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장: 혈관음과 쌓았던 잊지 못할 정
이문회는 자기 자신은 매우 검소하게 생활했으나, 아랫사람들이 사치를 부리는 것까지 간섭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모든 사람이 자신처럼 제국을 위해 전심전력 헌신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두변도 나라와 백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개인의 생활을 향유하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임 백호는 허리를 숙여 은 젓가락 한 벌을 받든 후에 기대하는 눈빛으로 두변을 바라봤다.
두변이 어순(魚唇 : 상어 입술 부근의 연골 말린 것)을 입에 넣고 음미했는데 과연 맛이 일품이었다. 딱딱하지 않으면서도 식감이 뛰어난 이런 재료를 음식으로 만들려면 물고기 한두 마리로는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어순을 먹고 난 두변은 임 백호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소주인께서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임 백호가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임 백호, 같이 드시지요.”
“아니, 아닙니다. 제가 어찌 소주인과 겸상을 하겠습니까?”
“환관 학원을 졸업하고 순조롭게 동창에 들어간다 해도 총기일 텐데, 그때는 임 백호가 제 윗사람입니다. 앉아서 같이 드시지요. 계속 서 있으니 불편합니다.”
“저희는 이문회 대인을 모시는 사람이니, 저와 소주인의 관계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겁니다.”
“어서 앉으세요.”
두변이 딱 잘라 말했다.
“알겠습니다.”
임 백호가 허리를 굽힌 뒤 자리에 앉았으나 엉덩이를 의자에 갖다 대었을 뿐 편하게 앉아있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두변은 마음이 아려왔다.
두변은 낮에서 밤까지 계속해서 <수어록 기마편>을 읽으며 영종오가 묘사한 군마의 정신파에 흠뻑 빠져있었다.
오주부에서 염주부까지는 800리나 되니, 종정은 아무리 빨라도 내일 오후에나 도착할 것이다.
두변은 오늘도 꿈을 꾸지 않았다.
참 희한한 일이었다.
왜 다시 꿈의 세계로 진입해 <수어록 기마편>을 공부할 수 없는 걸까.
두변은 한밤중에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소주인, 소주인! 소주인의 숙면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임 백호가 다급히 외쳤다. 임 백호가 두변의 잠을 방해했다는 건 무언가 급한 일이 생겼다는 뜻이리라.
“무슨 일입니까?”
“종 공공께서 전서구를 보내 오셨습니다.”
그는 허리를 굽히더니 아직 개봉하지 않아 밀서를 건네주었다.
두변이 밀서를 펼쳐 보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조카 두변, 상황이 변했다. 속히 염주로 와라.’
두변은 저도 모르게 경악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지?
동창 천호인 종정도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에, 내가 직접 염주로 가야 한다고?
분명히 광서 시박사에서 오정도의 상선을 강제로 압류했고, 두변의 천리마도 함께 빼앗겼다.
광서 시박사인 손임 공공은 무골호인으로 이문회를 매우 두려워하기 때문에 종정 자신이 직접 나서기만 하면 상대방은 천리마, 오씨 가문의 부자와 함께 심지어 배상금까지 물어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던가.
종정은 이번 일이 순탄히 해결될 거라 확신했었다. 이문회의 심복인 그가 일을 처리할 때 확신이 없으면 그렇게 단호한 어조로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슨 변화가 생긴 것인지는 직접 염주부로 가보지 않는 이상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두변이 말했다.
“임 백호, 마차를 준비해 주십시오. 염주부로 가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임 백호가 대답했다.
잠시 후 화려한 마차가 두변 앞에 나타났고 임 백호는 직접 십여 명의 동창 무사들을 이끌고 두변을 보호하며 염주부가 있는 남쪽으로 향했다.
두변은 다시 수백 리나 되는 길을 가야 했다.
두변은 쉬지 않고 하룻밤 내내 달리고 나서야 염주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염주부는 진남공의 주둔지로, 광서에서 가장 큰 항구가 있는 지역이다. 비록 규모는 계림성이나 남녕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두 성보다 더 번화했다.
두변은 한 주루에서 오주부 동창 천호 종정을 만났다.
그는 주루에서 가장 좋은 방을 잡고 가장 비싼 술과 안주로 두변을 맞이했다.
종정은 지친 기색을 보이며 자책의 말을 쏟아냈다.
