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장: 시 짓기 대결
영설 공주의 연주가 끝나자 연회장은 조용해졌고 젊은 사내들의 눈빛은 뜨겁게 타올랐다. 여자인 축옥쌍조차도 선망의 눈빛으로 공주를 바라봤다.
방검지와 원정, 하늘이 내린 두 총아는 공주를 향한 자신들의 마음을 숨기지 않으며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토록 아름다운 선율을 인간 세계에서 몇 번이나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공주의 연주에 푹 빠져 잠시 이 세상을 잊었습니다.”
계동앙이 감탄하며 말하더니 문 쪽을 바라봤다.
“두변, 늦었군. 공주 전하의 흥을 돋우기 위해 검무를 한번 춰 보게나.”
두변은 대청에 들어가 자신의 자리를 찾았으나, 문 뒤편 가장 외진 곳에 배정되어서 자리를 거의 못 찾을 뻔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의 좌석끼리는 모두 붙어 있었는데, 두변의 자리는 유독 떨어져 있었다.
계동앙이 말을 마치자 연회장에 있던 십여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두변을 쳐다봤다. 하지만 이내 두변이 입고 있는 낡고 거친 삼베옷을 확인하고는 시큰둥한 시선을 보냈다.
연회장에 있던 십여 명의 귀빈 중 누구 하나 고아한 옷을 입지 않은 이가 있을까. 오직 두변만이 시종 같은 옷차림이었다.
게다가 두변이 자신의 자리에 앉았는데, 의자가 유난히 낮아서 다른 이들보다 키가 한참이나 작아 보일 지경이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검무를 추지 못합니다.”
“검무를 추지 못한다면 시라도 지어 보게. 늦었으니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두변의 말에 계동앙이 말했다.
“지금은 아무런 영감도 떠오르지 않으니 벌주를 마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두변은 술잔을 집어 들고 쭉 들이켰다.
그때 하늘의 총아 방검지가 몸을 일으켰다.
“방금 공주 전하께서 금 연주로 저희에게 감동을 주셨으니 제가 답례로 시 한 편을 바치고 싶습니다.”
몸을 일으킨 방검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빛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숨죽이고 그를 지켜보며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지금 이곳은 문관 집단의 세력권인 데다 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방씨 가문은 문관 사대부의 수령이었다. 방검지의 영설 공주에 대한 구애와 정복욕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기에, 구양담과 낙문, 계동앙은 방검지에게 뭐라도 도움을 줘야 했다.
방검지가 영설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면 문관 집단의 위세가 더 커질 것이기 분명하지 않은가.
잠시 후 생각을 마친 방검지는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등불 아래 종이를 오려 꽃을 만들며 담소를 나누던 그때를
어찌 전부 기억하리.
근심 가득한 이 마음을 누굴 붙잡고 쏟을 곳이 없어,
군자께 이번에 가시면 언제 돌아오시냐고 물었지요.
심금을 울리는 이 가락이 끝나면,
저는 가슴이 찢길 듯한 슬픔을 느끼겠지요.
이 하늘 아래서 또 어찌 그대 같은 지음을 찾을 수 있을까요.’
이 시에서 ‘군자’는 영설 공주를 가리킨다. 신분이 고귀한 공주가 곧 대군을 거느릴 것이고 남자에 전혀 뒤지지 않는 인물이니, 공주를 군주에 빗대어도 무방했다.
먼저 나선 방검지의 기선제압은 대단한 성공이었다.
방검지가 지은 시는 작품의 수준이나 시구 모두 상당한 수준급이었다.
특히 마지막 두 구절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었고 공주를 향한 자신의 마음, 그리고 슬픔과 낙담 또한 잘 드러냈다.
모두 방검지의 시구에 취한 듯 연회장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 계동앙이 탁자를 내리치며 말했다.
“참으로 좋은 시네. 근래에 보기 드문 시였어. 아주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었네.”
뒤이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내고는 잔을 들어 술을 마셨다.
“참으로 좋은 시네. 방금 읊은 시는 공주 전하의 연주와도 정말 잘 어울리는군.”
낙문이 매우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영설 공주가 보기에도 정말 좋은 시이긴 하지만, 이 시는 방검지가 공개적으로 공주에게 구애하는 애정시라고 할 만했다.
시를 읊은 후 방검지는 뜨거운 눈빛으로 영설 공주를 응시하고 있었다.
“공주 전하. 제 시를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요.”
