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장: 궁지에 몰린 왕인
왕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어서 동창 감옥으로 간다!”
“가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계림 천호소의 반역자들을 전부 죽입니까?”
의자 왕맹이 되묻자, 왕인이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가서 엄당 형제들과 우리 동창의 전우들을 구한다.”
이어 왕인이 직접 오백 명이나 되는 최정예 무사들을 이끌고 계림 동창의 감옥으로 향했다.
비록 마음속으로 두변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이문회의 분노를 감당할 자신과 여력이 없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왕인과 임진교 둘뿐이었다. 왕인은 즉시 위기에서 몸을 완전히 빼내고 두변을 구하는 척하면서 임진교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셈이었다. 임진교가 이문회의 복수를 혼자 감내하도록 해야 했다.
왕인은 두변을 구하러 가는 게 죽어도 내키지 않았지만, 이문회가 분노의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어서 서둘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임진교도 바로 빠져나갈 테니까.
그러나 두변에게 가는 길에 다시 최신 밀보를 듣게 되었다.
“왕 공공, 여경사 쪽이 철수하지 않고 오히려 불화살과 독유탄을 사용해서 더 강력하게 공격을 퍼붓고 있습니다. 보아하니 저들은 두변과 그 주변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려는 게 분명합니다.”
동창 밀정의 말에 왕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임진교, 아주 독하구나. 그래, 자네가 진정한 사내대장부지.”
왕인이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내리치며 기뻐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간다면 두변 그 금수만도 못한 놈은 반드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고, 이문회의 모든 원한은 임진교 혼자 감당하게 된다. 이문회는 임진교뿐 아니라 여경사 전체와 치열한 결전까지 벌이게 생겼는데, 그렇게 된다면 이문회가 왕인을 상대한 여력이 남을 것인가.
“전군은 제자리에서 휴식한다!”
왕인이 명령했다.
임진교가 퇴각하지 않고 두변을 죽이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왕인은 두변이 죽은 후에나 병력을 이끌고 가서 두변을 구하는 척하면서 여경사를 몇 죽이면 이문회도 자신에게 책임을 묻기 힘들 것이다.
“네가 가서 한번 살펴보거라.”
왕인이 자신의 심복에게 말했다.
“가서 두변이 죽었다는 걸 확인하면 그 즉시 깃발을 올려라. 그러면 내 즉시 병력을 이끌고 가겠다.”
“알겠습니다.”
왕인의 심복이자 밀정인 그는 말에 올라타 계림 동창의 감옥으로 달려갔다.
즉시 다른 환관 몇 명이 팔걸이의자를 가져오고 차를 마실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친 후 왕인이 편안히 차를 마시도록 시중을 들었다.
“의부, 이번에 두변 그 금수 같은 놈은 틀림없이 죽겠지요?”
의자인 왕맹이 아부하며 물었다.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봐야겠지.
임진교는 매우 모진 인물로, 검을 한 번 뽑으면 피를 보지 않고는 다시 검집에 꽂지 않는 성격이지. 졸에 불과한 임원여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구나. 임진교가 정말 대단해.”
“그렇다면 두변이 죽은 후에 이문회는 여경사와 끝을 보자고 전쟁을 벌이겠군요.”
왕맹의 물음에 왕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된다면 이문회가 의부를 귀찮게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도움을 요청해 올 수도 있겠습니다.”
왕인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 나 대신 앙심을 사게 되니, 참으로 좋구나!’
하지만 불과 이 각도 지나지 않아서 그 밀정이 다시 돌아왔는데 표정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며 군마는 땀에 흠뻑 젖은 모습이었다. 그는 왕인의 앞에 이르기도 전에 말 등에서 굴러떨어지듯 뛰어내렸다.
“진무사 대인, 큰일 났습니다. 옥진 군주가 병사를 이끌고 여경사 무사를 모조리 죽여버렸습니다.”
왕인이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바닥에 세게 집어 던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럼, 두변은 죽었느냐?”
“두변은 살아 있습니다.”
밀정이 대답했다.
순간 왕인은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온몸의 솜털이 쭈뼛거리며 모두 곤두섰다.
망했다! 망했어!
왕인에게 최악의 상황이 펼쳐졌다.
