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장: 순무에게 한 방 먹이다.
축무애가 혼절한 최현을 빤히 보며 말했다.
“여러분 중에 저자가 공범으로 물고 늘어질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지금 이곳에 있는 자들 모두 최씨 가문으로부터 돈을 받았기 때문에 이 문제에 있어서 누구도 깨끗하다 장담할 수 없었다.
낙문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인이 거칠고 저속하다고 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돈 얘기를 꺼내다니. 정말이지 서생을 욕보이는 족속들이로군.’
구양담이 말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최현에게 아들도 있고 가문도 있지 않습니까. 최암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그토록 어리석은 행동을 하진 않을 겁니다.”
낙문은 애처로운 시선으로 혼절한 최현을 바라봤지만 그를 부축해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숨을 깊게 들이쉬며 눈을 감고 이 일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낙문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머리를 스스로 헝클어트린 다음에 관복을 망가트리고 문으로 걸어 나가 밖에 있는 수천 명의 서생과 만 명이 넘는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순무 대인이 나왔다!”
한바탕 시끌벅적하던 사람들이 조용해지고, 모두의 시선이 광서 순무 낙문에게로 고정되었다.
낙문이 목이 쉰 상태로 감정에 호소하며 말했다.
“방금 관아로 돌아오고 나서야 경악을 금치 못할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느낀 분노와 두려움은 그 어떤 말로도 형용하기 힘든 상태입니다.
저들이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저들은 과거시험에서 부정행위를 저질렀을 뿐 아니라 상대방에게 수석을 빼앗길까 봐 무고한 천재 소년을 음해하려고까지 했습니다.
참으로 믿기 힘든 사건 아닙니까. 이렇게 파렴치한 행동을 하다니, 과연 국법이 살아 있기는 한 겁니까?
과거시험이 무엇입니까? 국가의 인재와 제국의 국책을 위한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국가의 운명을 가로 짓는 시험이며 공부하는 모든 이의 존엄과 몇천 년간 이어온 천하 강산의 흥망성쇠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시험인데, 이 모든 것이 저들에게 철저히 짓밟혔습니다.”
광서 순무 낙문의 목소리는 엄청난 호소력이 담겨 있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광서 순무 관아와 광서 포정사(布政使: 지방의 재정, 세금, 민사를 맡아보던 벼슬) 관아를 대표해 이번 과거시험 부정행위 사건과 진평을 음해하려 했던 모든 일을 끝까지 조사해 그 배후에 누가 있든,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든 반드시 그 죄를 물을 것임을 약속합니다.”
그러자 수천 명의 서생들이 손뼉을 치며 열렬히 환호했다.
“또한 이번 원시의 시험 성적은 전부 무효로 처리하고 다시 날을 잡아 시험을 치를 것입니다.”
서생들의 박수 소리가 더 열렬해졌다.
“진평은 어디 있는가?”
낙문이 관심 어린 친절한 목소리로 진평을 찾았다.
그러자 신분을 숨기고 변장을 하고 있던 동창 무사가 바퀴가 달린 의자를 밀며 진평을 낙문 옆으로 데려다줬다.
낙문이 허리를 숙이며 자상하게 물었다.
“진평, 이번에 자네가 쓴 원시 답안지를 보았네. 자네는 정말 놀라운 재능을 가진 인재더군. 시문은 정말 높은 수준의 글이었고 시사는 감탄을 금치 못할 문장이었네. 자네는 우리 광서의 자랑이네. 몸은 좀 어떠한가?”
“목숨은 건진 듯합니다.”
진평의 말에 낙문이 더 자상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게. 반드시 자네를 위해 정의를 실현할 것이야. 그리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자네를 치료해주겠네.”
낙문의 목소리는 매우 부드러웠으나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 천재 소년은 동창과 같은 편이며 결국 그의 적인 셈이었다.