“이런 부탁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공주 전하께서 조금 전 연주가 마지막 연주이고 앞으로는 금 대신 검을 들겠다 하셨지요. 그러니 공주 전하께서 금의 현 하나를 뜯어내 제게 주셨으면 합니다.”
방검지의 말에 장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비록 금의 현이 사랑의 징표라고까지 할 수는 없겠지만, 여인이 사내에게 어떤 물건을 준다는 것 자체로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지 않겠는가.
금의 현을 뜯어내는 것이나, 사내가 갈비뼈를 떼어내어 그것으로 여자를 빚는 것이나 비슷하지 않은가.
오늘 공주가 금의 현을 뜯어내 방검지에게 건네준다면 며칠 후면 천하에 소문이 퍼질 것이고 모두 둘이 서로 사랑을 약속했다고 여길 것이다.
방검지가 공개적으로 구애를 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선택을 강요하는 상황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영설 공주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이럴 때는 직접적으로 거절하는 것은 가장 좋지 않은 방법이었다.
공주가 말했다.
“이토록 좋은 금을 망가뜨리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겠습니까.”
이어서 그녀는 단검 하나를 꺼냈다. 단검은 날카로운 황금 비철(秘鐵)로 만들어진 것으로, 바람에 날려 올라간 머리카락 한 올도 쉽게 베는 명검이었다.
“광서에서 유능하다는 준걸들은 모두 여기에 모인 것 같군요. 방검지 공자가 멋지게 시작을 해주었으니 모든 사람이 시를 한 편씩 지어보고, 가장 멋진 시를 짓는 사람에게 이 단검을 주겠습니다. 나중에 이 단검을 가지고 본 공주를 찾아온다면 그분의 청을 하나 들어주겠습니다.”
연회장에 있던 모두가 흥분했다.
이 단검의 이름은 황금설(黃金雪)로, 공주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었다.
비록 공주가 사랑의 징표라고까지 언급하진 않았으나 모두가 그렇게 받아들였고 또 그렇게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어쨌든 이 단검은 영설 공주가 몸에 지니고 다니는 물건이었고 그녀가 지금껏 어떤 사내에게도 선물을 준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영설 공주가 처음으로 주는 선물이라는 데서 그 의미가 특별하다 할 만했다.
계동앙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좋습니다. 공주 전하의 선물은 더없이 귀중한 것이니 이 자리에 있는 젊은이들은 가진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시를 지어 그 단검을 가져가면 좋겠군요.”
이번엔 낙문이 말했다.
“나이가 제법 찬 사람들은 참여하지 않도록 합시다. 방검지 공자, 원정 공자, 영충요 세자, 최부 공자, 당엄 공자, 그리고 두변까지 이렇게 여섯 명이 참가해 최고의 시를 가려보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호명된 여섯 명이 대답했다.
두변은 이것이 어제 꿈속에서 말한 첫 만남에 관한 임무라는 걸 깨달았다.
좋은 시를 짓는 게 영설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는 최종 목표의 첫 번째 임무라면, 다른 준걸들을 제압하고 영설 공주의 황금설을 얻어야 했다. 이 임무에 성공해야 영설 공주의 호감도 15를 얻게 된다.
호감도가 만점인 100에 다다르게 되면 영설 공주는 두변에게 푹 빠져 어떻게든 두변과 혼인하기 위해 노력하고 한평생 두변만을 따르게 될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저 단검을 가져와야 했다.
두변 말고도 연회장에 있는 다른 다섯 명 모두 의욕이 충만한 상태로 영설 공주의 선물을 손에 넣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또 다른 하늘의 총아 원정이 몸을 일으키며 손에 든 술을 들어 올렸다.
“방 형은 사대부 가문 출신으로 글재주가 남다릅니다. 하지만 저는 무장 가문 출신으로 술을 좋아하니, 권주가를 지어 전하께 바치겠습니다.”
원정은 키가 크고 건장했으며 그 기세가 날카로운 검처럼 정말 대단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하고도 위풍당당한 기세는 진남공 송결에 비길 만했다. 대청 가운데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모든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공주께서는 잔을 비워 시작을 알려 주십시오.”
원정의 말에 영설 공주는 술잔을 받아들고 단숨에 쭉 들이켰다.
“좋습니다.”
원정이 시를 읊기 시작했다.
‘백련 천문(天門)이 밤에 닫히지 않고,
구천(九天) 현녀(玄女)는 무슨 일로 인간계로 좌천되었는가.
