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83화 (83/648)

제83장: 여경사는 참극을 맞이했다.

“연협, 들어오너라.”

그러자 중년 환관 하나가 들어와 왕인 앞에 엎드렸다.

“아버님, 건강 잘 챙기셔야 합니다.”

이자는 왕인의 심복인 가복 연협으로, 왕인을 30년이나 따른 의자이나 아무런 직무도 맡지 않은 채 오로지 왕인을 밀착 수행했다.

왕맹과는 이해관계로 엮였다면, 연협은 진짜 가족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왕인이 말했다.

“사람을 보내 내가 광서에 오래 있지 못할 것 같다고 당엄에게 일러주고, 저들에게 광서에서 이문회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을 마련해 놓으라고 말하거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당엄에게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 두변을 찍어 누르라고 말해두거라. 절대로 두변이 졸업 시험에서 눈에 띄게 놔두어선 안 될 것이야. 그놈은 호랑이다. 다 자라고 나면 이문회보다 더 악독한 놈이 될 것이다.”

이전에 두변이 아무리 금기서화와 시사가부에 능하다 할지라도 특별히 개의치 않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연합했으면서도 환관 나부랭이 하나 감당하지 못하고 처참히 패배하고 말았다.

왕인이 탄식하며 말했다.

“이문회는 자신만의 규율은 지키는 사람이지만 이 두변이란 놈은 악독하기 그지없는 데다 배짱도 있고 머리도 제법 잘 돌아가 당해낼 재간이 없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그놈을 찍어 눌러야 한다.”

“알겠습니다. 당엄 공자에게 한 자도 빠짐없이 그대로 말을 전하겠습니다.”

연협이 말했다.

“만약 이번에 두변을 찍어 누르지 못한다면 10년 후에는 엄당이 두변의 손에 떨어질 것이야. 만약 그렇게 된다면 모두에게 지옥이 펼쳐지겠지.”

“명심하겠습니다.”

연협이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왕인은 안쪽으로 들어가서 비밀 문을 열고 밀실 앞에 섰다.

이 밀실은 왕인의 가장 은밀한 곳이었다. 밀실로 들어간 그는 그 안에 있는 홍목 함을 꺼냈다. 함을 열자 그 안에는 은표가 한 다발씩 보관되어 있었다. 이는 왕인이 횡령 등의 필사적인 방법으로 한평생 모은 재산이었다.

왕인은 쓰라린 가슴을 움켜쥐며 꽤 두터운 은표 한 뭉치를 꺼내는데, 보아하니 몇백 장은 되는 두께였다.

“내 한평생 모은 은자 삼십만 냥이다.

나는 섣불리 움직일 수 없으니 네가 이 은자를 가지고 경성으로 가서 사례감의 장인(掌印) 태감이나 병필(秉筆) 태감에게 뇌물을 좀 쥐여주어 반드시 내 품계에 변동이 없게 만들어야 한다. 내 비록 이문회와의 충돌을 피해 광서를 떠나야 하지만 황릉이나 지키며 여생을 보내고 싶진 않구나. 게다가 몇 년 있으면 은퇴하는데 그전까지는 이 자리를 지키고 싶다.”

연협이 눈시울을 붉혔다.

“의부,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당연히 그럴 가치가 있지. 은자는 나중에 다시 모을 수 있지만, 권세는 한번 놓치면 은자까지도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니 말이다.

내 지난날 기를 쓰고 은자를 모은 것이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권세를 쥐고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왕인이 탄식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연협이 말했다.

광서 여경사 진무사 관아.

임원여는 내실에 꼿꼿이 꿇어앉아 있었고, 진무사 임진교는 자신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둘은 미동도 없이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침묵을 깨고 임진교가 입을 열었다.

“백옥경이 진평을 잡고 두변이 우리 여경사 백호와 총기를 죽였을 때, 그놈은 이미 순무 관아와 최씨 가문의 장원을 공격하도록 계획했다는 것이냐?”

임원여가 대답했다.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아주 치밀하게도 계획을 세워놨구나. 고작 열여덟의 나이에 이처럼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 자를 본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임진교의 물음에 임원여가 대답했다.

