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장: 원시에서 홀로 우뚝 서다!
계림부, 최씨 가문의 별원(別院).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니? 그런 비천한 것이랑 내기를 해? 너랑 진평이랑 신분이 같아? 승패랑 상관없이 그런 것들이랑 내기했다는 자체가 너를 욕보이는 일이라고!”
최병정이 차갑게 소리쳤다.
최병정은 아름다운 외모에 평소에 무술을 연마해 끝내주는 몸매를 지닌, 좀처럼 보기 드문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이에 반해 최연은 왜소해 보이는 미소년이었는데, 그래도 눈빛에는 고집과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내가 왜 지는데?”
최연의 대꾸에 최병정이 말했다.
“진평을 너무 쉽게 보지 마. 출신이 비천하긴 해도 재능은 너 못지않으니까. 솔직히 너랑 진평은 서로 이길 확률이 반반이야. 하지만 그 가엾은 것은 천명이 얼마 남지 않아서 너랑 수석을 다투는 일은 없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최연이 놀라서 물었다.
“누이, 설마 진평을 죽인 거야? 날 위해서라도 바로 죽일 게 아니라 내가 처참히 짓밟는 걸 기다렸다가 죽였어야지. 그런 천한 놈은 나 같은 천재와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확실히 알게 한 다음에 죽었어야 하는데. 미리 죽어버리면 그놈한테만 좋은 거지.”
최병정이 차갑게 말했다.
“진평이란 놈이 감히 두변을 옹호했으니 죽어야 마땅하지. 그것도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말이야.”
두변에 의해 그녀의 명성이 처참히 무너졌다. 그러니 최병정이 두변을 뼈저리게 미워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재밌는 것은 최병정이 정혼자를 속이고 다른 남자와 사통한 것이 들통 나서 시가에서 버림을 받았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두변 탓을 한다는 점이었다.
원시 시험을 보는 날이 되었다.
천재 소년이 사라진 지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천재 소년의 등장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진평의 선생과 친구들 모두 필사적으로 진평을 찾아 나섰지만 그럴수록 슬픔만 더해졌다. 이번 원시에서 진평이 충분히 수석을 차지할 수 있었음에도 갑자기 행방이 묘연하게 되었으니 속절없이 애만 태울 수밖에 없었다.
최병정은 시험장 밖에 있는 객잔 맨 위층을 빌려서 시험장 입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최연은 서둘러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대신, 진평이 오는지 마지막까지 확인했다. 사실 최연은 자신이 진평을 손쉽게 이길 것이라 여겼고, 그래서 진평이 시험장에 모습을 드러내길 원했다.
하지만 입장 시간이 일각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진평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진평의 친구들도 기대를 버리고 하나둘씩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최연도 크게 실망해서 시험장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바로 그때 마차 한 대가 느릿느릿 다가오더니 시험장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시름시름 앓느라 숨이 간들간들한 소년이 마차에서 내렸다.
진평이었다! 천재 소년 진평이 나타난 것이다!
원시 수석의 첫 번째 후보인 최씨 가문의 최연에 이어 두 번째 후보인 진평이 나타나면서 주위가 떠들썩해졌다.
최연이 진평을 보면서 말했다.
“진평, 역시 왔군. 근데 누구를 속이려고 다 죽어가는 척하고 있는 거지? 네가 지더라도 몸이 안 좋아서, 운이 안 따라줘서 졌다고 모두에게 말하고 싶은 거냐? 교활한 놈!”
시험장에 나타난 진평은 물론 변장한 두변이었다.
두변은 콜록대면서 발걸음도 옮기기 힘든 척 연기하며 싸늘하게 말했다.
“내가 이렇게 된 이유를 최씨 가문인 네가 모르는 척하는 거냐? 수석을 차지하려고 독으로 나를 음해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으면서?”
두변의 목소리가 너무 쉬어서, 다른 사람들은 진평의 목소리가 맞는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했고, 객잔 맨 위층에 있던 최병정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저놈이 아직 살아 있는 거지? 독충에 중독되었는데도 원시에 참가할 수 있다고?’