옥진 군주는 황제가 친히 책봉한 만큼 그녀를 많이 아꼈고, 그녀가 아는 것은 곧 황제가 아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늘 여경사가 무기를 사용해 동창을 공격한 상황을 이미 옥진 군주가 본 이상 누구도 감히 이 사실을 은폐할 수 없었다.
이문회는 여경사의 임진교와 임원여 둘 중 누구와도 직접 대결할 필요가 없었다.
여경사가 범한 천하의 대악을 황실 사람이 봤으니 황제가 친히 그 죄를 물을 것이고, 이문회가 나설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문회는 누구의 죄를 물을 것인가? 이문회의 살기와 엄청난 힘은 누가 감당해야 하는가?
일찍이 몸을 뺀 낙문은 아닐 테고, 이미 버려진 최씨 가문도 아닐 것이며, 오직 왕인만이 이문회의 분노를 홀로 감당해야 했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이동하던 폭탄이 결국 왕인의 손에서 터져버린 것이다.
왕인은 이번 투쟁에서 주변인 역할을 맡았을 뿐이나, 결국은 이문회의 복수의 표적이 되어버렸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왕인은 혼절할 것만 같았다.
“어서 서둘러라. 전 병력은 최대한 빨리 두변과 동창 형제들을 구하러 간다!”
왕인은 크게 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군마에 올라 계림 동창 감옥을 향해 내달렸다.
그는 하늘이 자신을 보우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여경사의 병력이 완전히 패망하지는 않고 어느 정도 남아있어서 자신이 이들과 전투를 벌여 이문회에게 변명할 거리를 남겨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왕인이 이끄는 병력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여경사뿐 아니라 옥진 군주도 자리를 떠나고 없는 상태였다.
왕인은 즉시 말 등에서 굴러떨어져서는 눈물을 글썽이며 두변을 향해 달려갔다.
“조카, 다친 곳은 없느냐? 네가 위험에 빠졌다는 말을 듣고 내 즉시 병력을 이끌고 왔다. 하늘이 너를 가엾게 여겼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문회를 볼 낯이 없었겠구나.”
왕인 공공의 연기가 상당히 그럴듯했으나 두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왕 공공, 늦으셨습니다. 제 곁에 남은 사람을 없애려고 계림 동창의 인원들을 진무사 관아로 집결시키라 명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는 너무 명백한 사실이니 변명하실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더욱이 왕맹은 왕 공공의 의자이지 않습니까? 그가 제 주변의 모든 이들을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갔었습니다.”
왕인이 손짓을 하며 왕맹을 불렀다.
“왕맹, 이리 와보거라.”
왕인의 의자 왕맹이 즉시 앞으로 나왔다.
“얼른 두변에게 사죄하거라.”
왕맹은 한없이 내키지 않았으나 그래도 공손히 예를 갖추며 허리를 숙였다.
“내가 잘못했네. 자네가 용서해 주게.”
두변이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어떻게 해주면 좋겠는가?”
왕인이 웃으며 묻자, 두변도 웃으며 대답했다.
“왕맹은 왕 공공의 의자니 매우 아끼시겠지요?”
“왕맹이 평소에 효심이 깊으니 내가 가장 아끼는 의자라고 할 수 있지.”
“그러면 왕 공공께서 직접 의자를 죽이십시오. 그런 다음에 계속 얘기를 이어가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인의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속에서 분노가 치솟았다.
당당한 동창 진무사가 환관 학원의 한낱 학생에게 자신의 의자를 직접 살해하라는 협박을 받고 있다?
왕인이 두변의 말을 따른다면 동창에서 그의 체면은 어떻게 되겠는가?
게다가 왕맹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몇 안 되는 실권을 가진 천호 중 한 명이었다. 왕맹을 죽이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팔을 자르는 것과 같은 행위였다.
두변이 탄식하며 말했다.
“죽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물론 제 의부는 제가 원하는 것은 그 어떤 요구라도 다 들어주시지만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제가 뭐라고 의부가 광서에 없는 틈을 타 이런 일을 벌이셨겠습니까?”
두변은 적나라하게 왕인을 위협하고 있었다.
얼굴 근육이 떨리기 시작한 왕인은 이를 꽉 깨물고 단검을 뽑아 들어 의자인 왕맹에게 걸어갔다.
왕맹이 식겁하여 외쳤다.
“의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왕인이 말했다.
