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장: 혈관음과의 재회
두변은 종정의 말에 바로 이해했다.
‘어쩐지. 여자가 토사 공주라서 영설 공주나 옥진 군주보다 더 막무가내로 구는 거였군.’
현재 그녀의 집안인 여씨 가문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다.
광서성에서 가장 대단한 사람이 누구냐 물으면 당연히 진남공 송결이겠지만, 광서와 운남에서 건드려선 안 되는 사람이 누구냐 물으면 당연히 토후(土侯) 여씨일 것이다.
여씨 가문은 세력이 가장 강력한 토사 중 한 곳으로, 광서, 운남, 안남 왕국의 접경지에서 그 영토가 거의 부(府) 두 곳을 합친 정도였다. 길이로는 수백 리나 되었고 휘하의 병력은 수십만에 이르렀으며 정예군만 해도 오만이 넘었다.
문산(文山)과 홍하(紅河) 두 부(府)에 사는 백성들은 황제는 모를지언정 여씨 가문은 모두 알고 있었다. 여씨 가문의 영지는 명목상 대녕 왕조에 속해 있지만 사실 독립왕국이라 봐도 무방했다.
대녕 왕조의 전체 영토는 팔백만 제곱킬로미터인데, 서남 지역에만 서른아홉 개가 넘는 토사가 있고, 그들 영지를 모두 합치면 삼십만 제곱킬로미터나 되었다.
무도가 굴기하면서 이곳과는 다른 지구의 명나라보다 대녕 왕조에서의 토사의 힘이 더욱 강력해진 것이다.
대녕 왕조가 강력했을 때는 토사들이 고분고분하게 굴었지만 대녕 왕조가 쇠락의 길을 걷게 된 후부터는 토사들이 각자 세력을 형성하면서 제국의 중앙에서 내려온 명령을 무시했고 심지어는 거슬리는 일이 생기면 병사를 일으켜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8년 전, 광서와 운남의 십여 곳의 토사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가장 기세가 좋았을 때는 13만이 넘는 병력으로 운남과 광서 절반의 주부를 휩쓸기도 했다.
진남공이 12만 대군을 이끌고 3년 만에 반란을 진압하는데, 이 전투에서 공로가 가장 큰 사람은 진남공이 아니라 여씨 가문의 족장인 여여해였다. 이때만 해도 여여해의 성은 여씨가 아니라 강여(岡厲)씨여서 강여해라고 불렸다.
전투가 막바지에 다다르자 강여해는 토사 연합군을 배반하고 조정에 투항했다.
그 이후로 십여 만의 토사 반란군은 대패했고 진남공 송결은 반란을 진압하며 승리의 고지로 향할 수 있었다. 강여씨는 이 혼란을 틈타 세력을 빠른 속도로 확장했고 영지도 몇천 제곱킬로미터에서 단숨에 오만 제곱킬로미터까지 늘려나갔다.
강여해는 황제에게 충심을 보이기 위해 한족 성씨를 따르겠다고 상주서를 올렸고, 그때부터 황제가 친히 내려주신 이름을 받아 여여해가 되었다.
그런 만큼 여여해는 서남 토후 중에서 제일이라고 여겨졌다.
이쁘장한 얼굴을 한 그 여자가 바로 여여해의 여식이었다. 풍문에 따르면 서남에서 두 번째로 가는 미인이 바로 여천천이고, 제일가는 미인이 옥진 군주라고 했었다.
제국의 세력이 쇠약해지고 토사들이 제멋대로 날뛰는 만큼, 동창도 여천천을 건드릴 수가 없었다.
방금 종정도 모욕을 당했지만 화를 삭이며 참아야 했던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였다.
“여씨 가문이 폐하께 충성을 다하기 위해 성씨를 바꾸었고 폐하께서는 그를 후작에 책봉하셨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제국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지. 이 사람들은 오직 강자에게만 복종하는 경향이 있는데 지금은 제국이 많이 쇠약해졌으니 여씨 가문 사람들도 제국을 깔보기 시작한 것이다.”
두변이 탄식을 했다.
“제국이 힘이 없으니 이런 악질들이 판을 치게 되었군요.”
종정이 말했다.
“진남공이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안남국의 반란을 진압하는 걸 도와주어야 하니, 조정에서도 여씨 가문에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니 이들이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것이지.”
두변이 질문했다.
“여천천 옆에 있던 중년 여자는 누구입니까? 보아하니 무공이 상당히 높은 것 같습니다.”
“무공이 상당히 높은 수준이 아니라 모두가 우러러보는 절대 고수다.
그녀가 바로 북명검파의 검마(劍魔) 이도진이다.”
