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장: 내가 두변 아우를 아는 것이지.
혈관음은 이어서 오정도 부자를 훈계했다.
“지금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것도 모자라서, 상선을 돌려달라? 정말 황당무계한 소리로군. 너희들이 빼돌려서 팔고자 하는 소금의 양만 봐도 충분히 참수하고도 남는다.”
혈관음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어쩐지 위화감이 들긴 했다.
해적 두목이 밀수밀매를 한 해상에게 훈계하는 꼴이니,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오정도가 즉시 무릎을 꿇고 혈관음에게 빌었다.
“부디 혈 방주께서 넓은 아량으로 저희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손 공공, 한 번만 봐주십시오.”
오정도는 당연히 혈관음이 자신을 참수하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선을 되찾아오지 못한다면, 오씨 가문도 이대로 파산할 수밖에 없으니 미친 듯이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빌 수밖에 없었다.
‘어지간히 좀 하시죠.’
두변이 혈관음을 슬쩍 쳐다보았다.
“하지만 오씨 가문에서 여러 번 군사비를 지원해준 적 있으니, 이번에는 사람을 잡지도, 상선을 압류하지도 않겠다. 하지만 상선을 찾아가려면 은자 오만 냥을 내야 한다. 이의 있는가?”
혈관음이 물었다.
오정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혈관음이 이렇게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고작 오만 냥이라고?
오정도는 이번 사건으로 큰 출혈이 있을 거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가 예상했던 혈관음이 제시할 액수는 십오만 냥이었고, 못해도 십만 냥 이상의 지출이 생길 것이라 각오했던 터였다.
게다가 어쨌든 앞으로 3, 4년 간은 전쟁 때문에 해상으로서 돈 벌 생각을 접어야 했던 오정도는 단돈 오만 냥에 모든 게 해결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다른 해상들의 상선도 혈관음에게 압수당했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들 모두 밀수밀매 품목의 절반에 가까운 값어치를 납부한 뒤에야 상선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오정도는 왜 자신만 특별히 예외인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놀란 건 오정도뿐만이 아니었다. 혈관음 옆에 서 있던 시박사 손립 환관도 혈관음의 태도가 석연치 않았다.
‘오정도가 돈이 많고 사람 됨됨이가 좋은 건 알고 있었다만, 얼마나 대단한 뒷배를 뒀길래 혈관음이 이렇게 이자에게 관대한 거지?’
“왜? 싫으면 말로 해라.”
오정도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자, 혈관음이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눈이 휘둥그레졌던 오정도는 정신을 퍼뜩 차리고 연신 감사하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아이고, 소인이야 당연히 좋지요. 당연히 좋습니다. 대인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혈관음이 말했다.
“그럼 우선 상선을 찾아가고, 나중에 은표를 시박사로 보내라.”
“예, 예. 알겠습니다.”
오정도는 바닥에 넙죽 엎드린 자세로 대답했다.
정말 너무도 기쁜 일이로구나. 절반 이상이나 되는 가산을 아꼈으니, 어찌 미칠 정도로 기쁘지 않을까.
시박사 관아를 나선 오정도는 상선을 찾으러 부두로 향했다.
두변이 오정도의 뒤를 쫓아가서 말했다.
“어르신, 배를 되찾으신 뒤에 먼저 오주부에 안부를 전하시지요. 오 부인과 평아 누이가 어르신 걱정을 많이 하고 있을 겁니다.”
오정도가 멈칫하면서 물었다.
“그쪽은 뉘신지?”
“두변입니다.”
옆에 있던 오염명이 물었다.
“자네가 바로 두변이라고? 평아의 아우?”
“네, 제가 바로 평아 누이의 아우, 두변입니다.”
오정도가 웃으면서 말했다.
“한 가족이었군. 오주부의 소식을 전해줘서 고맙소. 이 은자로 따뜻한 차 한 잔 마시게.”
그는 약 20냥 정도 되는 은원보를 하나 꺼냈다가 또 하나를 더 꺼내서 두변의 손에 쥐여줬다.
은원보 하나는 두변에게 건네는 견면례(見面禮: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첫인사 때 주는 선물)였고, 두 번째 은원보는 심부름을 해줘서 고맙다는 뜻이었다. 오정도는 두변이 이런 시답잖은 심부름을 틈틈이 하면서 돈을 버는 사람인 줄 알았던 것이다.
