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93화 (93/648)

제93장: 또다시 시련이

“천리마를 약탈해 간 사람들은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았느냐?”

두변이 물었다.

“주인께서 동창 밀정 다섯을 일반 상인으로 변장시켜 천리마를 구해오라고 시켰습니다. 그들 무공도 상당한 편인데 천리마를 약탈당한 걸 보면 상대방이 더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다섯 명도 모두 납치당해서 전서구만 돌아왔습니다. 서신에는 군선에 돛대가 두 개 달렸고, 상대방은 무공이 강하답니다. 약탈당한 위치는 광서에서 삼백 리 떨어진 바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쾌속선을 사건 현장으로 보냈을 때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고, 상선과 군마를 약탈해 간 군선 모두 온데간데없었습니다.”

돛대가 두 개인 군선이라고?

그럼 해적은 아니지. 그건 수군이나 시박사에서만 볼 수 있는 군선이니까.

상황을 종합해 보니 당엄의 배후를 봐주는 광동 엄당 세력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광동 시박사를 찾아가 사람과 말을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저들이 부인하면 그만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문회가 경성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진무사 왕인은 적이고, 이문회의 세력은 우두머리가 없는 상황이었으니 광동 시박사가 두변을 무시할 게 자명했다.

물론 광동 시박사가 주동자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당엄의 배후 세력이 개입했을 거라는 심증이었다.

“군마를 수송하는 동창 무사들이 타고 있던 상선은 누구 것이냐?

그 상선부터 시작해서 조사를 시작하면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누가 천리마를 가져갔는지 알아내거라.”

이삼이 대답했다.

“상선 주인에 대해서는 이미 조사를 했습니다. 바로 오주부 대해상 오정도입니다. 괜한 경계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따로 행동은 취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오정도의 신분이 좀 특별합니다.”

“특별하다고? 무슨 말이지?”

“그의 아들이 아내로 맞이한 여자가 바로 소주인의 누이인 두평아입니다.”

두변은 경악했다. 평아 누이의 시댁은 오주부 몽산현의 대주재(大財主: 부호)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뜻밖에도 대해상인 데다, 동창을 도와 천리마를 운반해준 상선의 주인이었다니!

이건 우연인 건가? 아니면 이 속에 다른 음모가 숨어있는 건가?

두변은 이전에 평아에게 그녀를 보러 오주부에 가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으나 바쁜 나날이 계속 이어진 탓에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결국 평아의 시댁으로 갈 기회가 생기긴 했으나 이런 일로 가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몽산현에 있는 오정도의 집으로 가자.”

“알겠습니다, 소주인.”

두변은 이삼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마차를 타고 연화사를 떠나 몽산현으로 향했다.

기마술 시험에서 만점을 목표로 하는 두변이지만, 말에 올라탈 수는 있어도 빠르게 몰 수는 없는 실력이니 마차를 탈 수밖에.

몽산현은 오주부에서 삼백 리나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두변을 태운 마차가 최대한의 속도로 길을 재촉했음에도 십여 시간이 지나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날은 이미 밝아 있었다.

아무 행인이나 붙잡고 물어도 오정도의 집이 어딘지 모두 알 정도였으니, 오정도를 몽산현의 대주재라고 칭할 만했다.

어렸을 때 평아가 계화당을 좋아했었다는 게 기억 난 두변은 길거리에서 계화당(桂花糖: 물푸레나무 꽃을 넣어 굳혀서 만든 사탕) 두 봉지를 사들고 오정도의 장원으로 향했다.

수십 리를 걷고 나니 큰 저택이 두변의 눈에 들어왔다.

저택은 장원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담장이 우뚝 솟아 있고 그 크기가 몇십 묘나 되는 것이, 평아가 부잣집으로 시집간 건 확실한 듯했다.

두변이 말했다.

“너희들은 잠시 여기서 기다려라. 먼저 누이를 만나본 후에 천리마를 약탈당한 일을 조사하고 싶다.”

“알겠습니다, 소주인.”

이삼이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두변은 밤새 먼 길을 달려온 데다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해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오씨 저택의 대문에 이르자 가노 두 명이 문을 지키고 있었다.

가노가 말했다.

“무슨 일이시오?

여기서 볼 일 없으면 그냥 돌아가시오. 괜히 얼쩡대지 마시고.”