“자신의 힘이 부족할지라도 주변 상황을 잘 통제해서 수만 명의 여론을 선동해 정의라는 명분을 세웠구나. 정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치밀한 계획이다. 과연 이문회가 그렇게 아끼고 전적으로 지원해주는 이유가 있었구나.”

임원여가 말했다.

“이번에는 주변 세력들이 도와줬을 뿐이지 두변은 아직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다음번엔 이런 행운이 따르지 않을 것이니 두변이 일단 저희 수중에 떨어지기만 한다면 그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겁니다.”

임원여의 말에 임진교가 탄식했다.

“두변은 우리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두변이 계속 성장해 나가도록 보고만 있을 수가 없구나. 그렇지 않으면 이문회보다 더 무서운 괴물이 될 것이야.

그런데 우리는 눈앞에 닥친 시련도 극복하기 어렵겠구나. 당파 간의 내분에 투석기와 독유탄까지 사용했으니 천하의 대악을 범한 셈이다. 두변을 포함한 모두를 몰살시켰다면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 수 있었을 텐데 하필 옥진 군주가 보았으니 이 일을 묻어두기란 불가능하겠다.”

임원여는 그저 머리를 바닥에 조아릴 뿐 따로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처럼 위험한 도박을 했으니 후회를 하면 안 되겠지.

다만 이 일로 너까지 억울하게 되었으니 미안하구나.”

임원여가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저도 일이 실패하면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임무를 끝까지 완수하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두변을 죽이기 위해 투석기와 독유탄을 사용하기로 한 것은 전부 제가 독단적으로 내린 결정이고 의부와 전혀 관계없는 일입니다.”

“네가 내린 결정에 암묵적으로 동의했으니 나도 책임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의부를 위해 제가 모든 짐을 짊어지고 싶습니다.

의부의 앞날이 보장된다면 희망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죽어도 좋으니 다만 의부께서 권세를 잃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임진교의 두 눈이 붉어졌다.

“내가 네게 몹쓸 짓을 하는구나.”

임원여가 눈물을 머금고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소리쳤다.

“의부는 제게 하늘과도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니 이 목숨으로 의부의 짐을 덜어드릴 수 있다면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네 아들을 친손자처럼 키우며 네 아내는 여식처럼 여겨 보살피고 네 부모는 형님처럼 대해주마.”

“감사합니다, 의부.”

임원여가 여러 차례 머리를 조아리더니 잠시 후 품에서 서신을 한 통 꺼냈다.

“이것은 제 죄를 자백하는 진술서입니다. 아버지께서 경성 여경사에 올려주셨으면 합니다.”

임진교가 서신을 받아들고는 조심스럽게 품속에 넣었다.

“아들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항상 몸조심하십시오.”

임원여는 재차 고개를 숙였다.

임진교는 임원여에게 허리 숙여 절을 한 뒤 밖으로 나왔다.

문을 나온 임진교는 쏟아지는 눈물을 더는 참지 못했다.

왕인이 왕맹을 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어렸을 때부터 임원여를 정말 친아들처럼 대해왔다. 그는 임원여의 선생이자 아버지였다.

방 안에 있던 임원여는 꼿꼿이 꿇어앉은 채로 앞에 놓여 있던 술잔을 단숨에 비운 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날이 퍼렇게 선 단검을 조용히 뽑아 들었다.

“패자는 군말 없이 떠납니다.”

임원여는 담담하게 이 말을 내뱉고는 검날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의 눈빛이 더 결연해졌다.

“두변, 내가 먼저 간다. 저승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임원여는 단검을 높이 들어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푹!

일 척쯤 되는 단검은 임원여의 심장을 관통해 몸을 뚫고 나왔다.

광서 여경사 진무사 임진교의 의자이자 광서에서 가장 어린 만호인 임원여가 죽은 것이다.

안에서 쿵, 하고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를 들은 임진교는 괴로운 신음을 쏟아냈다.

“아!”

마치 상처를 입은 야수처럼 처절한 신음이었다. 그가 가장 아끼는 의자이자 후계자인 임원여가 이렇게 죽은 것이다.

임원여는 임진교를 위해 모든 책임을 지고 죽음을 택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울부짖음이 반 각이나 계속된 후, 임진교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서 백옥경을 데려오너라.”

