허풍이야.”

“하지만 이 아이는 저희 엄당의 미래입니다. 제발 거두어 주십시오.”

말을 마친 이문회가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난 이미 제자가 넷이나 있네. 아주 짜증이 나. 제자란 놈들은 하나같이 다 내 업보지. 자네가 제자 한 명을 더 받아달라고 하는 것은 나더러 업보를 더 지라는 소리인데, 그럼 나는 언제 자유를 맛보겠나? 내 나이 이미 예순을 넘었네. 이제 좀 한적하게 살며 노년을 즐기고 싶단 말일세.”

이문회가 여전히 공손하게 말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쯧. 자네가 백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고 하니 내 기회는 한번 주도록 하지.”

“대종사, 감사합니다.”

“기뻐하기엔 아직 일러. 나를 사부로 모시고 싶다는 이들에게 항상 문제를 내왔지. 그 문제들은 각양각색이기도 하고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데, 내가 요구하는 건 60점이야. 60점만 받으면 통과네. 하지만 최고로 우수하다는 청년 준걸 천 명이 그 시험을 봤지만 단 두 명만이 내 제자가 되었네.

하지만 오늘 자네가 나를 협박해서 기분이 안 좋으니, 시험에 통과하려면 자네의 의자는 80점을 넘어야 할 것이야. 80점이 안 된다면 모두 없던 일이야.”

영종오가 어렵다고 할 정도면 그 난이도를 상상하기도 힘들 테니, 이문회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대녕 왕조 각지에서 내로라하는 우수한 청년 천 명이 시험을 봤지만 단 두 명만 60점을 넘었다는 것은, 영종오 대종사의 시험이 3대 학부 대회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닌가. 3대 학부 대회는 금기서화만 다루고, 그것도 광서성 성내에서만 이뤄지는 경연이니 말이다.

“왜 그러는가? 자신이 없나? 그렇다면 더는 나를 귀찮게 하지 말고 돌아가게.”

“방금 하신 말씀 꼭 지켜주십시오.”

“문제는 오늘 저녁에 내겠네. 총 열 문제고 내일 아침에 저 아이가 직접 와서 답을 적어야 하네. 80점을 넘기면 내 제자가 되는 거지만 80점을 넘기지 못한다면 그 즉시 내 눈앞에서 사라지게.”

“알겠습니다.”

연화산 사찰의 문은 닫혔고 이문회는 산에서 내려왔다.

저녁이 되자 대종사 영종오는 머리를 쥐어 짜내며 문제를 냈다.

정말이지 다시는 제자를 받을 생각이 없던 터라 어느샌가 문제의 난도는 기존 문제보다 두세 단계 높아졌고 80점은커녕 30점도 받기 힘들어 보였다.

시험은 총 열 문제로 시(詩), 사(詞), 지리, 무도, 연단, 천문, 산술 등 포괄적인 범위를 다뤘으며 심지어 한 문제에 여러 과목의 내용을 연계하기도 했다.

이런 문제는 그야말로 사람을 학대할 정도로 괴롭히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무얼까.

대종사 영종오는 그 누구도 합격하지 못할 문제를 만들어서, 이문회도 이쯤하고 돌아가길 원했다. 그후 자신의 아픈 기억이며 차마 돌이킬 수 없는 옛사랑을 순순히 구해주길 바랐다.

대종사 영종오는 머리를 쥐어 짜내며 오후부터 저녁까지 전심전력을 다해 장장 6시간에 걸쳐 열 문제를 모두 출제했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 번 검토도 마쳤다.

80점은 고사하고 50점을 받기도 거의 불가능한 난이도의 문제였다.

영종오는 자신이 낸 문제를 보며 굉장히 뿌듯해했다. 그는 괴롭힐 심산으로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새로운 시험지다. 한 시진 후에 답안지를 제출하도록 해라. 너희들이 몇 점이나 받는지 한번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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