두변이 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최연, 내가 병이 깊어 기력이 많이 약해지긴 했지만, 원시에서 너를 이기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지. 남은 절반의 공력으로도 네놈을 충분히 무찌를 수 있으니까.”
자존심이 센 최연은 그 말을 듣고 폭발했다.
하지만 두변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차갑게 물었다.
“나와의 약속을 잊지 않았겠지?”
“당연히 기억하지! 내가 수석을 차지하면 네놈이 땅에 무릎을 꿇고 ‘엄당은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집단이니 마땅히 죽어야 한다. 파렴치하고 쌍스러운 두변도 천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외쳐야지.”
두변이 말했다.
“내가 이긴다면 네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세 번 조아려라. 그리고 ‘두변은 천재니 그 재능을 인정해야 한다!’ 같은 말은 필요 없고 ‘음탕한 최병정은 남자라면 다 지아비로 섬길 계집이다!’라고 외쳐라.”
객잔 위층에서 그 말을 들은 최병정은 눈의 실핏줄이 죄다 터질 만큼 분노했다.
“왜? 질까 봐 엄두가 안 나냐?”
두변이 냉소하자, 최연이 화가 치밀어 올라 도발에 응했다.
“좋다. 네놈의 소원을 들어주지.”
“말뿐인 건 믿을 게 못 되니 글로 남기자. 이름을 걸고 모두 앞에서 약속하는 거다.”
두 사람은 수많은 응시자 앞에서 글로 증거를 남겼다.
그리고 신원을 확인하고 몸 수색을 받은 후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최병정은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두변을 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두변을 갈기갈기 찢어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저놈이 아직 살아 있다니, 저놈에게 쓴 독충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겠지?”
최병정이 옆에 있는 시녀를 향해 소리쳤다.
“절대 문제없습니다. 저희 가문의 독충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저자가 아직 살아 있을 수 있는 건 특이한 체질 때문인 것 같은데, 지금 모습을 보더라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외모에 대담하고도 강렬한 눈빛을 가진 시녀가 대답했다.
“최연, 저 멍청한 놈. 저런 내기에 응하다니.”
“소저, 안심하세요. 진평은 이미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제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든 상태입니다. 어찌어찌 시험을 보러 왔다 하더라도 좋은 글을 써내진 못합니다.”
충분히 수긍이 가는 말이었다. 과거시험에 참가하면 글 한 편 한 편에 머리를 쥐어 짜내며 전력을 다해야 하는데, 몸이 건강하고 정신이 맑은 상태에서 시험을 치른다 해도 큰 병을 앓고 난 만큼의 기력을 소모해야 한다.
그런데 진평은 지금 숨을 제대로 쉬기도 벅차고 시름시름 앓고 있는 상황에서 머리까지 몽롱할 테니, 절대로 좋은 글과 시사를 써낼 수 없었다.
따라서 최연은 반드시 필승이었다.
뿐만 아니라 최병정은 이번 시험에서 최연이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수석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도 알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최연이 이미 사전에 문제를 받아두었다는 것이었다. 그의 가문에서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학정 대인의 심복을 통해 시험 문제를 빼내 왔고, 그 후 십여 명의 인재들을 모아 최고의 글과 시를 지어놨다.
이런 일이 배후에서 벌어졌으니 이번 원시에서 최연이 수석을 못 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두변은 순조롭게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본래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은 매우 엄격하지만 진평이 천재 소년으로 이름이 나 있었던데다 워낙 아파 보이니 혹여나 병이 옮지는 않을까 걱정하던 병사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아랫도리까지 만져보며 몸수색을 하지 않고 간단히 눈으로만 살펴보고는 두변을 들여보냈다.
광서성은 과거시험 응시자가 많은 축에 끼지 않음에도 무려 천 명이나 되는 사람이 이번 원시에 참가했다. 중요한 점은 이 인원들 죄다 현시와 부시를 뚫고 온 인재들이라서 경쟁이 치열하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원시에서 수석을 차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고 물어본다면, 대입 시험에서 수석을 하는 것만큼 어렵다고 말할 수 있다.
