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장: 나쁜 남자의 본능
두변이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혈관음에게 사과를 했다. “그런 식으로 말해서 미안합니다. 제국이 무능한 나머지 당신을 약탈의 길로 접어들게 했습니다.”
두변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자 혈관음은 오히려 눈시울을 붉혔다.
“네가 내게 그렇게 말하면 나도 괴롭다. 앞으로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라.”
혈관음이 말을 하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두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혈관음의 입에서 이런 표현이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저번에 있었던 일 때문에 혈관음도 알게 모르게 두변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이 여인은 절대 다시는 건드리지 말아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사고 나겠어!’
두변은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천리마는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나는 그 천리마가 진귀한 보물인 걸 알았기에 의부께 드리려고 했다. 그런데 누군가 그 말을 보고는 내 손에 강제로 은자 천 냥을 쥐여주며 말을 끌고 갔다. 나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혈관음한테서 강제로 천리마를 사 갔다고? 혈관음보다 더 막무가내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란 소리로군.
두변이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너나 나나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다. 내게 아편을 주어 나를 중독시킨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다고 했지? 내가 복수할 수 없는 그자는 바로 여씨 가문의 공주인 여천천이다.”
“이런 젠장!”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두변은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두변이 물었다. “그 악독한 년이 왜 당신을 해하려 한 겁니까?”
혈관음이 말했다.
“보복이지. 그녀는 옥진 군주와 공작 대인에게 복수를 꿈꾸고 있지만, 그들에게 직접 손을 댈 수 없으니 나를 고른 셈이지.”
“여씨 가문이 왜 공작 대인과 옥진 군주에게 복수하려 합니까?”
“당시 토사 반란으로 전쟁이 한창일 때, 공작 대인이 여여해와 암암리에 동맹을 맺고 그로 하여금 토사 연합군을 배반해서 나오게 하라고 했다. 그리고 구두로 사돈 관계를 맺었지. 그때부터 여여해의 아들 여담편이 스스로 옥진 군주의 정혼자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여여해가 공작부로 찾아서 혼담을 꺼냈지만, 공작 대인은 옥진 군주를 여씨 가문에 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이전에 약속했던 사돈 관계가 사실은 소공야(小公爺)가 여천천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이라고 해버렸다. 그런데 여천천은 이미 정혼자가 있었기 때문에 여씨 가문에서는 자기들을 모욕했다고 여겼고 그때부터 공작부에 적개심을 품은 것이지.”
“그런데 왜 당신이 복수의 대상이 되었습니까?” “여씨 가문의 소주(少主)가 옥진 군주를 아내로 맞이하지 못하게 되자 일단 나를 첩으로 들이려고 의부에게 혼담을 꺼냈다. 의부께서 내게 의사를 물어봤고 내가 싫다고 하니 의부는 혼담을 거절하시게 됐다. 여천천은 우리가 여씨 가문을 무시했다고 생각해 내 측근을 매수해 내게 아편을 먹여 중독 증세가 발현되게 한 후 여씨 가문의 꼭두각시로 만들려고 한 것이지.”
“이런 못된 년을 봤나.”
두변이 화를 내며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여천천이 그렇게나 아름답고 게다가 가슴 크기도 그렇게 호탕한데, 응석받이로 자란 탓에 마음 씀씀이가 이리도 악랄하니, 정말 사갈(蛇蝎)과도 같다고 할 만했다.
두변이 혈관음과 정작 무엇을 한 것은 아니지만, 특별한 관계를 맺은 사이이지 않은가?
여천천은 혈관음을 해쳤을 뿐만 아니라 은자 천 냥으로 내 천리마를 억지로 사가며 마음 내키는 대로 날뛰는구나!
긴 침묵이 흐르고 나서 혈관음이 고개를 들어 두변을 쳐다봤다. “이 천리마가 너한테 그토록 중요한 것이냐?”
두변이 고개를 끄덕였다. “졸업 시험에서 이 천리마가 있어야 고득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경쟁상대인 당엄도 누를 수 있고요. 그는 천리마를 가졌을 뿐 아니라 기마술도 상당하다는군요.”
“나와 같이 여천천에게 가서 천리마를 돌려 달라고 해보도록 하자.”
“전 이미 그년을 봤습니다. 겉모습과 달리 속은 교활하기 그지없으며 마구잡이로 날뛰더군요. 완전 안하무인인 그녀가 과연 천리마를 돌려주려 할까요?”