낙문은 진평이 이번 생에 거인에 급제하는 일이 없도록 만들겠노라 다짐했다. 심지어 진평은 이미 중독되어 몸이 쇠약해진 상태이므로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번 사건이 잠잠해지면 여경사에게 은밀히 진평을 제거하라고 말해 놓을 생각이었다.
“감사합니다. 순무 대인.”
진평이 매우 공손하고 온화하게 공수하며 예를 올렸다.
“순무 대인,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낙문 순무가 진평에게 좀더 몸을 기울여 자상하게 말했다.
“말해 보게.”
진평은 용기를 내어 낙문의 귀에 대고 두변의 명령을 이행했다.
“제 주인인 두변이 이 말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필부 낙문, 한 방 먹은 소감이 어떠한가?’”
퍽!
비록 멀리 떨어져 있긴 했지만 두변은 순무 대인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인 셈이었다.
낙문은 순간 안색이 변해서는 더는 표정 관리를 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수만 명의 사람들이 보고 있으니 억지로라도 웃음을 지어야 했다.
낙문은 이런 상황에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낙문은 이문회만 아니면 두변 이 금수 같은 자식을 단숨에 짓밟아 죽여버렸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낙문이 느낀 분노의 감정은 그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었다. 봉강 대리인 자신이 저렇게 비천한 환관놈에게 뺨을 맞은 격이니, 이보다 더한 모욕은 없을 것이다.
낙문은 여전히 얼굴에 웃음을 지은 채, 동시에 더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진평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럼 너도 두변 그 망할 자식에게 전해라. 이문회가 잠시는 너를 지켜줄지는 모르겠으나 평생 지켜주진 못할 거라고. 그리고 진평 네놈도 마찬가지다.”
말은 마친 낙문은 계속 연기할 마음이 사라져 그대로 몸을 돌려 순무 관아로 들어갔다.
관아로 들어간 낙문은 더 이상 연기를 할 필요가 없게 되자 얼굴이 점점 흉악해지더니 이것저것 손에 닿는 대로 부수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계동앙과 축무애, 구양담 등의 수령들은 이를 지켜만 볼 뿐, 따로 그를 말리려 들지 않았다.
족히 일각 동안 분풀이를 한 낙문은 다시 평정을 되찾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한 얼굴로 돌아왔다.
“여봐라. 가서 여경사에게 말을 전하거라.”
낙문의 말에 축무애가 대꾸했다.
“따로 알릴 필요 없을 겁니다. 이렇게 큰일이 일어났는데 설마 임진교가 이를 모르겠습니까?”
“그가 이 일을 알고 있는 것과 내가 그에게 알리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이미 두변을 잡아들였을 테니 지금 그쪽에 알리더라도 늦었을 겁니다.”
“늦었는지 안 늦었는지는 임진교가 결정하겠지요.”
임진교는 광서 여경사 진무사 관아 안에서 이미 소식을 들은 후였다.
임진교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고 양손도 차갑게 변했다.
최씨 가문의 장원이 짓밟히고 불탔으며 낙문 등의 인물들이 태도를 바꿔 최가를 희생시킨 지금, 남은 곳은 여경사뿐이었다.
낙문, 계동앙, 축무애, 구양담은 아마 별일 없겠지만, 동창의 감옥을 건드린 여경사는 상황이 달랐다.
분명히 다 같이 악을 처벌하자고 뜻을 모았고 여경사가 먼저 돌격했는데, 오히려 나머지가 등 뒤에서 모두 해산해버린 상황이니 여경사는 정말 골치가 아파졌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들과 같이 이쯤하고 물러나야 하는가? 아니면 계속 밀어붙여야 하는가?
임진교는 이미 시작했으니 끝장을 보자는 생각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 별다른 고민도 하지 않고 계속 밀어붙이기로 했다.
무력에 익숙한 사람은 간혹 장기판의 졸과 같아서, 강을 건넌 후에는 물러설 수 없고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미 서로에게 원한을 갖게 된 이상 끝장을 보는 게 좋다는 판단이기도 했다. 결과가 어떻든 이번 일이 끝나면 광서의 여경사는 큰 변동을 겪게 될 것이었다.
