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69화 (69/648)

제69장: 수석이 발표됐고 최연은 절망에 빠졌다.

이들도 겨우 첫 번째 시문의 절반만 읽고도 온몸에 찬바람이 들더니 두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글을 끝까지 다 읽고 난 뒤에는 절망으로 가득 찼다.

두변(진평)의 시사까지 읽고는 저항할 의지조차 상실했다.

이 시험관 셋도 장님은 아니었다. 이들도 글깨나 읽은 자들이어서 이 답안지가 얼마나 뛰어난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물론 최연의 시험지도 충분히 뛰어났다. 하지만 미사여구를 남발하며 기교에 집중했을 뿐이다. 이 답안지에 쓰인 글처럼 모든 글자에 범접할 수 없는 깊이를 담아내지는 못했다.

군살 하나 없는 아름다운 명문이었다.

애초에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일단 비교를 시작하니, 최연의 것은 도저히 읽어주기 힘든 수준이었다.

이토록 큰 차이가 나니 그들도 최연을 수석으로 삼자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자신이 없었다. 그랬다가는 헛소리라는 핀잔을 듣거나 자신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꼴이었고, 심하면 옥살이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주임 시험관인 오삼석이 말했다.

“누구든 최씨 가문으로부터 은자를 받은 자가 있다면 얼른 토해내도록 하게.”

은자도 중요하지만, 각자의 미래와 관직이 더 중요했다. 무엇보다 이것은 싸움이 되지 않는 경기였다.

이 시험지는 도대체 누가 작성한 것이란 말인가? 지금 자신들과 뭐 하자는 걸까? 이 정도의 시문과 시사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왜 경성의 향시에서 재능을 뽐내지 않고 굳이 광서의 원시에 왔냐는 말이다!

참으로…… 소 잡는 칼로 닭 잡는 셈이 아니냔 말이다!

봐라, 노는 물이 다른 사람이 광서의 원시에 와서 모든 것을 헤집어 놓았으니, 이 시험지 하나로 이제 응시생들은 하나같이 처참한 패배감을 느끼면서 재기불능 상태에까지 놓이게 되었다.

아직 심사가 끝난 건 아니었지만 주임 시험관인 오삼석은 결심했다.

“이 시험지의 작성자를 이번 원시의 수석으로 발표하겠소. 다들 이견 있으신가?”

“없습니다!”

시험관들이 동시에 입을 모았다.

이렇게 대단한 시문과 시사를 두고 누군가 이견을 꺼낸다면, 광서의 수치로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것인데 어찌 이견이 있을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서 진평으로 변장해 원시에 참가한 두변이 만장일치로 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 천 명이나 되는 응시생들이 일찍부터 계림 시험장의 입구에 도착해 시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완전히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곧이어 최연도 도착했다. 최연은 자신이 수석을 차지하리라 굳게 믿고 있었기에 석차를 확인하러 온 것은 아니었다. 그저 수석의 영광을 만끽하면서 동시에 진평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엄당은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집단이니 마땅히 죽여야 한다! 파렴치한 두변도 천벌을 받아야 한다!’라고 외치게 만들기 위함일 뿐이었다.

시험장 입구 광장에서 응시생들이 소곤소곤 속삭였다.

“이번에 누가 수석을 차지할 것 같나?”

“말해야 아나? 당연히 최연이지.”

“진평은?”

“진평은 아파서 시름시름 앓더군. 시험장에서도 계속 잠만 잤는데 낙방했겠지. 진평이 최연이랑 수석을 다툰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최연은 올해 열여섯인데 벌써 소삼원이 되겠군. 앞으로 향시는 말할 것도 없고 해원도 가능할 것 같아 보이는군. 게다가 명문가 출신이니 앞날이 창창하지 않겠나. 어떤 여인이라야 최연과 어울릴까 모르겠군.”

사람들의 부러움과 질투 섞인 말들을 듣고 있자니 최연이 기분이 좋아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최연은 ‘어떤 여인이라야 어울릴까’란 말을 듣는 순간 심장 박동수가 빨라지면서 머릿속에 미모의 여인이 떠올랐다.