두변으로서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혈관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힘들겠지. 어려서부터 응석받이로 자라서 제멋대로 굴고 독점욕도 강하지. 좋은 물건이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면 그걸 망가트릴지언정 순순히 내어주지는 않을 성격이다.”
혈관음이 난처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아마 우리는 천리마를 되찾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두변도 이득을 봤으면 봤지 손해를 보는 성격은 아니기에 미간을 찌푸렸다.
여천천의 배경이 엄청나기에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존재라는 건 알겠지만, 두 손 놓고 당하고 있기는 싫었다.
두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방법이 생각났으니 여천천에게 가겠습니다. 천리마를 되찾아올 뿐 아니라 여천천에게 무엇이 잘못된 건지 똑똑히 가르쳐줘야겠습니다.”
토사 공주인 여천천이 도가 지나칠 정도로 날뛰고 있었다. 지난번에는 종정과 두변을 방에서 쫓아내기도 했고, 혈관음을 해하려고 했으니, 반드시 여천천에게 한 방 먹이고 오리라 다짐했다.
혈관음은 호기심과 의구심이 가득했으나, 동시에 기대감으로도 흥분했다.
여천천은 제국 서남의 공주라고 불리는 자로, 옥진 군주라면 몰라도 여천천은 절대로 건드릴 수가 없는 자였다.
혈관음도, 동창도 어찌할 수 없는 자를, 두변이란 한낱 소환관이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두변이 여천천에게 한 방 제대로 먹인다면 그것은 혈관음을 대신해 복수해 준 것이기도 했다.
“여천천도 당신의 원수이니 내가 여천천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인다면 당신의 복수를 대신해준 셈이 되기도 합니다. 그럼 저한테 어떻게 보답하시겠습니까?”
두변은 쉬지도 않고 말을 이어갔다. “저번에 있던 신체적 접촉은 제가 묶여 있었기 때문에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는데, 다시 한번 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말을 내뱉은 두변은 곧바로 후회하며 자신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
혈관음을 도발하면 안 된다고 그렇게나 다짐해 놓고, 세 치 혀를 함부로 놀렸으니 정말로 사달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두변의 말을 들은 혈관음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져서는 심장이 저릿해질 지경이었다. 그녀가 이를 부득 갈면서 두변을 노려보았다.
“한 번만 더 나를 희롱했다간, 네놈이 오줌 지릴 정도로 때려주마.”
두변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아 참, 저희와 함께 가주실 수 있는, 아주 권위 있는 분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상황이 통제될 테니까요.”
혈관음은 괘씸하다는 눈빛으로 두변을 노려보았다. 사실 혈관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두변이 계속해서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니 돌연 화제를 전환한 두변이 얄미울 수밖에.
하지만 일 얘기로 다시 돌아오자, 혈관음도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 영향력이 있는 분을 알고 있다. 그분을 모시고 같이 여천천을 보러 가면 되겠군.”
두변이 물었다.
“누굽니까?”
‘진남공이나 옥진 군주는 이미 병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갔으니, 그 둘은 아닐 텐데.’ “저홍면 노장군이시다.”
혈관음이 대답했다.
혈관음의 대답을 듣자마자 두변은 일순 숙연해져 본능적으로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저홍면은 대녕 왕조의 살아있는 충혼(忠魂)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저홍면이라는 여인은 서남 지역의 토사지만, 대녕 왕조의 장수들보다 더욱 충직한 토사였다. 제국에서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전장에서는 늘 그녀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저홍면과 그녀가 이끄는 낭군(狼軍)은 북달, 건로, 서남 토사 반란 등 전장에서 거침없이 칼을 휘두르며 전장을 누볐다.
저홍면 장군은 제국에 일이 있을 때마다 조정에서 조서를 받는 즉시 병사들을 이끌고 움직였으며, 그곳이 천 리, 만 리가 떨어진 곳이라고 해도 제시간에 도착하여 조정의 부름에 응했다.
몇십 년 동안, 저씨 가문의 낭군은 제국을 위해 전사했고, 덕분에 병사 수가 2만 명에서 7천 명까지 격감했다.
