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장: 전율의 시
이어서 광서 해원 최부가 시를 지을 차례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시는 영설 공주에게 구애하는 종류의 시여서는 안 된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최부는 몸을 일으켜서 잠시 생각을 마친 후에 하늘 높이 떠 있는 밝은 달을 쳐다봤다. 오늘 마침 7월 16일이었고, 달은 밝고 둥글었다.
최부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힘있게 시를 읊기 시작했다.
최부의 시구도 상당한 수준을 자랑했다. 최부는 영설 공주를 두고 경쟁할 수 있는 사람은 방검지와 원정 두 사람뿐이라는 걸 알기에 영설 공주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긴 했으나 구애의 뜻을 내보이진 않았다. 그렇지만 조연으로서의 역할도 달갑지 않아서, 긴 시를 지어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재능을 선보였을 뿐이다.
한참 동안 계동앙과 낙문, 구양담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최부의 시는 매우 뛰어났지만 오늘 밤 주인공은 방검지 한 사람이면 족했기에 그에게 칭찬을 해줄 수는 없었다.
그런데 방검지가 오히려 손뼉을 치며 말했다.
“참으로 좋은 시입니다. 저도 달을 노래하는 시는 많이 들어봤지만 최부 당신의 시가 제일인 것 같습니다.”
방검지가 입을 열자 계동앙, 구양담 등의 인물들도 칭찬을 이어갔다. 최부는 만족하는 듯한 기색을 내보이며 공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비록 그 자신이 오늘 주연은 아니었으나 꽤 만족할 만한 성과였다.
이어서 광동의 해원이자 모든 사람의 관심을 받는 엄당의 차기 수령 당엄의 차례가 되었다.
당엄의 외모는 굉장히 준수했으며 연회장에 있는 귀공자들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 풍채여서 모두 그가 환관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다.
당엄이 몸을 일으켰다.
“3년 전 공주 전하가 몽고 왕자의 목을 베어 수십 명의 무고한 희생자의 영혼을 달래주었었습니다. 저는 그때 공주 전하의 의협심과 자비로움에 감탄을 금치 못했기에 그에 관한 시를 바치고자 합니다.”
당엄은 술잔을 집어 들고 시를 읊기 시작했다.
‘3년에 걸쳐 검을 갈았음에도,
용은 아직 울부짖지 못했네.
드디어 오늘에야 군주께서 그 검을 쥐게 되었으니,
이 세상에 그 어떤 부당한 일이 존재할 수 있을까.’
당엄의 엄청난 시에 영설 공주는 눈을 반짝거렸고, 두변조차 전율했다.
영설 공주가 몽고 왕자를 죽이고 3년간의 유배 생활에 처하게 되었으며, 진남공 송결이 보내온 보검을 방금 받아 이름을 용음이라 지었다는 내용을 짧디짧은 네 구절에 다 담았기에, 최부의 그 길었던 시보다 더 강한 인상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이때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이 당엄을 보는 눈빛에는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이 시는 짧지만 세련되었고 그러면서도 비수처럼 날카로워 영설 공주의 환심을 가장 많이 살 게 분명했다.
당엄은 문무 관료들과 행동을 같이 해왔고, 덕분에 공주는 그에 대해 호감을 갖지 않았고 오히려 거부감까지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 시를 듣고 난 지금 공주가 당엄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면서 이내 그를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자가 차기 엄당의 수령이 된다면 어떤 모습일까?’
당엄의 시는 너무 뛰어났고, 영설 공주의 마음에 꼭 들었다.
영설 공주는 이 황금설을 당엄에게 주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엄은 환관이니, 단검을 그에게 준다고 해도 쓸데없는 염문이 나돌지 않을 테고 그녀의 평판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황금설을 당엄에게 주는 순간, 공주 자신이 당엄을 차기 엄당의 수령으로 인정하겠다는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는 셈이었다.
영설 공주는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여식이기에, 그녀의 태도가 황실의 뜻을 대표할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만약 영설 공주가 단검을 당엄에게 준다면 당엄의 명성이 더욱 높아져 범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된다.
영설 공주는 자신도 모르게 두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이유는 명확했다. 만약 두변이 충분히 뛰어난 시를 짓지 못한다면 이 단검을 당엄에게 준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된다면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영설 공주는 이문회의 측근에 대한 편애보다 공정함을 더 중시했다.
“방검지와 원정, 최부의 시는 모두 훌륭했고 주변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한 시였습니다. 하지만 내게 가장 마음에 드는 시를 고르라고 한다면 당엄의 시를 선택하겠습니다.”