“사람이 잘못했으면 마땅히 그 벌을 받아야 하는 법이니라.”
푹!
굴욕적이게도 광서 동창의 수령인 왕인은 자신의 의자인 왕맹의 심장을 향해 단검을 찔렀다.
윽!
현장에 있던 이들이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전혀 믿을 수 없다는 듯 왕인을 쳐다봤다.
그 위풍당당한 광서 동창의 수령이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이 가장 아끼는 의자를 죽인 것이다.
사실 광서 동창은 거의 이문회의 천하였기에, 왕인의 의자이면서 실권을 쥔 천호였던 왕맹 같은 인물은 그 수가 별로 없었다.
왕인이 직접 자신의 의자를 죽이는 것은 자신의 팔을 자른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제 누가 왕인에게 몸을 의탁할 수 있으랴?
원래도 왕인은 광서 동창 세력 중에 소수파에 속했으나, 이제는 수중에 남은 친위대 말고는 그 어떤 세력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두변이 정말 무자비하구나! 왕인이 스스로 자신의 기반을 무너트리도록 했으니!
물론 왕인도 결정적인 순간에 잔인한 조치를 했으니 두변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왕인이 매섭게 소리쳤다.
“누구든 잘못을 저지른 자는 응당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게 설령 내 의자라 해도 예외는 아니다!
나는 분명 왕맹에게 계림 동창 천호소의 무사들을 이끌고 두변을 도와 최연과 최병정 등 과거시험 부정행위 사건에 연루된 죄인과 증인들을 진무사 관아로 이송하라고 명령했다. 진무사 관아에 들어오기만 하면 안전이 보장되니 말이다. 하지만 왕맹이 여경사와 입을 맞춰 두변을 호위해야 하는 동창 무사들을 전부 불러들여 두변을 사지로 몰려고 했더구나.”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왕맹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왕인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봤다.
그리고 아직 숨이 붙어있던 왕맹은 다른 이들보다 더 경악해서는 의부를 쳐다봤다. ‘당신이 내린 명령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저를 죽이다니 정말 매정하십니다. 왜 내가 당신의 잘못을 지고 떠나야 합니까?’
“동창의 고위 관료이면서 적과 결탁했으니 죽어 마땅하다!”
왕인이 목소리를 높이며 왕맹의 가슴을 향해 다시 한 번 단검을 찔렀다.
푹! 푹!
왕인은 자신의 얼굴과 손을 피로 물들이고 나서야 손을 멈추었다.
왕맹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왕인이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두변을 보며 물었다.
“조카, 이제 만족하느냐?”
두변이 웃으며 말했다.
“왕 공공, 역시 가풍이 엄격하시군요. 이 모든 걸 제 의부께 그대로 말씀드리지요. 왕맹과 여경사가 결탁해 저를 음해하려 한 것이지 왕 공공의 명령은 아니라고요. 그리고 결정적일 때 왕 공공께서 저를 구하려 병력을 보내주셨다고도 전하겠습니다.”
사실 이문회는 왕인이 자신의 의자를 죽인 것이 희생양을 만들어 자신의 몸을 빼내려는 속셈이라는 걸 다 알 테니 두변이 뭐라고 말하든 크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왕인이 온화하게 웃어 보였다.
“모두 같은 동창의 일원인데 당연한 일을 한 것이지. 조카도 무사하니 같이 돌아가는 게 어떠한가?”
두변이 허리 숙이며 대답했다.
“왕 공공 먼저 가시지요.”
왕인은 몸을 돌려 마차에 올랐고, 진무사부로 향했다.
동창 진무사부에 도착한 왕인의 안색은 더없이 창백했다.
“치욕이다! 치욕도 이런 치욕이 없구나. 앞으로 나 왕인이 동창에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단 말이냐? 내 평생 쌓아온 명예였거늘!”
한바탕 소리를 지른 왕인은 격렬한 기침에 서둘러 손으로 입을 막았다. 기침을 끝내고 잠시 후 손을 살펴보니 손바닥이 새빨갛게 피로 물들어 있었다.
방금 두변의 압박에 못 이겨 자신의 의자인 왕맹을 살해했으니 속에 쌓여 있던 분노가 밖으로 분출되지 못해 내상을 입게 된 것이다.
왕인은 얼른 차를 마시며 화를 누그러트린 후 비단 수건을 꺼내 손을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