저홍면의 부친, 아들, 그리고 남편까지 모두 제국을 위한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그리하여 저홍면은 여인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낭군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저홍면 노장군이 서남 지역에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터라, 다른 토사들이 꿍꿍이를 품긴 해도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저씨 가문의 낭군은 굶주린 늑대들을 모아둔 것처럼 살기가 가득하고 무예가 뛰어난 정예병들인지라, 다른 토사가 그들을 상대하기엔 너무도 벅찼다.
8년 전, 서남 토사 반란이 일어났을 때, 진남공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반란을 평정하러 서남에 왔었다. 그때 가장 혁혁한 공로를 세우고 거침없이 길을 뚫었던 부대가 바로 저홍면 노장군이 이끌던 낭군이었다.
반란이 평정된 후, 황제는 저홍면을 제국의 후작에 봉하려고 했지만, 저홍면이 이를 거절했다.
만약 자신이 후작에 봉해진다면, 여여해를 공작에 승진시켜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여여해가 진남공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었다. 저홍면은 그런 상황은 진남공에게도 불리하다고 생각했고, 제국에게도 썩 좋은 영향을 끼치진 못한다는 판단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이 때문에 저홍면 노장군은 전장에서 수없이 많은 공로를 쌓았음에도 백작에 불과했다.
저홍면은 올해 쉰일곱의 나이임에도 안남 왕국의 평정을 도우라는 황제의 조서를 받들자마자 낭군 7천 명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 대녕 왕조를 위해 전장에 나서겠다고 했다.
그래서 혈관음이 저홍면 세 글자를 입에 올리자마자, 두변은 우상과도 같은 존재를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놀라움과 짜릿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두변의 의부인 이문회가 일생에 가장 존경하는 사람 또한 저홍면 노장군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주저 없이 나섰으며, 절대적인 동맹 관계였다.
“진남공의 대군은 이미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왜 저홍면 장군께서는 아직 염주부에 계신 겁니까?”
두변이 물었다.
혈관음이 대답했다.
“악한 자들이 쓸데없는 유언비어를 만들어서 퍼트린 탓이지. 저홍면 장군께서 알아서 몸을 사리시는 것이다.”
혈관음의 의부인 진남공과 저홍면 장군은 모두 지천명의 나이를 지났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계속 저홍면 장군이 진남공의 숨겨둔 여인이라고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다니는 것이다.
“가기 전에 머리를 빗고 의관을 한 번 정리하고 싶습니다. 정돈된 모습으로 노장군을 뵈러 가고 싶어서요.”
두변이 말했다.
“알겠다.”
혈관음이 말했다.
혈관음은 두변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사이 재빠르게 탁자 위에 놓인 장미 정유를 가져와 소매 안으로 숨겼다.
하지만 두변은 혈관음의 동작을 보고도 모른척했다.
‘이 여인을 더 자극했다가는 진짜 무슨 사달이 나겠네.’
“아, 그리고 노장군을 뵈러 가기 전에 먼저 오정도 부자를 놓아주시지요. 시간이 없습니다.”
두변이 말했다.
“그래.”
혈관음의 표정은 꼭 도둑질을 들킨 도둑처럼 부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아이고, 참 솔직한 여인이네. 저 어여쁜 얼굴에 뭐 하나 숨길 줄도 모르다니.’
시박사 관아 안.
혈관음은 오정도 부자를 풀어주기 전, 공무 수행 차원에서 그들을 훈계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혈관음은 시박사에서 직위를 갖고 있었다.
“어쩜 너희 같은 해상들은 밀수밀매를 시작하면 양심도 없어지는 거지? 이렇게 몇십만 냥에 달하는 소금을 시중에 풀게 되면, 나라에서 소금세를 어떻게 징수하냔 말이다.”
혈관음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혈관음의 옆에는 시박사의 환관 손립(孫立)이 서 있었다. 손립은 손임 공공의 심복이자 광서 엄당 수군의 천호였다.
두변은 휘장 뒤로 몸을 숨긴 채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편법을 써서 두 사람을 풀어주는 것이니 당당하게 두 사람 앞으로 나설 수가 없었다.
시박사의 손립 환관은 혈관음의 오른쪽에 서 있던 터라, 휘장 뒤에 숨어있던 두변을 보게 되었다. 그는 몹시 공경한 태도로 두변을 향해 공수의 예를 표했다. 근래 두변이 떨친 명성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뜻이리라.
두변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답례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