두변은 흠칫 놀랐다.
‘그 여자가 검마 이도진이라고? 내뿜는 기운에 괜히 숨이 턱턱 막히는 게 아니었군.’
종정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검마 이도진과 네 선생인 영종오는 앙숙 관계인 셈이구나. 벌써 수십 년을 겨뤘는데도 아직 승부를 보지 못했지.”
조금은 감성적인 영종오가 성질이 고약한 노인이라고 해도, 무공 실력은 누구보다 뛰어났다. 영종오가 편찬한 책들만 보더라도 그의 무공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영설 공주, 옥진 군주를 문하생으로 둔 영종오는 제국에서 손에 꼽히는 대종사 중 한 명이었다.
이도진과 영종오가 몇십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승부를 내지 못한 걸 보면 그녀의 무도도 천하제일의 수준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두변이 말했다.
“보아하니 검마 이도진이 여천천을 제자로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여천천이 이도진 밑에서 검술을 배운 지도 어느덧 2년이 되었구나.
동창이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이도진이 제자로 삼은 만큼 여천천의 검술 재능은 상당하다고 하는구나.”
종정이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검마 이도진은 줄곧 봉래도(蓬萊島)에서 나온 적이 없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두변은 여천천의 뒤에 있던 용맹한 남자가 떠올라 물어봤다.
“뒤에 활을 메고 있던 자는 누구입니까?”
종정이 말했다.
“여씨 가문의 궁군(弓軍) 만호로, 천재 사수인 강현이다.”
두변은 손을 가로저었다.
“일단 저자는 신경 쓰지 않아야겠습니다. 여씨 가문이 제멋대로 날뛴다고 한들 당장 저희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혈관음을 찾아가 천리마를 받아오는 게 급선무인 것 같습니다.”
두변은 다시 한번 혈교방주 혈관음 앞에 나타났다.
이 여인은 여전히 탄탄하고도 화끈한 몸매를 가졌지만 두변을 보는 눈빛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방금 두변이 찾아왔다는 보고를 들은 그녀는 왜인지 모르지만,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며 온몸이 달아올랐다.
이런 신체적 반응에 놀란 건 혈관음 본인이었다. 이렇게까지 반응한다고?
두 사람은 기껏해야 작은 악연이 있을 뿐이고, 게다가 혈관음에게 두변은 달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혈관음은 한참을 몰입한 후에야 강력한 살기를 뿜어낼 수 있었다.
“네가 감히 나를 찾아와?”
혈관음이 차갑게 말했다.
두변이 말했다.
“당신을 만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제가 여러 번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번에 있던 신체적 접촉은 당신이 한 것이지 묶여 있던 제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입만 살았구나.”
혈관음이 화를 내자, 두변이 손을 들어 항복 의사를 밝혔다.
“자, 자, 알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만하지요.”
그는 뒤이어 혈관음에게 관심을 두는 척 물었다.
“중독 치료는 잘 되었습니까? 나중에도 발작이 일어났나요?”
혈관음이 언짢은 듯이 말했다.
“괜찮아졌다.
네놈이랑 노닥거릴 시간 없으니 용건이 있으면 빨리 말해라.”
“듣자 하니 광서 수군과 광서 시박사가 연합해서 오정도가 이끄는 해선을 압류했다고 하던데요.”
“그런데? 그 해상들은 소금과 다른 상품들을 밀매해 제국을 갉아먹고 있는 종양 같은 존재인데 압류하면 안 된단 말이냐?”
“진남공의 군비가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까?”
혈관음이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팔 수 있는 건 다 팔았지만 아직 백만 냥도 더 부족하다. 그래서 대해상들의 해선을 압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압류하는 건 당연하지만, 몸값과 배값을 얼마나 내면 사람과 해선을 돌려받을 수 있는지 알려주시겠습니까?”
혈관음이 두변을 쳐다보고는 말했다.
“원래는 십만 냥이다.”
“십만 냥은 너무 많습니다. 오정도의 화물선에 실린 물건들은 다른 사람들의 것입니다. 십만 냥으로 가문이 무너지진 않을 테지만 이렇게 큰 출혈은 걱정됩니다.”
혈관음이 물었다.
“오정도랑 무슨 관계인 것이냐?”
“그는 제 누이 두평아의 시아버지입니다. 제국의 이익과 진남공의 전쟁 준비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몸값을 내도록 해 주십시오. 이건 너무 가혹합니다.”
혈관음이 잠시 망설였다.
“이번에 내가 다섯 척을 압류해 부족한 자금을 대충 메웠으니, 오정도 가문에게는 오만 냥을 내어놓고 사람과 해선을 가져가라고 해라.”