“임원여 그쪽은 어떠하냐?”
임진교가 소리쳤다.
밖에 있던 여경사 무사들이 대답했다.
“이미 승기를 잡은 듯 보입니다. 아직 동창 감옥을 함락하지는 못했으나 임원여 대인께서 시간문제라고 했습니다.”
임진교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지더니 오싹한 느낌이 드는 어감으로 말했다.
“당장 임원여에게로 가서 두변을 생포할 필요 없으니 반 시진 내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두변을 죽이라고 전하거라.”
이전에 두변을 생포하란 명령이 이제는 죽이라는 명령으로 바뀐 것이다.
“알아들었느냐? 반 시진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두변 그 망할 놈을 반드시 죽여라.”
임진교가 소리쳤다.
“존명!”
여경사 무사들이 말을 타고 재빨리 계림 동창 감옥으로 달려갔다.
계림 동창 감옥에서는 격전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동창 무사들은 특유의 맹렬함과 지리적 우세를 이용해 열심히 싸웠으나, 아무래도 여경사의 9분의 1밖에 되지 않은 인원이었기에 세 시간 정도 격전을 펼치면서 점차 열세에 놓이기 시작했다.
양측 모두 사상자가 발생했다.
임원여는 의부가 두변을 죽이지 말고 생포해오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일을 처리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긴 했으나, 동창 감옥의 외벽 방어선이 곧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일단 외벽이 무너지게 되면 최연과 최병정을 구해내고 두변을 사로잡는 건 시간문제였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이삼이 두변 옆으로 다가왔다.
“소주인, 최대 이각을 끝으로 더는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곧 외벽 방어선이 뚫릴 것 같습니다. 여경사 무사들이 곧 들이닥칠 것이니 비밀 통로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저희가 소주인을 엄호하겠습니다.”
두변도 상황이 점차 뜻하지 않게 흘러감을 인지했다. 수많은 응시생과 군중이 순무 관아와 최씨 가문 장원을 포위하고 공격하면 상대방은 패배를 인정할 게 분명했지만, 여경사 무사들은 여전히 기세를 늦추지 않고 공격해 오고 있었다.
이번 싸움에서 두변이 이겼음에도 여경사는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것이다.
두변이 말했다.
“모두가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데 나 혼자 도망간다면 나중에 어찌 이들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겠나?”
사실이 그러했다. 자신의 명령에 복종한 백여 명의 형제들이 이 전투에 임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사상자까지 발생했는데, 만약 두변이 지금 전투에서 몸을 빼 도망친다면 동창의 위신은 크게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이삼이 말했다.
“하지만 외벽 방어선이 곧 뚫릴 것 같습니다. 외벽이 뚫리는 순간 우리는 지리적 우세를 잃게 되며 우리보다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니 소주인은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외벽 방어선이 뚫리면 우리는 즉시 지하 감옥으로 이동한다. 그곳은 공간이 매우 협소하니 저들도 무작정 머릿수로만 밀어붙이지 못할 거다.”
“하지만 우리가 지하 감옥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적들은 지하 감옥의 입구를 봉쇄해 버릴 겁니다. 우리가 방어하기 쉬운 만큼 적들의 손아귀에 놓이게 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만약 저들이 지하 감옥에 불이라도 지른다면 연기로 인해 상황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지하 감옥에는 우리 말고도 최병정과 최연 등의 인물이 있으니 저들도 웬만해서는 불을 지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단언하건대 임원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 반 시진 정도만 버티면 저들은 반드시 철수할 것이다.”
두변의 예측은 맞았다. 실제로 임진교는 임원여에게 반 시진의 시간밖에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동창 진무사 왕인도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면 반 시진이 되기 전에 병력을 보내 이들을 도와줄 것이다. 낙문과 축무애 등의 인물들이 이미 포기한 상황에서 왕인 혼자 고집을 피운다면 앞으로 그 혼자 이문회의 분노를 감당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