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장: 시험관을 당황하게 한 수석은 누구?
두변은 바로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했다.
두변의 맞은편에 있던 응시생은 두변의 모습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천재 소년 진평도 안타깝게 됐군. 최연이 이기겠어.’
근처에서 감독하던 시험관도 이를 발견하고는 두변의 몸에 손수건을 올리더니 두변의 어깨를 두드렸다.
“서생, 어찌 문제를 풀지 않는 것이오?”
두변이 말했다.
“머리가 어지러워 조금 쉬어야겠습니다.”
감독하던 시험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험관은 시험장을 감독하는 척하면서 최연에게 다가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확신의 눈빛을 보냈다.
진평이 실력 발휘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최연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감히 나를 대결 상대로 골라?’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한 두변은 즉시 꿈의 세계로 진입했다.
하지만 그 대단했던 흰옷의 노인은 온데간데없었고 두변은 거대한 도서관 앞에 서 있었다.
도서관은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지만, 그곳에 쌓여 있는 것들은 책이 아니라 또 다른 지구에서 치러졌던 과거시험의 답안지였다.
수에서부터 청까지, 천년이 넘는 기간의 향시, 회시, 전시(殿試)의 시험답안을 모은 글들이었는데, 전부 합치면 족히 몇만 편은 되어 보였다.
정말 재수도 없구나!
지난 며칠 내내 꿈의 세계에서 대녕 왕조의 과거시험 답안지를 외우면서 일갑 진사뿐 아니라 이갑을 포함해서 모든 성의 향시 1, 2, 3등의 글을 외웠다. 몇백 년 동안 모아놓은 향시와 회시의 글들을 합치면 몇천 편이 넘는 양이라서 그 방대한 글들을 외우느라 구역질까지 날 판이었다.
그런데 지금 몇만 편이나 되는 과거시험 답안지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이 정도면 한 달 동안 외워야 할 분량 아니야? 그때가 되면 너무 늦잖아!
그래서 두변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심정으로 몇만 개의 답안 중에서 오늘 시험주제와 비슷한 것을 찾아내서, 양심상 약간 수정을 거친 후 그대로 표절하기로 마음먹었다.
두변이 처음으로 찾아볼 시기는 다른 지구에서의 명나라였다. 이 세계의 시대적 배경이 17세기이니, 다른 지구에서의 명나라와 딱 겹칠 것이다.
하지만 자료를 찾는 범위를 명나라로 줄인다고 해도 봐야 할 답안지는 몇천 편에 이르렀다.
두변은 오늘 시험 문제가 있는 답안지가 있는지 한 편 한 편 찾아보기 시작했다.
고지욕명명덕, 수신위본(古之欲明明德, 修身爲本)。
예지용, 소대유지(禮之用, 小大由之)。
연이무유호이, 무유호이(然而無有乎爾, 無有乎爾)。
바로 이 빌어먹을 문제에 대한 답 말이다.
홍무년(洪武年)을 기점으로 홍무제(洪武帝), 건문제(建文帝), 영락제(永樂帝), 홍희제(洪熙帝) 등의 순서대로 찾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두변은 각 황제의 통치 시기에 치러졌던 과거시험의 모든 답안지를 살펴보았다.
몇백 편, 천 편, 이천 편에 이르기까지.
두변은 눈이 침침해질 때까지 계속 찾았으나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현실에서의 몇 시진이 꿈의 세계에서 며칠에 해당하는 시간이었기에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답안을 찾기에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경태제(景泰帝) 시기의 과거시험에는 비슷한 주제가 없었다.
성화제(成化帝) 시기의 과거시험에서도 오늘 같은 시험 문제는 없었다.
이제 두변은 홍치제(弘治帝) 시기의 답안지를 찾기 시작했다.
홍치 원년의 회시와 전시부터 찾기 시작했으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고, 뒤이어 향시의 답안도 보기 시작했다.
역시 순천에는 없고 섬서에도 없으며, 절강, 강서에서도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 문장이 두변의 눈에 들어왔다.
고지욕명명덕, 수신위본(古之欲明明德, 修身爲本)?
두변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흥분하고 말았다.
몇천 편이나 뒤지고 나서 겨우 찾았구나! 드디어 이 빌어먹을 문제의 답을 찾았다!
다행이다! 정말 운이 좋았어!
답안지를 자세히 살펴본 두변은 머리카락이 곤두설 만큼 놀라고 말았다.
이 문제는 홍치 11년 응천부(應天府: 지금의 남경) 향시의 사서(四書) 문제로, 문제의 답을 쓴 사람은 당인(唐寅: 중국 명대 중기의 문인이자 화가. 당백호唐伯虎로 더 잘 알려져 있다.)이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진정한 대신(大神)을 만나다니!