오정도의 눈에는 두평아 친정은 놀고먹는 파락호에 불과했고, 두평아가 오주부에서 가져다주는 은자로 생계를 유지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겉으로야 친근한 척을 했지만, 속으로는 두변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어쨌든 장사꾼이기에 가난한 친척을 중시하긴 어려웠고, 돈 때문에 시집온 며느리의 처가이니 더욱이 그러했다.
“바삐 움직여야 할 때이다 보니, 겉치레는 삼가겠소. 만약 오주부로 돌아가던 길이라면, 번거롭겠지만 우린 모두 무사하고, 빠른 시일 내에 집으로 돌아간다고 말 좀 전해주시오.”
오정도는 말을 마친 뒤, 다시 아들과 함께 부두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하려고 했다.
두변은 손바닥에 놓인 은원보 두 냥을 보면서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난감해했다.
‘또 돈 보고 접근하는 비렁뱅이 친척 취급을 받았군.’
하지만 오정도는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았을뿐더러 친절하기까지 했으니, 화를 낼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때, 두변의 뒤에서 누군가가 다급한 발걸음 소리를 내면서 달려왔다.
몸을 돌렸던 오정도 부자는 무의식적으로 다시 몸을 돌려서 두변의 뒤를 바라보았다. 달려오던 사람이 시박사 천호 손립 환관이라는 것을 알아본 두 사람은 순식간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일에 무슨 차질이 생겼다고 확신하고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것이다.
“소인, 손 공공을 뵙습니다.”
오정도 부자는 허리를 숙이며 예를 올렸고, 속으로 이 길거리에서 무릎을 꿇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결국 그들의 상선은 명목상 시박사에게 압류당한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시박사 천호 손립은 오정도 부자 따위야 거뜬히 외면하고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환관들은 자기보다 아래인 사람들을 깔보는 경향이 있는데, 시박사 소속인 손 공공은 특히나 해상들을 더욱 같잖게 보았다.
손립이 두변을 바라보면서 아첨 가득한 표정을 보였다.
“두변 아우, 한참을 찾았잖소. 조금 전에 혈 방주께서 계신 터라 따로 대화할 기회가 없었지 않소이까. 아우가 금세 사라져버려서 일부러 이렇게 찾으러 나온 것이오.”
“무슨 일이죠?”
두변은 오정도 부자를 대할 때와 완전히 다르게 차갑게 대꾸했다.
“천리마 일은 정말 미안하게 됐소. 어쩌다 보니 같은 편의 것을 건드려 버렸지 뭐요. 천리마를 호송하던 그 형제들도 참으로 충직하지 않소? 무슨 수를 써도 절대로 입을 열지 않더군요. 만약 그 천리마가 두변 아우의 것인 것을 알았더라면, 우리 형제들도 절대로 동창의 천리마를 압류하지 않았을 것이오. 의부께서 이 일을 들으시더니, 나중에 꼭 직접 이문회 공공을 뵙고 사죄드리고 싶다고 말씀하셨소. 그리고 한 번 또 한 번 내게 당부하시더군. 만약 두변 아우를 보게 된다면, 꼭 사과하라고 말이오.”
손립이 두 손을 공손하게 모은 뒤, 허리를 깊이 숙이며 예를 올렸다.
“두변 아우, 이 형이 진심으로 사과하오.”
시박사를 장관하는 손임 공공이 무골호인이라는 말이 맞는 듯했다.
이어서 손립이 은표 한 첩을 두변의 손에 쥐여주면서 말했다.
“이건 우리 시박사의 작은 성의이니, 차 한 잔 마시면서 마음 좀 푸시오.”
두변이 은표를 슬쩍 보았다.
손립이 건넨 은표는 족히 이천 냥이 되는 액수였고, 결코 성의 없는 사과가 아니었다.
두변이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
“어차피 한 가족인데, 오해가 풀렸으면 됐습니다.”
“그럼, 그럼, 맞는 말이고 말고. 두변 아우, 잠시 시간이 있다면 이 형이 술 한 잔 사줘도 되겠소?”
손립이 다정하게 물었다.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손 공공께서도 바쁘실 텐데 볼일 보시지요.”
두변이 단칼에 거절했다.