잠시 후 계림 여경사 천호 백옥경이 임진교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안색이 창백한 백옥경은 차마 용서해 달라는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백옥경, 이 모든 게 다 네 탓이다.”

임진교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는 여경사의 인원이지 최씨 가문의 개가 아니다. 최연이 부정행위를 저지르고 최병정이 진평을 음해하려는 게 명백했음에도 저들을 도와 두변을 잡으러 간 것이더냐?”

임진교는 고함을 지르지 않았지만, 백옥경은 두려움에 오줌을 지릴 뻔했다.

“만약 네가 진평을 잡으러 가지 않았으면 두변도 여경사의 백호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도 복수할 필요가 없었을 테지.

임원여가 죽고 사백 명이 넘는 여경사 형제들이 유명을 달리했다. 나 또한 경성으로 가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이 참혹한 결과의 원흉은 바로 너인데, 내 너에게 어떤 벌을 내려야 할까.”

백옥경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계속 조아렸다.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대인!”

임진교가 제 요대를 풀었다. 요대 위에는 금과 은이 박혀 있어 무려 무게가 네댓 근이 넘었다.

퍽!

임진교가 요대로 백옥경의 머리를 내려쳤다.

원래도 무공이 강한 임진교가 내력을 실어 내리치자, 그 일격에 백옥경의 머리뼈가 산산조각 나면서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임진교가 울부짖으며 계속해서 요대를 휘두르며 가슴속에 쌓인 분노와 고통을 토해냈다.

퍽! 퍽! 퍽!

얼마나 내려쳤을까. 백옥경은 결국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음 날 아침.

최연, 최병정, 최야와 시험 감독관 세 명, 그리고 학정 오삼석의 가복인 오전이 순무 관아로 이송되어 군중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 사건은 이미 광서 전체를 뒤흔들었기에 재판에 어떠한 세력의 개입도 불가능했다. 낙문이 직접 사건을 심리하여 재판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야말로 대녕 왕조의 법 집행의 기본 틀을 철저히 준수했다.

한 시진이 조금 넘자 심리를 끝내고 판결이 나왔다.

학정 오삼석의 시종인 오전은 뇌물을 받고 시험지를 유출했지만 스스로 죄를 고백하고 받았던 뇌물을 다시 내뱉은 것을 고려하여 장형 50대를 맞고 삼천 리 밖으로 추방당했다.

시험 감독관 셋은 성자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군주의 은혜를 저버리며 신성한 과거시험에서 뇌물을 받으며 부정행위를 도왔기에 그 죄가 막중하니 모든 관직을 박탈하고 가산을 몰수당하며 징역 10년에 처해졌다.

응시생 최연은 과거시험에서 부정행위를 저지른 죄로 모든 공명을 박탈당하고, 평생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며, 팔천 리 밖으로 추방당했다.

최병정은 과거시험 부정행위 사건에 가담하고 진평을 모살하는 데 가담한 죄가 절대 가볍지 않아 참감후(斬監候: 사형 선고를 받은 범죄자에 대해서 즉시 집행하지 않고 감금해 추심이나 재심을 기다리는 것)가 선고되었다.

한밤중의 여자 감옥.

가주 최현은 최병정을 보러 감옥을 방문했다.

물론 참감후란 현대 세계에서의 사형 집행 유예에 해당했기에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처형당하지는 않고 만 리 밖으로 추방당해 변군(邊軍)의 노비가 될 확률이 가장 높았다.

“우리 집은 불타고 약탈당해 온전한 곳이 없다.”

“아버지, 죄송해요.”

최병정이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할 것 없다. 우리가 토호라는 역할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세상 무서운 줄 잊은 탓이지.

비록 나는 네가 사람을 보내 진평에게 독을 쓰려 했다는 사실은 몰랐으나, 알았다 하더라도 너를 막지는 않았을 거다. 다만 더 은밀하고 확실한 방법을 찾았겠지.”

최병정이 울며 말했다.

“저는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두변이 이리도 잔인하게 복수할 줄 몰랐어요.”

“나도 미처 생각지 못했구나. 우리 모두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다.

두변은 아직 어리지만, 수법이 매우 잔인하더구나. 네 오라비는 앞으로 몇 년 동안 회시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었고 네 숙부인 최암은 3~5년 동안 진급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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