영설 공주의 말에 방검지와 원정의 표정이 조금 흔들렸지만,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결과였다. 어쨌든 당엄이 환관이니, 공주의 단검을 그가 받는다 할지라도 그 어떤 염문도 생길 리가 없으니까.
만약 이 단검을 방검지가 받거나 원정이 받는다면 오늘 저녁 연회는 매우 불편해졌을 것이다. 두 사람은 공주를 얻겠다는 의지가 확고하긴 했지만, 굳이 오늘 밤 승부를 가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나중을 기약하기로 했다.
게다가 당엄이 엄당의 차기 수령이 된다면 이문회의 진급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게 되므로 문무 모두에게 좋은 결과였다.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나서 문관과 무장 집단은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당엄을 오늘 저녁의 우승자로 만드는 것도 어부지리를 노리는 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계동앙은 무엇보다 두변을 막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는 당엄을 치켜세울수록 입지가 계속 좁아지는 두변을 보며 속으로 매우 기뻐했다.
계동앙이 웃으며 말을 꺼냈다.
“두변, 자네는 방금 시를 짓는 데 부족함이 많다고 하였는데, 포기할 텐가? 아니면 도전할 텐가?”
계동앙의 말이 끝나자 모두의 시선은 두변에게로 향했다.
두변은 계동앙의 말에서 악의를 느낄 수 있었다. 이미 방검지와 원정을 포함한 문관과 무장 집단은 서로 연합했고 당엄을 치켜세우며 두변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두변이 시를 짓는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그의 시를 물고 뜯어 당엄을 우승자로 만들 속셈이었다.
하지만 두변은 반드시 이번 시 짓기 대결에서 이겨야 했다. 차기 엄당 수령의 자리를 다투는 자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공주와의 첫 만남에 관한 임무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앞선 시들이 모두 대단했고, 특히 영설 공주는 당엄의 시를 마음에 꼭 들어 했다. 두변이 우승을 쟁취하려면 100점 만점에 120점 작품을 선보여야 했다.
두변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연히 시를 지어야지요.”
두변은 술잔을 들고 대청 중앙으로 걸어 나가서는, 영설 공주와는 네 발걸음 거리만큼 가까워졌다.
“공주께서는 북으로 가시니 송별의 시를 지어야겠습니다. 공주 전하 잘 들어주십시오.”
두변이 시를 읊기 시작했다.
‘강기슭에 우거진 풀,
해마다 시들었다 무성해진다네.
들불을 놓아도 다 타지 않고,
봄바람 불면 다시 돋아난다네.
멀리까지 자란 풀 옛길까지 뻗어 있고,
햇볕 아래 푸르름이 황량한 성에 맞닿아 있네.
또 공주를 북으로 떠나보내니,
우거진 풀에 온통 이별의 정 가득하구나.’
- 백거이(白居易), 〈부득고원초송별(賦得古原草送別)〉
두변이 첫 구절을 읊는 순간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시선에는 경멸이 가득했다. 이토록 직설적인 표현을 사용한 시는 다른 자리에서는 괜찮았을지 몰라도 오늘 저녁에서는 이미 수준 높은 시들이 연이어 나왔기 때문에 두변의 시는 멋있기는커녕 평범하기 그지없게 느껴졌다.
하지만 두변이 두 번째 구절을 읊자 영설 공주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들불을 놓아도 다 타지 않고, 봄바람 불면 다시 돋아난다네.’ 이 구절이 공주의 강력한 의지와 기개를 대변한다는 생각에 마음에 들었다.
두변이 시를 다 읊고 나자 모두 속으로 대단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쉬운 시였지만 글과 분위기가 모두 빼어난 시였다.
계동앙과 낙문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두변은 시 짓기에 약하다고 하지 않았나?
어찌 이처럼 대단한 시를 지을 수 있지?’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문학적 소양이 매우 높은 자들이라, 두변의 시가 어렵지 않은 단순한 시구로 서정적인 감성을 표현하며 고상한 사람들이나 세속적인 백성들 모두가 이 시를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음을 알아차렸다.
시를 읊을 때 고상하거나 단순한 것 둘 중 하나만 추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고상하면서도 단순한 시를 짓는 것은 매우 어려운 법인데, 두변이 이 시를 통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중간지점을 완벽하게 찾아낸 것이다.
하지만 두변이 방금 지은 시는 결정적 한 방이 부족했다. 최부의 시처럼 화려하지도 않았으며 당엄의 시처럼 호기롭거나 날카롭지 못했다. 백거이 같은 명성이 없는 두변으로서는 읊어낸 시가 너무 쉽고 평범해서 좌중을 압도할 수는 없었다.