당인은 하늘이 내린 절대적인 천재로, 가히 대사급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글, 시사, 회화는 명대 전체를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그때 향시에서는 당백호가 남직례(南直隸: 남경 일대)의 해원을 가져갔었다. 응천부나 남직례는 과거시험의 죽음의 조라고 할 만했다.
과거에는 응천부 향시에서 해원을 차지하는 게 전국 장원을 차지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겨졌다.
완벽한 시문을 발견한 두변은 자신이 고작 몇 글자만 고치면 이 글을 자신의 답안으로 제출할 수 있다는 사실에 온몸이 떨려왔다.
하지만 당백호의 글이 너무나 대단해서 조금 걱정되는 부분도 있었다.
두변이 이 글을 그대로 베꼈다간 광서성 전체가 떠들썩해질 것이고, 학정 대사는 소스라치게 놀랄 듯했다.
최씨 가문의 천재 소년 최연은 어떠할까.
최연이 어떤 시문을 써내든, 그 글이 얼마나 뛰어나든, 당백호 대신에게, 아니 두변 대신에게 처참히 짓밟힐 수밖에 없었다.
당백호 대신의 이 시문은 정말이지 힘과 자신감이 넘치는 글이었다!
하지만 두변이 원했던 게 바로 이토록 화려하며 다른 작품들을 압도할 만한 글로 수석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두변은 꿈의 세계에서 시문을 끊임없이 외우기 시작했다.
열 몇 번을 반복 암기하면서 두변은 당백호 대신의 아름다운 팔고문을 완벽하게 외워냈다.
꿈에서 깨어난 후 두변은 당백호 대신을 해원으로 만들어준 팔고문을 일필휘지로 시험지에 써 내려갔다.
모든 글자는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소해체(小楷體)였다. 소해체야말로 당백호의 시문과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최고의 서체이니까.
최고의 걸작이 탄생하는 순간이로구나!
당백호의 글이 세상에 나오는 순간 최연뿐만 아니라, 이번 원시에 참가하는 모든 응시생은 쓰라린 패배를 경험하게 될 것이로구나!
당백호의 시문이 세상에 나오는 순간 모든 응시생의 글은 모두 빛을 잃을 것이로다!
단지 이 시문 한 편 덕분에, 두변은 다른 응시생들의 글을 압도하면서 수석이 될 것이다!
두변은 곧 원시의 두 번째 문제를 확인했다.
“산, 수(水), 해, 달, 봄, 가을. 이 여섯 글자를 사용해 시사(詩詞) 한 편을 지으시오.”
이 말인즉슨 한 시사에 명시된 여섯 글자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학정 대인이 너무 마음 내키는 대로 문제를 내는 거 아닌가? 일반적으로는 작시의 주제는 네 글자로 규정되곤 하는데 여섯 글자라니!’
물론 이게 별로 까다롭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일반적으로 원시에서 요구해왔던 것은 8언으로 운율을 맞춘 ‘시’를 짓는 것인데, 오늘 주임 시험관은 뜻밖에 ‘작사(作詞)’ 문제를 낸 것이다.
이 지구상에는 송나라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줄곧 시가 주류였고, 사는 그리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었다.
하지만 주임 시험관은 사를 짓는 것에 능하고, 사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것이 분명했다.
눈을 감은 두변은 생각에 잠겼다.
음. 아니야. 일단 기억을 좀 되뇌어 보자. 어떤 사에 산, 수(水), 해, 달, 봄, 가을이란 여섯 글자가 들어가 있더라?
생각났다!
두변의 두 눈이 번쩍였다.
그런데 정말 이 사를 또 베껴 써야 하나?
이 작품 또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텐데?
두변이 선택한 작품은 당백호의 그 향시 답안지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작품이었다. 그 사를 쓴 사람은 과거시험과 문학적 재능에 있어서 당백호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었다.
당백호는 향시 해원이었지만, 이 사람은 바로 장원이었다.
당백호는 명 왕조에서 이름난 인재였지만, 이 사람은 명 왕조 전체를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물이었다. 명 왕조 전체가 300년이나 되는데 그 모든 천재들의 위에 군림하고 해진(解縉)이나 서위(徐渭)보다 높게 평가되는 사람이니,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가.
그는 바로 명나라 수보의 아들로, 가정(嘉靖: 명나라 세종世宗 연호) 연간에 스물넷으로 장원에 급제한 양신(楊慎)이었다.
두변이 고른 사는 바로 <임강선, 곤곤장강동서수(臨江仙, 滾滾長江東逝水)>였다.
‘도도한 장강(長江) 동쪽으로 흘러, 물보라처럼 사라진 영웅들이여.
옳고 그름, 성공과 실패는 돌아보면 공허할 뿐.
청산은 의구한데, 석양은 몇 번이나 붉었던가.
백발의 어부와 나무꾼에게 강가의 추월과 춘풍이 새삼스러우랴.
한 병 탁주로 즐거이 만나서,
고금의 많은 일들을 모두 담소 중에 날려버리리.’