혈관음이 말은 거칠게 하지만 두변과의 하룻밤 정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오정도가 두변 친누이의 시아버지라는 말을 들어서인지, 어쨌든 사정을 봐줘서 단번에 금액을 절반으로 줄여주었다.
두변이 다시 혈관음에게 관심을 보이며 말했다.
“참, 양귀비를 당신에게 주어 독에 중독시킨 사람은 누구입니까? 복수는 했습니까?”
혈관음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알려고 하지 마라. 그리고 그 사람은 나도 복수할 수 없는 사람이다.”
두변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혈관음은 진남공의 의녀이기도 하고 광서에서의 세력이 막강해 동창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데, 어째서 복수를 할 수 없다는 거지?’
“나를 걱정해 주는 척 연기할 필요 없다. 분명 하고 싶은 말이 있을 테니 그냥 말해라.”
혈관음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참, 염주부의 길거리에서 장미 정유(精油)를 팔길래 한 병 사 왔습니다.”
두변은 장미 정유를 혈관음에게 건네주었다.
비록 향수보다는 못하지만 장미 정유는 여자에게 선물하기에 가장 좋은 물건이기에, 두변은 은자 열 냥을 투자했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려면 먼저 선물을 보내야 하는 법.
“나는 지금껏 그런 걸 사용해 본 적이 없다. 할 말이 있으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라.”
혈관음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두변이 장미 정유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당신들이 압류한 오정도의 상선에 말 한 필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 말이 겉보기엔 평범해 보이지만 사실은…….”
“값어치가 만금은 되는 천리마지. 물론 우리에게 잡히긴 했지만, 천리마를 호송하던 자들의 무공이 매우 높더군.”
“그 네 사람은 우리 동창의 사람이고, 그 말은 제 것입니다.”
“네 것이라고?
그 말은 값어치가 만금이나 되는 천리마던데, 어찌 한낱 환관 학원의 환관이 그런 말을 갖지?”
“졸업 시험의 기마술에서 높은 점수를 받으라고 이문회 의부께서 사 주셨습니다.”
혈관음은 그 말을 믿기 어려웠다.
“이문회는 줄곧 사치를 부리지 않고 검소하게 생활해왔는데 네게 말을 사주기 위해 은자 만 냥을 썼다고?”
두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천리마를 호송하던 네 명이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입을 꾹 닫고 있더라니.”
두변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졸업 시험까지 백일도 남지 않아서 그 천리마가 제게는 매우 중요합니다. 제 성적뿐 아니라 제 장래까지도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천리마를 제게 돌려주셨으면 합니다.”
혈관음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안타깝게도 한발 늦었구나.”
두변의 얼굴빛이 굳었다.
“무슨 일입니까?”
“천리마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
“팔았다고요? 누구에게 얼마에 팔았습니까?”
두변이 놀라 되물었다.
“은자 천 냥에 팔았다.”
두변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바보 아닙니까?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내 천리마를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다른 사람한테 넘깁니까? 게다가 제 의부가 만 냥을 투자해 샀는데 그걸 천 냥에 팝니까!”
두변이 쏟아낸 말에 혈관음도 격노해서는 검을 뽑아 들었다.
“또 무력을 행사하시겠다? 나를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것 말고 당신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습니까?
다른 사람의 것을 약탈하는 것 말고 당신이 뭘 할 줄 아냔 말입니다!”
두변도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혈관음의 아름다운 얼굴에 일순 경련이 일더니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도 뜻밖에 다시 검을 거두었다.
이 일은 확실히 혈관음 자신에게 잘못이 있으니 두변에게 무력을 행사할 명분이 부족했다.
가까스로 화를 누그러뜨린 혈관음이 차근차근 말했다.
“내가 괜히 보호비나 받으려고 약탈한 줄 아느냐? 의부가 출병하시는데 부족한 군비는 어떡하라고? 십여만 대군의 식량은 누가 책임질 건데? 황제는 무능하고 엄당과 문관, 무장 집단들은 다 똑같은 놈들인데 나를 탓해? 대해상들은 매일같이 밀수하며 자기들 잇속만 챙기는데 그들을 벌하는 게 잘못된 건가?”
사실 혈관음의 말도 일리가 있으니 두변도 뭐라 반박할 수 없었다.
현재 두변은 무관무직이지만, 이문회의 의자로 이미 엄당의 핵심 인물이 되었고 제국 권력의 한 축을 이루었다.
제국이 이 지경까지 오게 된 배경에는 문관 집단, 무장 집단, 그리고 엄당 모두 책임이 있는데 어찌 혈관음만 탓할 수 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두변도 면목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