가노의 말이 그런대로 공손하긴 했으나, 눈길은 그다지 공손하지 않은 것이 거지를 내쫓는 듯한 눈빛이었다.

두변이 말했다.

“귀댁의 소부인을 뵈러 왔습니다. 난 소부인의 동생입니다.”

이 말을 들은 가노는 저도 모르게 두변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내 아뢰고 올 터이니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오.”

“알겠습니다.”

두변은 밖에서 기다렸다.

몇 분이 지나고 가노가 다시 대문 밖으로 나왔다.

“나를 따라서 오시지요.”

두변은 가노를 따라 평아의 부잣집 시댁 안으로 들어갔다.

장원의 내부는 외부에서 볼 때와 마찬가지로 호화스러웠다. 하지만 원림 건축 기술을 속성으로 배운 듯, 값이 나가는 화초와 장식품을 죄다 배치해 놓은 것이 깊이도 부족했을뿐더러 기품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가노가 두변을 데리고 편청으로 안내했다. 이자가 두변을 본청으로 안내하지 않고 편청으로 안내하는 걸 보면 그를 그다지 존중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손님을 접대하려면 당연히 본청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닌가.

“앉으시지요. 여기서 잠시 기다리면 곧 누군가 올 겁니다.”

그는 두변에게 저렴한 차를 한 잔 건네주었는데 목이 말랐던 두변은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가노는 다시 저렴한 간식들을 내어왔고 밤새 배고픔에 시달렸던 두변은 간식들을 단숨에 먹어 해치웠다.

이를 지켜본 가노의 눈가에 경멸의 빛이 더욱 짙어졌다.

두변이 음식을 먹고 있는데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화려한 옷을 입은 부인이 관사를 거느리며 걸어들어왔다.

“어서 부인께 인사를 올리시지요.”

옆에 있던 가노가 두변에게 말하고는 먼저 허리 숙여 인사를 올렸다.

“부인을 뵙습니다. 이자는 소부인의 동생이라고 합니다.”

대략 쉰 정도로 보이는 부인은 풍만한 몸매로, 오정도의 아내이면서 평아 누이의 시어머니일 것이다.

두변은 입안에 든 음식물을 씹으면서 차를 들이켠 다음 오 부인을 향해 공수했다.

“부인을 뵙습니다.”

“앉아서 계속 드시게.”

오 부인이 말했다.

두변을 대하는 태도가 친절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그리 거만한 것도 아니었다.

“계림에서 온 건가요?”

오 부인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먼 길을 오셨군요. 그래,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제 누이를 만나보러 왔습니다.”

오 부인이 손짓하니 옆에 있던 이가 은자를 가지고 왔다.

“평아가 늘 친정집에 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해왔습니다. 당신네 집이 평아의 도움으로 먹고산다는 걸 비밀로 해주겠어요. 그러니 평아를 만날 생각은 하지 말고 은자 백 냥을 들고 계림으로 돌아가 주세요. 평아는 만날 필요도 없습니다.”

두변은 당황했다. 지금, 내가 돈이 부족해서 왔다고 생각하는 거지?

“왜? 부족한가요?

이만하면 된 것 같은데요. 당신네 집안은 내가 딱 싫어하는 가문이라 사돈을 맺을 생각도 해본 적이 없지만, 우리 아들이 평아가 아니면 장가를 안 가겠다고 하니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평아가 똑똑하고 지혜롭게 굴어 내 일손을 덜어 주기에 며느리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겁니다. 그래서 평아가 은자를 친정집에 보내오는 걸 묵인해준 건데 당신들은 요구가 한도 끝도 없군요. 우리 집에서 당신네 가족들에게 돈을 갖다 바칠 의무는 없다고 봅니다만.”

두변은 더욱더 당혹스러웠다.

“평아는 한 달 전쯤에 큰 명절도 아닌 칠석날 친정집에 갔길래 한번 크게 혼냈었습니다.

그래서 평아한테 2년에 한 번만 친정집에 갈 수 있다고 못을 박아 놨습니다. 매일같이 친정집에다 은자를 실어나르니, 이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당신네 부모들도 그렇고 동생인 당신도 사지가 멀쩡한 것 같은데 우리 오씨 가문에서 금전적 지원을 해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 오씨 가문이 돈이 좀 있다고 해도 아무나 돕는 집안은 아니잖아요.”