임을 위해 금경로(金莖露: 술 이름) 다섯 말을 건네니,
강남의 온 세상이 술에 취하는구나.’
“좋은 시로다!”
연회장의 사람들이 흥분해서 열렬하게 박수를 보냈고, 무장인 축무애는 자신의 검으로 탁자를 내리치기도 했다.
그 시는 굉장히 수준이 높았고 호기로우면서도 원정과 잘 어울렸다.
마찬가지로 이 시구에서도 영설 공주에 대한 마음을 밝히면서, 그녀를 구천 현녀가 인간계로 내려왔다고 빗대어 표현했다. 강남의 온 세상이 취했다는 구절은 영설 공주의 경국지색 미모를 찬양할 뿐 아니라 그녀의 남다른 기백과 아름다움, 그리고 웅대한 기세가 천하를 압도했음을 묘사했다.
두변은 방검지와 원정 둘 다 문무를 겸비한 진정한 인재임을 깨달았다. 게다가 오늘 밤의 시 짓기 대결은 일찌감치 계획된 것으로, 방검지와 원정은 모두 구상을 해놓고 오늘 밤만을 기다려 왔음을 눈치챘다.
두 명의 시는 수준이 굉장히 높아 용호상박이라 할 만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두변은 이 시들이 본인이 쓴 것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의심까지 하게 되었다.
한동안 원정에게 박수갈채가 쏟아졌고, 이어서 축무애가 입을 열었다.
“모두 술잔을 들어 주십시오. 원정 공자의 시를 위해 건배합시다.”
그러자 모두가 술잔을 들고 시원하게 비웠다.
이어서 계왕 세자 영충요의 차례가 왔다. 겸허하며 자신을 낮춰왔던 번왕 세자가 몸을 일으켰다.
“방검지와 원정 두 분은 문무를 겸비한 인재이므로 저 영충요는 두 분께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제가 학식이 모자라 추태를 부리지 않고 석 잔 벌주로 대신하고 이만 물러날까 합니다.”
말을 마친 계왕 세자 영충요는 술을 석 잔 연달아 마셨다. 술이 독해서였는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면서 참지 못하고 기침을 해댔다.
“아, 네네 세자다우십니다. 도량만큼이나 주량도 좋으시군요.”
계동앙이 웃으며 말하자, 낙문이 말을 받았다.
“영충요 세자께서 겸허하고 자신을 낮출 줄 안다 들었는데 오늘 보니 거짓된 소문이 아니군요. 보아하니 광서에서는 또 한 명의 어진 왕이 나올 거 같습니다.”
축무애 또한 이어서 계왕 세자 영충요를 칭찬하면서, 세자에게 다시 한번 몸을 일으켜 모두에게 예를 갖추게 했다.
오직 두변만이 속으로 탄식했다.
‘계왕 세자야말로 엄연한 황실의 자제인데, 문관과 무장 집단에게 물러서다니. 이건 자신을 낮추는 게 아니라 저들과 맞서지 못하고 도피하는 나약한 행동이지.’
하지만 이상한 것도 아닌 것이, 대녕 왕조의 번왕은 편안하게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것 외에는 어떠한 권력도 갖지 못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봉토 밖으로 떠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지방 문무 관원들과 엄당 세력으로부터 감시를 받았기 때문에 심하게 말하면 지방의 번왕은 가축처럼 길러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계왕은 이문회와 함께 무도를 익히던 시절을 줄곧 그리워했다. 계왕도 차라리 천호가 되어 국가를 위해 전장을 누빌지언정 이렇게 아무런 권력도 없는 허수아비 왕이 되고 싶진 않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계왕 세자 영충요가 이렇게 물러나니 영설 공주는 크게 실망하면서 동시에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사실 공주는 사촌 오라비인 영충요가 시에 능하다는 걸 알기에 이런 제안을 꺼낸 것이다. 모든 사람의 시를 들은 후 공주가 영충요의 승리를 선언하여 그에게 자신의 단검을 건네준다면, 둘 다 황실 사람인 데다 오누이 사이이니 영충요와 자신 사이에 황금설을 둘러싼 추문이 돌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영충요가 이렇게 물러섰으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설마 자신의 황금설을 정말 다른 사내에게 건네주어야 하는 건가? 그렇게 된다면 반드시 추문이 나돌 테고 그녀의 평판은 큰 타격을 받게 될 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