“알겠소. 나중에 두변 아우가 시간이 날 때 꼭 이 형이 술 한 번 사게 해주시오. 두변 아우를 제대로 접대하지 못했다가는, 정말 창피해서 죽을 지경이니 말이오.”
손립은 다시 한번 두변에게 예를 표한 뒤에 더욱 은근하게 미소를 지었다.
손립은 두변이 단순히 이문회의 의자라는 이유로 이토록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이런 태도로 두변을 대하는 이유는 보름 전에 있었던 과거시험 사건 때문이었다. 그 일로 두변은 자신을 노리던 세력들을 한 번에 휩쓸면서 존재감을 알렸고, 사람들은 두변의 눈 밖에 났다가는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손립은 처음부터 끝까지 두변에게만 시선을 두었고, 오정도 부자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옆에서 병풍보다도 못한 존재로 취급 받은 오정도 부자는 지금 눈앞에 벌어진 이 광경을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광서 지역의 모든 해상은 시박사의 손 공공을 거의 조상처럼 떠받들어야 했다. 그들은 매년 명절 때마다 빠짐없이 시박사에 은자를 보내야 했는데, 은자를 보내는 것도 줄을 서서 보내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은자를 선물한다고 해서 차 한 잔 대접받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시박사 문 앞에서 절을 한 번 올릴 기회를 얻는 정도였다.
시박사의 손립 공공이 평소에 해상들을 얼마나 깔보았냐 묻는다면, 그는 평소 콧구멍이 보일 정도로 턱을 치켜들고 다녔고, 은자를 받은 뒤에도 그가 원할 때라면 언제든 해상들을 욕하고 골탕 먹일 수 있었다. 그리고 해상들은 그가 욕을 하든 뭘 하든, 그저 조용히 무릎을 꿇은 채 웃는 얼굴로 그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해상들은 언제든 손립을 보기만 하면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이거나 무릎을 꿇을 생각부터 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손립은 마치 태어나서 한 번도 웃어본 적 없는 사람이자, 성내지 않아도 위엄이 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방금 오정도 부자가 본 손립은 무척 친절한 데다 아첨 섞인 웃음을 보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손립이 사람이 바뀌어 있었다!
‘이 두변이란 자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두평아의 아우라고 하지 않았나? 파락호 가문 출신의 보잘것없는 환관 아니었나?’
시박사 손립 공공이 등을 돌리고 자리를 떠나려고 하자, 오정도가 서둘러 두변에게 물었다.
“두변 조카, 손 공공 어르신을 아는가?”
오정도의 말을 들은 손립이 몸을 휙 돌려서 오정도를 향해 호통쳤다.
“두변 아우가 나를 어떻게 안단 말이오! 내가 두변 아우를 아는 것이지!”
오정도는 식은땀을 삐질 흘리면서 손립을 향해 허리 숙여 사죄했다.
“소인은 눈앞에 태산을 두고도 태산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놈입니다. 두변 조카가 어떤 사람인지요?”
시박사 손립은 이때다 싶어서 목소리를 낮게 내리깔고 위엄있는 모습으로 두변을 소개했다.
“여기 계신 두변 선생은 미래 동창 진무사가 되실 이문회 대인의 의자이자, 미래 광서 동창의 소주인이시네. 이분을 이렇게 뵐 수 있는 것만도 자네들에게는 정말 하늘이 내린 행운이란 말이네!”
오정도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두변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이문회 대인이라면 나도 잘 알고 있지. 그분은 광서의 초특급 인물이자 진정한 거물이잖아. 그리고 엄당의 차세대 수령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이고. 그런데 이 두변이라는 청년은 두평아의 아우이자 파락호인데, 어떻게 이문회 대인의 의자가 된 거지?’
오정도는 의아해하다가 문득 깨닫고야 말았다.
‘혈관음이 내게 고작 오만 냥 은자만 내라고 하고, 내게 매질 한 번 안 한 이유가 바로 이 두변 때문이로구나!’
오정도는 허리를 깊이 숙이면서 두변을 향해 예를 올렸다.
“이 늙은이가 이렇게 대단하신 분을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조카, 도와줘서 정말 고맙소이다. 덕분에 우리 오씨 가문이 이번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 옆에 있던 손립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두변 아우, 오정도 이자를 아시오?”
두변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각별한 사이지요. 오 어르신은 제 누이의 시아버지이십니다.”