그녀를 한 번 보았을 뿐인데도 이미 그녀에게 푹 빠져 온통 그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 여인의 신분은 너무나도 고귀해서 명문가 출신인 자신일지라도 쉽게 범접할 수 없고 그저 멀리서 바라만 봐야 했다.

하지만 가문에서 자신을 키워주기로 한 이상 오늘 소삼원을 하고 내후년에 향시에 참가하고 5년 뒤에 회시에 참가해서 순조롭게 스물하나에 진사에 급제해 일 갑이 된다면 이 여인에게 구애해 볼 자격이 생기는 셈이었다. 그렇게 되면 상대방 가문에 혼담을 꺼내 볼 만했다.

옆에서 시험 결과를 기다리던 응시생들도 여자 얘기를 하며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다들 천하에서 제일가는 미녀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당연히 영설 공주 아니야?”

“난 영설 공주를 본 적이 없지만 옥진 군주는 본 적이 있지. 그녀를 보자마자 이번 생에 다시는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보지 못할 거란 걸 알 수 있었네. 꿈속에서라도 그토록 아름답고 내 혼을 쏙 빼놓는 여인은 만나지 못할 걸세.”

최연은 바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가 그토록 꿈에 그리던 여인이 바로 옥진 군주였던 것이다.

그토록 고귀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이름을 감히 네놈들의 입에 담다니!

수백 명의 서생이 옥진 군주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찬양하고 있을 때 진평의 모습을 한 두변은 바퀴가 달린 나무 의자를 타고 시험장 입구로 오고 있었다.

두변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경악했다.

“진평은 왜 온 거야? 어제 시험 내내 잔 걸 보면 틀림없는 낙방인데. 굳이 확인할 필요가 있나?”

최연은 두변이 나타나자 즉시 다가가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

“진평, 아직 안 죽었나 보군? 좋지. 우리가 한 내기는 잊지 않았겠지?”

두변이 대답했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수석을 차지한 자에게 상대방이 머리를 땅에 세 번 조아려야지.”

“나한테 머리를 조아릴 때 파렴치하고 쌍스러운 두변도 천벌을 받을 거라고 외치는 것 잊지 말고.”

“너도 나한테 머리를 조아리면서 ‘음탕한 최병정은 남자라면 다 지아비로 섬긴다!’ 이렇게 외쳐야지.”

“하하하, 꿈도 야무지군.”

최연이 다가가 두변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곧 죽을 놈이 입만 살았구나.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해도 네놈은 절대 1등을 할 수가 없다.”

최연이 어제 작성한 내기 문서를 꺼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자, 여러분들은 모두 보시오. 이것이 어제 내가 진평과 작성한 내기 문서요. 이 문서는 홧김에 작성한 것이 아니라 내가 지식인들을 대표해 파렴치한 엄당에게 강력한 경고를 하고 싶어서 작성한 것이오. 한 달 전에 3대 학부 대회에서 엄당의 역적놈 두변이 부정행위로 이강 서원을 이겼는데 여기 있는 진평이 그런 두변을 두둔했소. 나는 어디서라도 엄당 두변의 파렴치한 모습을 모두에게 까발릴 것이오.”

최연의 말에 둘의 내기는 갑자기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최연이 서생을 대변해 목소리를 내는 것 같았고, 서생을 대신해 엄당에 맞서 싸우는 느낌이었다.

“이곳에 계신 천 분이 내기에 증인이 되어주시오.”

최연이 말했다.

“좋소. 내가 증인이 되겠소.”

모여서 지켜보던 서생들이 분위기를 끌려 하나둘씩 소리치기 시작했다.

최연이 두변(진평)을 바라보며 냉소했다.

“진평, 이렇게 많은 증인이 생겼으니 빼도 박도 못하겠구나. 벽보가 붙으면 나한테 머리를 조아리며 순순히 엄당과의 전쟁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거라.”

해가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발표를 앞두고 사람들은 들끓기 시작했다.

그중 오직 최연만이 조금도 긴장하지 않고 그저 흥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설레는구나!

곧 영광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구나!

“왔다! 왔어!”

갑자기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더니, 물밀 듯이 벽보 앞으로 몰려들었다.