(滾滾長江東逝水
浪花淘盡英雄
是非成敗轉頭空
靑山依舊在 幾度夕陽紅
白髮漁翁江渚上 慣看秋月春風
一壺濁酒喜相逢
古今多少事 都付笑談中)
이 사는 <삼국지연의> 드라마의 주제곡으로도 쓰이면서 현대 중국인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문장이었다.
문장의 심오한 의미와 높은 예술성을 보면 이 작품과 필적할 만한 글은 몇 편 없을 것이다. 소식(蘇軾)의 <명월기시유(明月幾時有)>는 비슷한 주제가 아닌 데다가 이 작품도 천년에 한 번 쓰일 만한 명문이어서 둘을 비교하는 건 적절치 않았다.
소식의 다른 작품인 <염노교, 적벽회고(念奴嬌,赤壁懷古)>와도 비교해 볼 만한데, 서로 막상막하라 볼 수 있었다.
비통함과 호기로움을 노래하는 두 작품 모두 그 예술성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작품에는 주제로 규정해 놓은 산, 수(水), 해, 달, 봄, 가을의 여섯 글자가 모두 들어가 있었다. 주제와 완벽하게 들어맞을 뿐 아니라, 그 아름다움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작품이었다.
그러니 두변이 이 작품을 선보이는 순간, 다른 응시생들의 것과는 엄청난 수준 차이를 보이게 될 것이다.
과장을 좀 보태서 말하자면 주임 시험관이 두변의 문장을 먼저 보고 다른 응시생들의 것을 본다면, 그들의 글을 끝까지 읽기도 힘들어 할 것이다.
두변은 이번에 참가한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넘어서, 앞으로도 오랜 시간 동안 원시와 향시에 참가하는 인재 모두를 평범하기 그지없게 만드는 새로운 전설로 기록되는 역사적 순간에 놓이게 된 것이다.
사실 진평도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인물이며 진정한 천재 소년이라 불릴 만했지만, 두변이 베끼게 될 이 작품에는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해가 져야 시험 시간이 종료되기 때문에 답안을 모두 작성했지만 두변은 급하게 제출하지 않았다. 지금 답안을 제출한다면 주임 시험관이 바로 두변의 시문과 시사를 읽게 되는데, 그건 두변이 바라는 상황이 아니었다.
두변은 최연과 동시에 답안을 제출해서 두 답안이 철저히 비교되길 원했다. 그래야만 최연의 시문과 시사가 상대적으로 더 못 써 보이고, 그가 상당한 수준의 답안을 썼다 하더라도 그 가치가 평가절하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문제를 푼 시간이 모두 다 해봤자 30분을 넘기지 않은 두변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답안을 보지 못하게 몸에 품은 뒤 엎드려서 자기 시작했다.
최연은 두 시진 남짓한 시간을 할애해서 시문과 시사를 다 작성했다. 그는 이번 원시에서 수석을 차지할 수 있다는 절대적인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은 이미 시험 문제를 알고 있었다. 때문에 숨이 간들간들해 글을 못 쓰는 진평이 아니라, 상태가 가장 좋은 진평일지라도 자신을 이길 수는 없었다.
주임 시험관 학정 대인은 진남공 송결의 사촌 동생으로, 그를 매수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으나 그의 심복은 노려볼 만했다.
그 심복은 몇천 냥 은자를 눈앞에 들이밀자 자신의 주인을 팔아넘겼고 시험 문제를 몰래 빼돌렸다.
최씨 가문은 바로 최고의 인재들을 소집해 시험 문제에 맞춰 가장 아름다운 팔고문을 적어냈고 산, 수(水), 해, 달, 봄, 가을, 이 여섯 글자를 이용한 완벽한 글도 만들어냈다.
사실 최연은 남이 쓴 걸 받거나 사전에 시험 문제를 손에 넣지 못했다 할지라도 자신이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부정행위까지도 다 저지른 상태였으니 최연이 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원시의 문제가 어려울수록 상황은 자신에게 더 유리한 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최연은 이번 원시에서 자신과 대적할 사람은커녕 자신과 견주어 볼 만한 사람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천재 소년이라고 이름난 진평도 이번에 자신에게 대결을 신청한 것이야말로 화를 자초한 일이라 여겼다.
이번 시험에서 작성한 답안지가 자신에게 수석을 안겨다 줄 뿐 아니라 광서성 전체 심지어는 남방의 위상을 드높일 것이라 자신하면서, 자신이 제국에서 유명한 남방의 인재가 되는 영광의 순간을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했다.
이 영예를 기반으로 최부를 뛰어넘어 최씨 가문에서 가장 특출난 후계자가 되겠구나!
진평! 이 쓰레기 같은 놈이 감히 나와 대결할 생각을 하다니 가소롭기 그지없지. 만약 오늘 네놈이 최고의 상태로 시험에 임했을지라도 내 발끝에도 못 미쳤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