지금까지 두변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안을 줬으면 줬지, 이렇게 속절없이 당한 적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평아를 책벌했다고 하니, 두변은 적잖게 당황했다.

“마지막 은혜라고 생각하고 은자 백 냥을 가지고 돌아가시고, 평아를 볼 생각은 접으세요. 어차피 평아를 보려는 목적도 은자 때문일 테니까요. 이십여 일 전에도 평아가 당신네 집에 은자를 갔다 주었을 텐데요.”

오 부인이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당신도 오늘부터 다시는 우리 집에 오는 일이 없었으면 하네요. 내가 평아를 며느리로 인정한 건 사실이지만 낯짝 두꺼운 당신네까지 가족으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습니다.

여봐라. 어서 손님을 배웅해 드려라.”

말을 마친 오 부인은 두변을 최대한 공손하게 내쫓으려고 했다.

나 두변을 돈이나 얻어가려는 몰상식한 동생으로 본 것도 모자라 쫓아내려고 해?

원래 평아의 체면을 생각해 최대한 예의를 갖추며 행동할 생각이었지만 예상치도 못하게 무안을 당하는 바람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얼굴이 창백해진 두변은 그대로 몸을 돌려 이삼에게 오주부의 동창 천호소로 보내 병력을 끌고 와 오씨 가문의 가산을 몰수하라고 시킬까도 생각했다.

‘일개 해상이 감히 광서 동창의 소주인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나를 모욕하다니. 정말 사는 게 지겨운 게지!’ 두변은 평아를 이 집에서 계림으로 데려가서 충분히 호화스러운 삶을 살게 해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때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중년 사내가 놀란 낯빛으로 뛰어오더니 멀찌감치서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형수, 큰일 났습니다. 큰일 났어요. 우리 상선이 시박사와 광서 수군에 압류되었습니다. 형님과 조카도 붙잡혀갔습니다!”

두변은 즉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뭐? 광서 시박사에서 상선을 압류해갔다고? 광동 시박사가 아니야?’

광동 시박사는 당엄의 배후에 있는 엄당 세력의 기반이기 때문에 주체가 광서냐 광동이냐는 큰 차이였다.

광서 시박사(市舶使: 시박사의 장관역) 손임 공공은 이문회와 같은 편이 아니긴 하지만, 이문회와 대적할 정도로 담이 큰 인물이 아닌 데다 이제 예순이 다 되어 은퇴할 시기를 앞두었기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광서 시박사는 광동에 비할 바가 못 되며, 그 직책이 요직도 아니었기에, 이문회의 지위에 한참 못 미쳤다.

오 부인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얼굴이 창백해지며 몸을 가누지 못하고 크게 휘청거렸다.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오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선박에는 은자 삼십만 냥은 족히 되는 십여만 섬의 소금과 몇천 근의 고려 인삼이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물건이 많이 실려 있는데 이것들을 다 배상해주고 나면 우리 집은 기둥이 뽑힐 것이다.”

그 배가 밀수품을 실어 나르는 상선임은 틀림없을 테지만, 뜻밖에도 은자 몇십만 냥 이상을 거래하는 걸 보니, 해상 밀수꾼들이 정말 기승을 부린다고 할 만했다.

물론 이는 대녕 왕조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어서, 세금을 꼬박꼬박 낸다면 오히려 바보 취급당하기 일쑤였다.

사건의 경위가 이러하다면 두변의 천리마가 약탈당한 것이 그저 재수 없었던 것이었을까? 광서 시박사가 밀수꾼들을 잡아들이는 과정에서 두변의 천리마도 같이 압수된 것일까?

이렇게 보면 이 사건에 음모도 없을뿐더러 당엄의 배후에 있는 세력이 나서서 만든 일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두변의 신경이 너무 곤두선 나머지 음모론에 빠져든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두변이 나설 필요도 없이 그저 오주의 동창 천호를 시켜 시박사를 찾아가 심지어 적당한 보상금까지 받고 천리마를 되찾아오라고 시키면 끝날 일이었다.

광서 시박사를 관장하고 있는 손임 공공은 사건사고를 싫어하는 사람으로, 실수로라도 이문회의 천리마를 압수했다는 걸 알면 즉시 계림까지 와서 사과할 것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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