게다가 두변은 제대로 팔고문을 공부해 본 적도 없으니, 그 자신만의 실력으로는 원시 수석을 차지하는 것이 힘들다기보다 꿈이요 불가능이라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두변이 자신의 특기인 산술로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면 당연히 쉽게 꺾을 수 있겠지만, 이 과거시험은 자신의 단점으로 남의 장점을 공격하는 셈이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력만 놓고 보면 최연은 두변을 짓밟고도 남을 만한 실력이었고, 심지어 이 천 명의 응시자 중에도 두변을 가볍게 이길 만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시험장에 들어가자 각 응시자에게 면적이 2제곱 미터도 되지 않는 매우 협소한 공간이 주어졌고, 각자 그곳에서 식사와 용변을 해결해야 했다.
그래도 원시는 향시가 아니라서 몇 날 며칠 동안 고생하며 여러 차례 시험을 칠 필요는 없었다.
원시는 본시험과 부시험, 이렇게 두 번 시험을 치르는 게 보편적이었지만, 최근 몇 년간 부시험은 없애는 추세였기 때문에 오늘은 본시험만 치르면 됐다.
또 이전까지는 원시에 서판(書判) 과목이 있었는데, 지금은 시와 사(詞)밖에 남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변하니 유일한 책문(策問: 경의經義 또는 정치에 관해 견해를 묻는 문제)인 시문(時文: 팔고문)이 매우 중요해졌고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잣대가 되었다. 그래서 시문을 얼마나 잘 쓰느냐가 성적을 전적으로 좌우하게 되었고, 시사는 그저 금상첨화의 역할만 할 뿐이었다.
시문의 주제는 사서에서 나왔을 수도 있고, 오경에서 나올 수도 있는데, 전적으로 학정 대인의 취향에 달린 문제였다.
시험 방식이 간소화된 만큼 난도는 사실상 더 올라갔고 경쟁도 더욱 치열해졌다 할 만했다.
문제가 여럿이라면 한 문제를 망치더라도 다음 문제를 잘 풀면 충분히 만회할 기회가 생기겠지만, 문제가 달랑 하나라면 그 하나로 모든 것이 결정 나게 되므로 모든 응시생은 전력을 다해 최고의 시문을 지으려고 할 것이다.
두변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시험 문제를 펼쳐 들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글을 써 내려가기 편한 친숙한 주제가 나오길 바랄 뿐이었다.
두변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시험지를 펼쳐 들었다.
원시의 첫 번째 문제이자, 가장 중요한 시문의 주제는 아래와 같았다.
고지욕명명덕, 수신위본(古之欲明明德, 修身爲本)。
예지용, 소대유지(禮之用, 小大由之)。
연이무유호이, 무유호이(然而無有乎爾, 無有乎爾)。1)
문제를 본 두변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무슨 이딴 문제가 다 있어!
문제가 낯설다 못해 그동안 암기한 2, 3천 편의 명문 팔고문에서도 이 주제와 비슷한 글은 한 편도 없었다.
두변은 단지 이 문제가 사서(四書)에 관한 문제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멋들어진 시문은커녕 한 문장도 쓰기 버거웠다.
두변이 자기 실력에만 의존해 이번 원시를 치른다면 처참하게 무너질 게 너무나도 분명했다. 수석은 차치하고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것도 불가능했으며 아마 최하위를 기록하며 낙방할 것이 자명했다.
어쨌든 두변은 체계적으로 과거시험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고 단순 무식하게 2천여 편의 글을 외웠을 뿐이니, 자신 있는 주제가 나와야 기껏 그럴듯한 문장을 써 내려갈 수준이었다. 그러니 낯선 주제가 나온다면 그 시험은 이미 가망이 없는 셈이었다.
만약 별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번 시험은 물 건너간 것이고, 최연과의 내기에서도 속절없이 지게 되는 것이다.
주변의 응시생들도 문제를 보고 하나둘씩 한숨을 쏟아내는 걸 보니 문제를 받아들고 간담이 서늘해진 사람이 두변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대충 훑어보니 모두가 버거워하고 있었다.
두변은 자신에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첫 번째는 잠을 청해 꿈의 세계로 들어가 기적을 바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잠을 청했는데 꿈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대로 기절해 답안을 백지로 내는 것이다.
지금까지 병약한 연기를 제법 잘 해왔으니 백지를 내도 체면이 깎이는 일은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