“조카, 이 숙부가 무능해 네 천리마를 가져오지 못했구나. 게다가 오씨 가문의 부자도 구해내지 못했으니 동창의 이름에 먹칠을 했다.”
두변은 이 말을 듣고 놀랐다. 어찌 된 일이지?
“시박사 손임이 대담하게 나온 겁니까? 우리 동창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니요.
혹시 진무사 왕인이 의부가 안 계신 틈을 타 뒤에서 손을 쓴 것 아닙니까?”
종정이 말했다.
“왕인 말고도 우리 동창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있더구나. 시박사는 단지 도구였을 뿐 실제로 오정도의 상선을 가져간 자는 바로 혈교 방주의 혈관음이더구나.”
네? 그 악독한 여자였어? 원수도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이유가 뭡니까?”
두변은 대답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봤다.
종정이 대답했다.
“밀수를 단속한다는 명분으로 상선들을 압류하며 약탈을 하는 것이지. 다 진남공의 군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란다. 너도 알다시피 안남국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진남공이 십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고 있지 않느냐. 오씨 가문의 상선은 여기저기 많은 뇌물을 주었지만, 재수 없게도 혈관음을 만났지 뭐냐. 그 여자가 네 천리마도 같이 가져갔단다.”
‘빌어먹을!’ 두변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 진남공이 군사를 이끌고 남하해 안남국왕을 도와 반란군을 진압한다는 소식을 듣긴 했다. 물론 그때는 대녕 제국의 위상이 다시 서게 될 거라는 기대에 매우 흥분했었는데, 진남공이 군비를 충당하는 과정에서 뜻밖에도 자신에게 불똥이 튀어 버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거냐!
두변은 대종사 영종오의 말버릇이 떠올랐다.
‘대녕 왕조가 곧 끝이구나!’
국운을 건 전투에서 약탈하는 방식으로 군비를 충당하니 정말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혈관음에게 천리마를 빼앗긴 이상,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 사이에 악연이 있었고, 혈관음이 몇 번이나 두변을 죽이려고 한 적도 있었지만, 어쨌든 서로 안면을 튼 사이 아닌가. 게다가 신체 접촉까지 했던 사이이고.
남녀는 하룻밤 만에도 깊은 인연을 쌓을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여인들은 첫날밤을 보내고 나면 마음이 여려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특히 처녀들은 그렇다고 하는데 혹시 그 말이 사실이라면?
두변은 이번 기회에 소문이 사실인지 한번 확인해 보기로 했다.
게다가 만약 두 사람이 다시 뜨거운 밤을 보내게 된다면 이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두변은 제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마침 제가 혈관음과 일면식이 있으니 제가 그녀를 직접 찾아가 천리마를 받아 오도록 하겠습니다.”
두변의 말에 종정이 한숨을 돌리며 말했다.
“그게 좋겠구나.”
하지만 이때, 두변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주위에서 강력한 기운이 느껴지더니 갑자기 등 뒤의 모든 솜털이 곤두섰다.
종정도 마찬가지로 위험한 기운을 감지한 듯, 눈빛을 번뜩이고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방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방문을 걷어찼다.
“안에 누구냐? 빨리 나가.”
밖에서는 아이처럼 맑은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행동은 난폭하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아랫사람들을 다그쳤다.
“주인장, 여기는 내가 사용했던 방인데 개나 소나 다 들여보내? 안에 있는 놈들 다 내쫓고 탁자며 의자며 싹 다 새것으로 바꿔.”
이 말을 들은 두변은 기분이 상했다.
광서성에서 감히 동창에게 이토록 무례하게 구는 자가 있었구나. 정말 사는 게 지겨운 게지.
하지만 두변은 오늘 자리를 마련해준 동창 천호 종정이 있었기에 굳이 나서지는 않았다.
방문이 벌컥 열리고, 주루의 주인장이 들어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종 대인, 죄송하게 됐습니다. 방을 바꿔주실 수 있을까요? 무료로 술과 안주를 다시 준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두변의 얼굴 표정이 변했다.
주인장이 종 대인이란 호칭을 쓴 걸 보면 종정의 신분을 정확히 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 둘에게 방을 바꿔 달라고 말한다는 건, 그만큼 상대방이 가진 위력이 더 크다는 방증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먼저 온 사람이 방을 쓰는 게 맞지 않나?