과연 병사들이 합격자 발표 벽보를 가지고 와 붙이기 시작했다.

최연은 앞으로 다가가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몸을 돌려세웠다.

최연은 자신의 수석을 확신하는지라 벽보를 볼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 애써 확인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귀를 쫑긋 세우고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영광의 순간을 만끽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에이! 이런 곳에 제대로 된 적수 하나 없으니 적막하군.’

최연은 속으로 이렇게 탄식했다.

자신의 수석을 확신한 두변도 벽보를 보지 않았다.

시험장의 가장자리에 그렇게 두변과 최연 두 명만이 외롭게 서 있었다.

최연이 가소롭다는 듯이 두변을 쳐다보며 말했다.

“나한테 무릎 꿇을 준비나 해라.”

이어서 최연이 수를 세기 시작했다.

“셋. 둘. 하나!”

합격자 발표 벽보가 붙기 시작했고 최연은 자신의 이름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그때 사람들 사이에서 깜짝 놀라 고함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럴 수가.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진평은 잠자던 게 아니었어? 어떻게 진평이 수석을 할 수 있는 거야?”

그 소리가 바람처럼 최연의 귀에 꽂히면서 최연의 온몸이 싸늘해졌다.

‘이건 분명 환청인 거야. 잘못 들은 게 틀림없어.’

이어서, 뒤쪽에 있던 무리 중에서도 진평이 수석을 차지했다는 소리가 갈수록 더욱 크게 들려왔다.

최연은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고, 결국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확인해봤다.

역시나 수석 자리에는 ‘진평’이란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최연은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온몸이 꽁꽁 얼어붙었다.

최연은 정신법(定身法)에라도 걸린 것처럼 온몸이 마비되어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동시에 머리가 어질거리면서 몸이 휘청거리는 것 같아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최연은 황당하기 그지없는 결과라고 생각하면서도 숨이 막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고 나서야 최연이 입을 열었다.

“그럴 리 없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이번 시험에서 부정행위가 있었던 게 분명해. 이토록 불공평하다니! 순무 대인께 조사를 청해서 끝까지 조사를 하시라 해야겠다!”

말을 마친 최연은 기력을 회복했는지, 아니면 희망을 보았는지 더 크게 소리쳤다.

“우리 모두 답안지를 확인해 봅시다.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합니다. 부정행위가 일어난 겁니다!”

주변에 있던 몇백 명의 응시생들도 덩달아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최연은 자신이 수석을 하지 못했으니 부정행위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고, 낙방한 다른 응시생들도 자신들이 떨어졌으니 부정행위가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학정 대인은 나와주십시오! 학정 대인은 나와주십시오!”

최연이 소리치니 다른 사람들도 따라 외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학정 대인이자 이번 원시의 주임 시험관인 오삼석이 나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이번 원시에서 1등부터 10등까지의 답안지를 전부 벽에 붙여놓을 테니 원하는 사람들은 읽어보게.”

잠시 후 병사 열댓 명이 10등까지의 답안지 사본을 벽에 붙이자, 사람들이 달려들어 두변(진평)의 답안지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불과 몇 분 만에 부정행위가 있는 게 아니냐고 외치던 목소리는 어느새 사라졌다. 그 대신 한없는 감탄과 경악에 찬 탄식이 쏟아졌다.

“이토록 대단한 시문과 시사를 써내다니, 진평이 수석을 차지하는 게 맞지.”

“그러게. 이런 시문과 시사를 써내고도 수석을 차지하지 못한다면 그게 우리 광서의 수치인 거니까.”

“최연의 시문과 시가도 충분히 잘 썼지만 진평과 같이 놓고 보면 수준 차이가 확실히 느껴지는군.”

“역시 진평이야말로 천재로군. 소삼원이 될 자격이 충분해. 최연이 계속 고집스럽게 진평과 비교하는 건 부족한 자기 수준을 더 드러낼 뿐이지. 두 답안지를 한번 비교해 보면 확연히 차이가 나잖아.”

옆에서 듣고 있던 최연은 곧 폭발할 지경이었다. 자신의 패배를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최연은 매우 까다로운 눈으로 두변(진평)의 답안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분 뒤.

그는 철저히 절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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