영설 공주는 매우 공정한 사람으로, 두변의 시가 당엄이나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전 태자 소부 계동앙이 입을 열었다.
“두변의 시는 매우 훌륭합니다. 하지만 최부를 이긴다고는 보기 힘들군요. 더욱이 당엄과 같은 기세가 없습니다. 당엄. 자네가 영설 공주의 황금설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 같네. 축하하네.”
흥분한 나머지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한 당엄은 앞으로 나가 허리를 숙이며 절을 했다.
“보검을 목숨처럼 아끼겠습니다.”
어떻게 당엄이 초연할 수 있겠는가. 영설 공주의 단검을 받으면 황실의 인정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고, 향후 그가 엄당의 후계자가 되는 데 좋은 명분이 될 것이다. 심지어 며칠도 안 돼서 이 일은 천하에 퍼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문회 파벌은 당엄의 후계자 지위를 견제하는 데 매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잠시만요!”
두변의 말에 계동앙이 눈썹을 찌푸렸다.
“두변,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결과에 승복하게.”
두변은 계동앙을 무시하고 공주만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전하, 이건 제 첫 번째 시일 뿐이며, 방금은 몸만 풀었습니다. 혹시 전하께서는 ‘일보일시(一步一詩)’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연회장이 시끌벅적해졌다.
일보일시라? 두변이 배짱을 부리는군.
이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천재이지만 시를 한 편 짓는 데 며칠, 몇 개월 혹은 몇 년씩 걸려가며 영감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방금 방검지와 원정, 최부, 심지어 당엄조차도 현장에서 시를 짓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이다. 당엄도 마음속으로 여러 차례 구상을 마친 끝에 얻어낸 결과물이었다.
그런데 걸음 한 번에 시 하나라니.
저자는 시 짓는 일을 어찌 이토록 쉽게 보는 것인가? 천년의 긴 세월 동안 제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시인일지라도 한 달에 시 한 편 짓는 것도 대단한 것을!
축무애가 말했다.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시를 말하는 게냐? 망신당하지 말고 가만히 있거라.”
두변은 계속 다른 사람은 무시하며 영설 공주만을 바라봤다.
“전하, 방금 방검지가 지은 시는 부부간의 ‘금슬(琴瑟)’을 얘기했고, 원정의 것은 권주가였습니다. 최부의 것은 밝은 달에 관한 시였고, 당엄의 것은 의협심에 관한 시였습니다. 맞습니까?”
영설 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 하나로 저들을 전부 이기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1 대 4의 대결을 원합니다. 저들이 어떤 시를 지었든 저도 같은 주제로 시를 짓겠습니다. 게다가 저들보다 더 뛰어난 수준의 시를 선보이겠습니다. 이렇게 이겨야지만 군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어떤 비호도 필요 없으니 오로지 실력으로만 얘기하겠습니다.”
두변이 말을 마치자 연회장이 다시 떠들썩해졌다.
1 대 4를 자처하고 나서다니, 오만무도하게 날뛰는 망나니로구나!
방금 시를 지은 네 명은 남다른 재능을 지닌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었다. 한 명을 이기는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하물며 네 명을 전부 이기겠다니!
축옥쌍이 물었다.
“일보일시를 하겠다고 했는데 만약 이전에 다 준비해 놓은 거라면?”
두변이 답했다.
“축 낭자, 이 네 분이 지은 시의 주제를 제가 그대로 따르는 것뿐인데, 제가 사전에 어떤 주제일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확실히 두변이 사전에 주제를 알았을 리 만무했기에 관중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변이 말했다.
“시 한 편을 지을 때마다 제가 한 발자국을 내디딜 시간만 주시면 됩니다.”
관중들이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한 걸음에 시 한 편을 지을 수 있다고? 이게 가능해?’
광서 동창 진무사 왕인이 냉소를 지었다.
“만약 자네가 한 발자국을 내디딜 때마다 하루가 걸린다고 하면 우리가 똑같이 기다려줘야 하는 건가?”
“공주 전하, 술 한 잔을 따라 탁자 위에 놓아 주시고 거기에 얼음 하나를 넣어 주십시오. 제가 시를 지으며 네 걸음을 내디뎌 공주 전하 앞에 다가서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은 시들로 모두를 이기고 그 술잔을 들어 마실 겁니다. 그런데 그 전에 저 술잔의 얼음이 녹아 사라진다면 제가 지는 것으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