게다가 두변은 방금 욕하던 여자를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여자는 상당히 오목조목 예쁘장한 얼굴을 하고 있으며 옥처럼 고운 피부를 가진 미인이었다. 키는 165센티미터 정도로 그리 크진 않았으나 가슴은 옥진 군주에 비견할 만큼 컸다.
‘이게 말로만 듣던 베이글녀로군.’
여자는 많아야 기껏해야 열일곱 정도로 보였는데, 도대체 뭘 먹고 컸는지 발육상태가 상당히 좋았다.
두변의 눈빛을 감지한 여자는 두변을 한 번 흘겨보고는 가볍게 무시했다.
오히려 그 뒤에 서 있던 잘생기고 체격이 우람한 남자가 적개심 어린 시선으로 차갑게 말했다.
“뭘 봐? 여(勵) 소저는 너 같은 놈들이 함부로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조심하라고.”
이어서 남자가 짜증 난다는 듯 재촉했다.
“주인장, 안에 있는 사람 빨리 좀 내보내고 안에 있는 물건들은 새것으로 교체해라.”
두변은 남자가 등에 메고 있는 활이 엄청나게 값비싼 강궁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주루의 주인장이 애원하는 눈빛으로 종정을 쳐다봤다.
두변은 종정이 벌컥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종정과 두변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정말 방을 내주었다.
두변과 종정이 문을 나설 때 예쁘장하게 생긴 그 여자는 공기가 오염이라도 됐다는 것처럼 코를 막았다.
이 아이의 뺨을 한 대 후려칠까 싶을 때였다.
주변에 있던 중년 여인 하나가 두변의 눈에 들어왔다.
여인은 매우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며 무명으로 만든 장포를 걸치고 있었는데, 등에는 검을 메고 있었다.
아까 두변이 오싹한 느낌을 받았던 것도 이 중년 여인이 내뿜는 주변을 압도하는 기운 때문이었다.
두변은 이렇게 기운이 강한 여자는 처음이었다. 이런 기운은 대종사 영종오에게서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으로, 이 여인도 무공이 상당히 높을 게 분명했다.
다만 영종오는 사람이 유순해서 이런 강력한 기운을 내뿜는 경우는 좀처럼 없었다.
예쁘장한 여인과 젊은 사내, 중년 여인의 기세가 모두 강렬했지만, 그중에서도 이 중년 여인은 선천적인 오만함으로 가득한 안하무인의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오만함은 그녀의 무도 실력에서 오는 듯했다.
다른 방으로 옮기고 나니, 주인장이 계속해서 허리를 숙이며 종정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더욱 좋은 술과 안주를 내어왔다.
“천 번 만 번 소인의 잘못입니다. 저 방은 여 소저가 한 번 사용한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독점욕이 강한 줄은 몰랐습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소인이 종 대인을 천자각에 모시지 않았을 겁니다. 기분 상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주루의 주인장이 말했다. 종정이 손을 흔들었다.
“괜찮소. 주인장도 욕본 게지.”
주루의 주인장이 탄식했다.
“보아하니 앞으로 저 방은 아무도 받지 않고 계속 비워둬야 할 것 같습니다.”
두변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 천자각이 이곳에서 제일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장소인 것 같은데, 저 베이글녀가 밥 한번 먹었다고 앞으로 계속 비워둬야 한다고?
언제든 저 여자가 사용할 수 있게?
저 여자가 도대체 누구길래 이토록 막무가내로 나오는 거지? 옥진 군주나 영설 공주도 이 정도로 막 나가지는 않을 텐데?’
두변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주루의 주인장이 물러난 후 종정이 말했다.
“조카, 당당한 우리 동창이 다른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했는데도 왜 아무 말도 못 하는지 잘 이해 안 되는 것 같군.”
두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설 공주나 옥진 군주라고 할지라도 이처럼 막 나가진 못할 것 같습니다. 저 여자는 도대체 누굽니까? 도대체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길래 저렇게 행동하는 겁니까?”
종정이 말했다.
“영설 공주나 옥진 군주는 저렇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하지 않지. 하지만 저 아이의 집안은 그 누구도 밉보일 수 없는 집안이기에 가능한 것 같구나.”
“어느 집안입니까?”
“문산 토사부의 홍하 후작인 여씨 가문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